소설리스트

현계지문-75화 (75/916)

75화. 이동령

석목은 부적을 만드는데 집중하던 중 갑자기 누군가가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문을 열자 금신이 서 있었다.

“금 사형이 어쩐 일이십니까?”

석목이 금신을 방안으로 들이며 물었다.

방을 이곳저곳 둘러보던 금신의 시선이 탁자 위에 멈췄다. 탁자에는 부적지와 법묵, 법붓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고, 완성된 부적도 몇 장 있었다.

“석 사제는 정말 부지런하군. 상처를 치료하면서도 준비를 소홀히 하지 않다니.”

금신은 곧바로 본론을 꺼내지 않고 석목을 칭찬했다. 석목이 살짝 웃으며 대꾸했다.

“너무 무료해서 예비용으로 몇 장 만들었을 뿐입니다.”

금신은 막 제작된 부적들을 손에 들고 자세히 살피기 시작했다.

“석 사제가 제작한 부적은 법력이 충만하고 성공률도 상당히 높지. 설령 영계 부적술사라 해도 석 사제만큼 부적 제작에 능한 자는 없을 것이야.”

금신은 한숨을 쉬며 유감스럽다는 듯 말을 이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거점에 있는 사람들은 이 부적들을 쓰는 혜택을 누릴 수 없게 됐군.”

“그게 무슨 말이죠?”

석목이 물었다.

“하하, 방금 연맹으로부터 지령이 내려왔다네. 석 사제를 동북의 다른 거점으로 이동시키라더군. 내가 마침 한가해서 직접 전하러 왔지.”

금신이 웃으며 품에서 옥간을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석목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었다.

금신의 말대로 그것은 연맹의 서명이 담긴 이동령이었다. 열흘 이내에 현릉산(玄凌山)의 비밀 거점으로 이동하라는 내용이었다. 거점의 위치가 표시된 지도도 첨부돼 있었다.

지도를 살펴본 석목의 표정이 밝아졌다.

현릉산의 거점은 현재 석목이 있는 전방에서 멀리 떨어진 후방에 위치해 있어서 상대적으로 안전할 것 같았다.

옥간에는 이동의 사유까지는 밝혀져 있지 않았으나, 후방으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석목에게 나쁜 소식이 아니었다.

“금 사형에게 폐를 끼쳤습니다. 그럼 저는 곧 이곳을 떠나야겠군요.”

석목이 옥간을 챙기며 공손하게 말했다. 그러자 금신이 살짝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주저하며 말했다.

“그전에 석 사제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이 하나 있네.”

“네, 편하게 말씀하셔도 됩니다.”

“알겠네. 우선 거점의 대표로서 모두를 대신해 석 사제에게 감사를 표하지. 알다시피 현재 전황이 긴박해 부적의 필요성이 굉장히 높아졌네. 그래서 석 사제가 부적을 좀 만들어주기를 바라네. 원래대로라면 몸이 완전히 회복된 후 부탁해야겠지만, 곧 이곳을 떠나야 하니 지금이 아니면 안 될 것 같네. 부적 목록과 재료는 전부 가져왔고, 공로점수도 이전보다 5할 더 챙겨주겠네.”

금신이 품에서 옥간과 부적지, 그리고 영석 몇 개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석목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 것이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 힘이 닿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석목은 신중하고 공정한 인물인 금신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부적을 연습할 수 있고 공로점수까지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석목의 말을 들은 금신은 크게 기뻐하며 감사인사를 한 뒤 방을 나갔다.

* * *

열흘 후, 현릉산맥.

수천 장 높이의 험준한 산기슭에서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미간을 찌푸린 채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석목이었다.

옥간의 지도에 따라 현릉산맥을 찾아왔지만, 주위를 아무리 돌아보아도 그를 맞이하러 나오는 사람이 없었다.

“거점의 입구는 분명히 진법에 숨겨져 있을 터. 설마 스스로 찾아오라는 것인가….”

석목은 할 말을 잃었다.

진법에 대한 그의 지식은 아직 얕은 편이었고, 따라서 환술진법을 간파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아주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석목의 눈이 가늘어지면서 금색으로 변했다. 그는 주위의 땅을 둘러보다가 한 군데의 풀밭에 웅크려 앉았다. 그리고 발자국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생긴 지 오래 된 듯한 흐릿한 발자국이었지만 석목의 뛰어난 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석목의 눈에 그것은 마치 거대한 코끼리의 발자국처럼 매우 크고 뚜렷하게 보였다.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자국을 따라 앞으로 나아갔다. 앞쪽에도 사람이 이동한 흔적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다.

돌 위나 단단한 바닥의 흔적은 분간하기 어렵기도 했지만, 석목은 발자국이 향하는 방향을 찾아서 빠르게 추적해나갔다. 앞으로 나아갈수록 흔적은 점차 분명해졌다.

잠시 후 석목은 어느 석벽 앞에 도착했다. 모든 흔적은 그 앞에서 사라져 있었다.

석벽을 관찰하던 석목이 손을 가져다대자, 손이 벽 안으로 빠져 들어갔다.

“역시나….”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팔을 거두었다.

바로 그때, 벽에서 흰 빛이 반짝이더니 커다란 구멍이 나타났다. 그곳에는 녹색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서 있었다.

남자가 웃으며 말했다.

“자네가 흑마문의 석목인가? 쥐굴에 온 것을 환영하네. 나는 묘음종의 청봉이라 하네.”

“제가 바로 석목입니다. 청 사형에게 수고를 끼쳤군요.”

석목은 품속에서 연맹의 신분영패와 옥간을 꺼내며 말했다. 그러나 청봉은 그것을 받아들지 않고 입구에서 몸을 비켜주었다.

“들어오게!”

석목은 말없이 영패와 옥간을 다시 집어넣고 발걸음을 내딛었다.

눈앞에서 뭔가 번쩍하더니 지하로 통하는 넓은 복도가 나타났다. 석목의 눈으로도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짐작할 수 없는, 그저 검고 깊게 보이는 복도였다.

청봉이 웃으며 말했다.

“이곳을 직접 찾아오다니 정말 대단하군. 금 장로님이 강력하게 추천한 인물답네.”

“금 장로님의 추천이라니요?”

석목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발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석목의 표정을 본 청봉도 발걸음을 멈추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자네는 설마 이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인가?”

“연맹의 이동령에는 그저 이 거점을 찾아가라고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외의 다른 것은 전혀 알지 못합니다.”

청봉은 석목을 한참 의아하게 바라보다가 천천히 말했다.

“보아하니 정말 모르는 것 같군. 좋네. 내가 대강 설명해주도록 하지. 이곳은 일반적인 거점이 아닌, 부적을 제작하기 위한 거점이라네.”

“부적 제작을 위한 거점이요?”

석목이 또 다시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알다시피 전황이 갈수록 악화되어 현재 하급부적이 대량으로 필요한 상황이지. 때문에 연맹에서 걸출한 부적술사를 한 곳에 모아 부적을 제작할 수 있는 거점을 이곳에 만든 것이네. 석 사제의 부적 제작 실력이 일부 고위층에게 알려졌고, 또 흑마문의 금소채 장로의 강력 추천이 있어서 이곳으로 발령을 받게 된 것이라네.”

청봉은 길을 안내하며 설명했다. 그의 말에 석목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석목과 금소채는 입문 당시에 단 한 번 만났을 뿐이었다. 그 뒤로는 전혀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선천고수인 장로가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게 복인지 화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석목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조용히 청봉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반각 정도 걷자 복도 끝에 돌문이 나타났다. 청봉이 손바닥 크기의 백옥을 꺼내자, 그것에서 한 줄기 빛이 뻗어나가 돌문을 비추었다.

카가각!

육중한 소리와 함께 돌문이 천천히 양 옆으로 열리며 내부의 광경을 드러냈다.

백여 장은 되어 보이는 거대한 공간이 석목의 눈앞에 나타났다. 그곳에는 백 명이 넘는 수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실내에는 불 위에 놓인 단로(丹炉)가 있었고, 두세 명이 그 주위에 둘러서서 광석이나 괴수의 가죽과 뼈 등을 단로 안에 집어넣었다.

석목은 이것이 단약을 제작하기 위한 단로가 아니라 부적지를 만드는 부화로(符火炉)라는 것을 알아챘다.

부화로의 옆에 있던 사내가 화로를 기울여서 푸른색의 끈적끈적한 액체를 사각형 틀에 천천히 부었다. 액체가 굳어서 푸른색의 부적지로 변하자 옆에서 지켜보던 사람이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 공간에는 이와 같은 부화로가 사오십여 개는 있는 것 같았고, 쉴 새 없이 다양한 색의 부적지가 만들어지고 있었다.

“가지.”

석목이 안을 둘러볼 동안 잠시 기다리던 청봉이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부적지를 만들며 잡역을 하던 제자들이 청봉에게 예를 표하며, 뒤를 따르는 석목을 호기심에 찬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청봉은 그들에게 눈길을 주지 않고 공간을 가로질렀고, 기다란 복도로 향했다. 복도의 양 옆에서 용도를 알 수 없는 방들이 종종 보였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또 다른 커다란 돌문 앞에 도착했다.

“방금 지나온 곳은 부적지를 만드는 공간이라네. 그리고 이곳이 부적술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지. 석 사제는 새로 왔으니 궁금한 것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아도 되네.”

청봉이 이번에도 백옥을 꺼내들어 돌문을 열었다.

이번에는 매우 광활하고 밝은 공간이 나타났다. 천장은 반구형 모양이었으며, 몇 장 간격으로 늘어진 으리으리한 등이 모든 공간을 비추고 있었다.

안에 있는 여러 개의 커다란 돌 탁자 위에는 각종 부적지와 법붓, 법묵 등이 놓여 있었다. 탁자는 스무 개 이상 있었는데, 탁자마다 사람들이 한 명씩 앉아서 부적을 제작하고 있었다. 또는 두세 명이 모여 앉아 토론을 하기도 했다.

주위에는 여러 개의 방이 있었는데, 출구에서 가장 가까운 곳을 제외하고는 모두 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구석에는 부적 제작 임무가 적힌 거대한 옥벽이 서 있었다.

청봉과 석목이 들어가자 사람들 중 한두 명이 청봉을 향해 목례를 했을 뿐, 모두 자신의 일에 몰두했다.

그때 현무종의 남색 옷을 입은 한 소년이 청봉에게 다가와 말을 건넸다.

“청 사형, 사흘 전 방상사가 할당한 임무가 6할 이상 완료됐습니다. 다만 오늘 천음종의 동 사제가 몸 상태가 좋지 않아 부적을 만드는데 실패를 거듭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제시간에 임무를 완료하지 못할 것 같은데,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잠시 망설이던 청봉은 곧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다. 그 일은 잠시 후 내가 처리하마.”

말을 마친 청봉은 옆에 있는 석목을 웃으며 가리켰다.

“인사 나누게나. 흑마문에서 온 석목 사제라네. 우리와 함께 하게 됐으니, 분명 모두의 부담도 줄어들 것이라네.”

남색 옷을 입은 소년은 어리둥절해서 석목을 돌아보더니 곧바로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목…?”

그런데 석목 역시 그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풍리…?”

눈앞의 남색 옷을 입은 소년은 흑호회의 풍리였다. 그런데 그는 이전보다도 열 살은 어려보이는 모습이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가?”

청봉이 놀라며 묻자 풍리가 잠시 당황해하다가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석 형제와는 같은 고향 출신이며 여러 인연이 있습니다.”

“그렇구나. 우선 가서 볼일을 보거라. 나는 석 사제를 데리고 방상사를 만나러 가겠다. 앞으로 시간이 많으니 회포는 나중에 풀도록.”

청봉이 더 이상 묻지 않고 말했다. 풍리는 청봉에게 대답하고 석목을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인 뒤, 몸을 돌려 나갔다.

“따라오게나.”

청봉이 안쪽의 통로로 향하며 말했다.

“이곳에서는 부적을 만드는 임무만을 맡기 때문에 전방 거점에 소속된 제자들처럼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네. 보수 또한 두둑하지. 그러나 이곳의 임무도 마냥 편하고 자유로운 것만은 아니야. 석 사제도 이곳 사람들이 모두 바쁘게 움직이는 것을 봤겠지?

맡은 임무에 따라 시간 내에 정량을 제작해야 하기 때문이라네. 단 한번이라도 할당된 작업량을 채우지 못하면 이곳에서 머물 수 있는 권리를 상실하고, 전방의 거점으로 가서 위험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네.”

청봉의 경고에도 석목은 전혀 걱정이 되지 않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일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네. 거점 내의 부적술사 수가 많지 않기 때문에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지. 그러니 큰 과오를 저지르지 않는 한은, 한두 번 임무를 완수하지 못하는 정도는 괜찮아. 그럴 때는 우리가 일을 조금 거들어줄 것이네.”

청봉은 자신의 말이 너무 지나쳤다고 생각했는지 다시 웃으며 이야기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