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특권
잠시 후, 두 사람은 통로 끝에 위치한 어느 문 앞에 도착했다. 청봉은 문을 두드리고 허락을 구한 뒤 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곳은 접객실처럼 생긴 공간이었다. 내부에는 몇 개의 탁자와 의자만 놓여 있었으며 중심부는 높이 솟아 있었다. 위쪽에 위치한 상석에는 녹색 옷을 입은 백발노인이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노인의 옆에는 금색 옷을 입은 소녀가 나른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소녀는 청순한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몸매는 요염했다. 특히 높게 솟은 가슴의 봉우리가 눈길을 끌었다.
그녀는 바로 금소채였다.
금소채를 발견한 석목이 어이가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자신을 추천했다는 이야기는 청봉에게 들었지만, 이곳에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금소채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고, 푸른빛이 감도는 눈으로 석목을 그윽하게 바라보았다.
석목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마치 독사와 눈이 마주친 듯 온 몸의 털이 곤두서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그러나 그 감각은 착각인 양 순식간에 사라졌다. 석목이 고개를 돌려 금소채를 바라보자, 그녀는 그저 온화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녀의 두 눈에는 이상한 낌새는 조금도 없었다.
석목은 금소채를 오래 보고 있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백발의 노인에게 시선을 돌렸다가 살짝 놀랐다.
그 노인의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이전까지 만나본 어떤 선천무인보다도 거대했다. 예전에 딱 한 번 마주쳤던 흑마문의 성계술사 사사와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 노인이 바로 이곳을 지키는 성계술사인 방상사였다.
“방상사, 흑마문의 석목을 데리고 왔습니다.”
청봉이 노인을 향해 공경히 허리를 숙였다. 석목도 그를 따라 허리를 숙였다.
“예의 차릴 필요 없다. 고개를 들어라.”
백발노인의 담담한 말에 두 사람이 허리를 폈다.
노인은 석목을 자세히 들여다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옆에 있는 금소채에게 말했다.
“금 사매가 추천한 사람인가. 훌륭하구나. 법력이 매우 정순하고 심후하군. 부적을 제작하는 실력이 소문대로라면 큰 문제는 없겠어.”
그러자 금소채가 까르르 웃으며 말했다.
“방 사형, 과찬이십니다. 이전에 이 제자와 한동안 같이 지냈는데, 그때부터 뭔가 남다르다고 여겼답니다. 최근에 듣자하니 부적 제작을 배웠다고 해서 이곳에서 실력을 쌓을 수 있도록 추천한 것일 뿐이에요.”
그 말을 들은 석목과 청봉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노인은 금사채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더니 즉시 청봉에게 지시했다.
“청봉아, 석 사질에게 출입옥부(出入玉符)를 내주고 곤(坤)방을 정리해 사용할 수 있도록 해주어라.”
청봉은 의아한 표정으로 석목을 곁눈질한 후, 입꼬리를 살짝 떨며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금소채가 상냥한 얼굴로 석목에게 말했다.
“석 사질, 이곳에서 정진하여 부적 제작 실력이 더 향상된다면 추후 그대를 을급제자로 높여달라고 종문에 건의할 것이다.”
석목은 머리를 마구 굴리면서도 겉으로는 감격했다는 표정을 지으며 대답했다.
“감사합니다. 절대로 기대를 저버리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이만 나가보도록 해라.”
백발의 노인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석목과 청봉은 노인에게 예를 표한 후 돌아서 나갔다.
석목은 방에서 나가는 동안에도 등 뒤에서 느껴지는 시선에 안절부절 못했다. 그는 방에서 나온 뒤에야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석 사제, 방상사가 자네를 이토록 귀히 여길 줄 몰랐네. 독실을 내줄 줄이야.”
청봉이 부러움을 감출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독실을 쓰는 것이 그렇게나 대단한 일입니까?”
석목이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는 듯 물었다.
“당연하지. 사제도 보지 않았나. 이곳의 부적술사는 모두 오는 도중에 지나온 부적 제작실에 모여 일한다네. 그곳에서는 외부의 영향을 쉽게 받을 수밖에 없는데, 독실을 배정받는다면 그런 걱정을 덜 수 있지.
독실에는 모든 것이 완비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방상사가 몸소 설치한 귀원진법(归元法阵)이 법력의 회복을 돕고 심신을 평온하게 유지시켜주지. 이 거점의 독실은 오직 네 곳 뿐이야. 본래 방상사와 세 명의 영계 부적술사가 사용하던 방이었지만, 보름 전 천음종의 영계술사가 다른 거점으로 이동하며 한 곳이 빈 것이라네.”
청봉이 설명했다.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기쁜 표정은 아니었다. 그러자 청봉이 충고했다.
“석 사제, 이곳에 오자마자 독실을 받게 됐으니 다른 사람들이 불만을 가질지도 모르네. 조심하도록 하게나.”
“설명 감사드립니다.”
석목이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청봉은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웃으며 앞장서 석목을 안내했다.
* * *
같은 시간, 접객실.
“금 사매, 사매의 요구대로 조치했으니 약속한 물건을 잊지 말게.”
방상사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자리에서 일어난 금소채가 웃으며 말했다.
“약속은 꼭 지키니 염려 놓으세요.”
“도대체 석목이라는 저 아이의 무엇이 특별해서 사매가 평소답지 않게 직접 나서는 것이지?”
백발의 노인은 이번에는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그러자 금소채는 두 눈을 반짝이며 입가에 미소를 짓고 반문했다.
“정말 알고 싶어요?”
“그건… 됐네. 사매의 사적인 일과 기괴한 취미까지 알고 싶지는 않네. 다만 내 경고하는데, 가아를 이용할 생각일랑 말게나.”
금소채의 요망한 웃음을 본 노인이 흰 눈썹을 살짝 떨며 화제를 돌렸다.
“하하. 예전에는 그저 한 가지 물어볼 게 있어서 찾아갔던 것뿐이에요. 만나지도 못한 걸요. 뭘 걱정하시는 거예요?”
금소채가 화사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 아이는 5급 목속성 원소 친화력을 지니고 있어. 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한 천재지. 만약 그녀를 건드린다면, 내가 사매의 사부를 대신하여 훈계하게 될 것이야.”
백발의 노인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러나 금소채는 그의 말을 전혀 안중에도 두지 않는 듯 가볍게 웃어보였다.
바로 그때, 접객실 밖에서 갑자기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려왔다.
방상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문을 열고 나갔다.
금소채는 무슨 일인지 이미 예상한다는 듯 입꼬리를 올리며 그의 뒤를 따랐다.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온 곳은 부적 제작실이었다. 방상사와 금소채가 가보니 그곳에서는 스무 명 남짓한 부적술사가 둘러서서 무언가 쑥덕이고 있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방상사와 금소채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입을 다물며 급히 길을 텄다. 그러나 자색 옷을 입은 한 대머리 남자는 이들이 다가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고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새로 온 자가 갑자기 독실을 쓴다는 건 듣도 보도 못한 일이야! 무슨 근거가 있는지 몰라도 나 구 씨는 납득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도 수긍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맞은편에 서 있는 석목은 매우 평온한 모습이었다. 분개한 대머리 남자가 침까지 튀겨가며 소리를 질렀지만,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큰 소리로 떠들던 자색 옷차림의 대머리 남자는 주위에서 사람들의 맞장구가 나오지 않자 그제야 주위를 둘러보고, 방상사와 금소채를 발견하고 놀랐다.
“무슨 일이냐? 의미 없는 말다툼이나 하고 있다니. 임무는 모두 끝낸 것이냐?”
방상사가 위엄이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상사, 이게 어찌 된 일인가 하면….”
청봉이 당황한 얼굴로 다가와 방상사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청봉의 말에 따르면, 이제 막 거점에 온 석목이 독실을 배정받은 것에 부적술사들이 불만을 표하며 소동이 일어난 것이었다.
사정을 들은 방상사는 고개를 돌려 금소채를 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이 일과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인 양 옆에서 미소를 지으며 서 있었다.
방상사가 낯빛을 흐리며 말했다.
“구명, 내 결정에 따를 수 없다는 것이냐?”
그러자 대머리 남자는 허리를 살짝 굽히며 대답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다만 석 사제는 이제 막 거점에 왔고, 이곳을 위해 어떤 공헌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가 이런 특별대우를 받는다면, 다들 대놓고 말하지는 않아도 받아들이지 못할 것입니다.”
구명이라는 이름의 남자는 석목보다 머리 반 개 정도 더 크고 마른 체격이었으며, 생김새는 평범했다. 그러나 말을 하면서 석목을 곁눈질하는 눈에는 거만한 빛이 서려 있었다.
구명은 황국 음부궁(阴符宫)의 제자였다.
음부궁은 7종문 중에서 무력이 강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부적과 진법으로는 가장 명성이 높았다. 제자들도 대부분 부적술에 능통했다. 이 거점의 부적술사 중 3할 이상이 음부궁의 제자였다.
방상사가 주위를 둘러보자 모두 고개를 숙였다. 확실히 다들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석목이 이곳에 오자마자 독실을 차지하면서 모두의 공분을 산 게 분명해 보였다. 방상사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때 구명이 방상사에게 말했다.
“방상사께 건의를 드릴 것이 있는데, 말을 꺼내도 될지 모르겠습니다.”
“말하라.”
방상사가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현재 연맹의 임무는 날이 갈수록 늘고 있으니, 독실을 놀리는 것도 부적절하다고 생각됩니다. 우리 중에서 부적 제작 능력이 가장 뛰어난 사람이 거주하는 것이 어떨지요? 만약 석 사제가 그만큼 부적 제작 솜씨가 뛰어나다면 저희 역시 더 이상 문제 삼지 않을 것입니다.”
구명의 대담한 말에 방상사가 난처한 듯 이마를 찌푸렸다.
방상사로서는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공정함을 잃게 되고, 결과적으로 부적술사들의 마음이 돌아설 우려가 있었다.
방상사는 고개를 돌려 금소채에게 다시 묻는 듯한 눈빛을 던졌다. 그러나 금소채는 여전히 딴청을 피우며 미소를 짓고 있을 뿐이었다.
‘이런 여우같은 계집.’
방상사는 속으로 욕을 하며 구명에게 말했다.
“거점의 사람들 중 네가 부적 제작 실력이 가장 뛰어나지 않느냐? 그러니 너와 석목이 겨루어 승자가 독실을 사용하면 될 것이다.”
방상사의 말을 들은 구명은 크게 기뻐하며 감사했다. 그는 도발적인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거만하게 말했다.
“석 사제, 한번 실력을 겨루어보세.”
석목은 개의치 않고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좋습니다. 사형께서 그토록 저와의 대결을 고집하시니 따르도록 하겠습니다.”
“한 시진 동안 더 많은 경신부를 제작한 쪽이 승리하는 것으로 하지. 어떤가?”
구명의 말에 주위 사람들이 떠들썩해지더니 모두 석목의 입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렸다.
구명이 풍행술사라는 것은 이곳 사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경신부는 그가 가장 자신 있어 하는 부적이었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던 풍리가 석목을 향해 살짝 고개를 저었다. 구명의 말에 응하면 안 된다는 뜻인 것 같았다.
그러나 석목은 풍리를 보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렇게 하죠.”
석목의 대답을 들은 주위 사람들은 고소하다는 듯 수군거렸고, 구명은 벌써 승리를 장담하는 듯 크게 기뻐했다.
모여 있던 사람들은 두 사람의 대결을 위해 탁자를 정리했다. 이어 부적지와 법묵, 법붓, 풍속성 영석, 모래시계 등이 탁자에 올라왔다.
석목과 구명은 각자의 탁자 앞에 앉아 신호를 기다렸다.
“시작!”
방상사의 호령이 떨어지자 구명의 얼굴에서 거만한 표정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는 깊게 심호흡을 하고 마음을 가라앉힌 뒤 한 손으로 영석을 쥐었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 법붓에 먹을 묻힌 후 부적지에 천천히 가져다 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