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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7화 (77/916)

77화. 회포를 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생한 파란 부문 하나가 완성됐다.

그러나 다른 한 쪽에 앉은 석목은 대결이 시작됐는데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는 가만히 앉아 두 눈을 감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주위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이 작은 소리로 쑥덕였다.

경신부는 풍속성 하급 부적 중에서 가장 고차원의 부적으로, 그만큼 복잡하고 그리기 쉽지 않은 술법진이라는 건 이곳의 모든 부적술사가 알고 있었다. 그러니 한가롭게 호흡이나 가다듬고 있는 석목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 당연했다.

그 사이에 구명은 벌써 열 개의 부문을 끝내고 열한 개째 부문을 그리고 있었다.

석목은 일각은 족히 지나고 나서야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은 마치 잔잔하고 깊은 못 같았다. 석목은 느리지만 자연스러운 손놀림으로 부적지를 펴고 법붓에 법묵을 묻혔다.

석목이 두 눈을 가늘게 뜨자 동공이 조금 수축했지만, 눈이 금색으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는 한 손에 영석을 쥐고 붓 끝에 온 정신을 집중해 부문을 그리기 시작했다.

복잡하고 그리기 어려운 술법진이었지만, 붓을 놀리는 석목의 움직임은 놀랍도록 빠르고 정확했다. 붓끝으로부터 복잡한 부문이 연달아 나타났다. 신중하면서도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그의 움직임은 숫제 아름다워 보일 정도였다.

부적지에 그려진 부문은 영롱하게 반짝였으며 법력의 흔들림이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본 주위 사람들의 표정이 점점 변하더니 작은 소리로 수군거렸다. 그리고 석목을 경시하던 눈빛을 분분히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목은 손목을 돌리며 마지막 한 획을 그었다.

부적이 살짝 빛나더니 천천히 가라앉았다. 부적지에 그려진 부문에서는 은은한 푸른빛이 맴돌았다.

경신부를 그리는데 일각도 채 걸리지 않은 것을 본 방상사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첫 번째 부적을 막 끝내고 두 번째 부적을 그리고 있던 구명은 석목이 첫 번째 부적을 이미 완성한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구경하던 주위 사람들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나 석목은 주위의 반응을 전혀 의식하지 못한 듯 표정에 조금의 변화도 없었다. 그는 완성한 경신부를 한 놓에 두고 두 번째 부적을 그리기 시작했다.

또다시 심오하고 복잡하기 그지없는 부문이 하나씩 부적지에 나타났다. 게다가 두 번째 경신부를 그리는데 걸린 시간은 처음보다도 짧았다. 사람들은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닫고 조용해졌다.

석목은 무표정한 얼굴로 마치 정교한 기계처럼 부적을 한 장 한 장 가볍게 그려냈다.

그런데 석목의 평온한 얼굴을 본 금소채의 표정이 수차례 변하더니, 눈빛이 점점 날카로워졌다.

그녀는 갑자기 몸을 돌려 출구를 향해 걸어갔다. 사람들은 구경에 정신이 팔려 그녀가 자리를 떠난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방상사가 돌아봤지만 금소채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있었다.

방상사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다시 경이로운 눈빛으로 석목을 보았다.

방상사도 이 정도의 부적술사를 만난 것은 무척 오랜만이었다. 설령 영계 부적술사라 해도 석목 정도의 경지에 오른 이는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또 하나의 부적을 완성시킨 석목이 손에 쥔 법붓을 내려놓았다. 탁자 위에 놓인 경신부는 풍속성 영력이 가득한 듯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모래시계의 시간은 반각도 채 남지 않았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괴물을 보듯이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어 구명도 법붓을 내려놓았다. 그의 앞에는 세 장의 경신부가 놓여 있었다.

구명은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보통 때는 세 장을 만들면 한 장은 실패했는데 오늘은 전부 성공했다. 평소보다도 실력을 더 잘 발휘한 것이다.

사실 술사학도급 부적술사 사이에서는 한 시진 내에 한 장의 부적을 그리는 것조차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만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든 구명은 곧 황당하다는 표정이 되었다. 거의 모든 사람이 석목의 탁자를 둘러싸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옆에 남아 있는 몇몇 사람은 아주 난처한 표정이었다.

“시간이 다 됐다.”

방상사의 목소리가 들리자 석목의 탁자에 몰려 있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흩어졌다.

구명은 그제야 석목의 탁자 위에 푸른빛으로 반짝이는 부적 다섯 장이 놓여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몸을 떨었다.

“승자는 석목이다. 대결 전의 약속에 따라 앞으로 남는 독실은 석목이 사용할 것이다. 더 이상의 반대는 용납하지 않는다.”

석목의 승리를 선언한 방상사는 석목을 향해 칭찬하듯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그리고 청봉에게 몇 마디 지시를 하고 자리를 떴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람들은 석목에게 축하를 건네고, 각자의 일을 하기 위해 흩어졌다. 시합을 구경하느라 너무 많은 시간을 소비한 것이다.

흉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던 구명도 소매를 매섭게 펄럭이더니 자신의 탁자로 돌아갔다.

대결이 끝나자 풍리가 석목에게 다가와 웃으며 말했다.

“축하하네. 석 사제의 솜씨가 이렇게 뛰어난 줄 몰랐네. 앞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시게.”

“과찬입니다. 서로 가르침을 청하도록 하지요.”

석목이 겸손하게 말하자 풍리도 인사를 하고 떠났다.

“석 사제, 따라오게나. 독실에 대해서 해줄 말이 있네.”

사람들이 모두 떠나자 청봉이 석목을 한 방으로 안내했다.

석목이 뒤를 따라 가보니 돌문 중앙에 푸른색으로 ‘곤’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는 방이 나왔다.

약 십 장 넓이의 방 안에는 돌침대 등 생활을 위한 가구 외에 부적제작을 위한 각종 물건이 완비되어 있었다.

사방의 벽에는 청봉이 이야기한 귀원진법으로 보이는 부문이 새겨져 있었다.

청봉은 품속에서 흰 옥패를 꺼내 석목에게 건네며 말했다.

“신분의 증표이니 잘 챙겨두게나. 귀원진법을 발동시킬 때도 사용한다네.”

고개를 끄덕이며 그것을 받아든 석목이 법력을 주입하자, 옥패에서 흰 빛이 뿜어 나와 사방으로 뿌려졌다.

그러자 벽에 새겨진 부문이 살짝 빛나더니 방안에 청량한 기류가 생겨났다. 마치 어디선가 시원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바람이 몸에 닿는 순간, 석목은 정신이 맑아지며 법력과 체력이 평소보다 3할 가까이 빠르게 회복되는 것을 느꼈다.

석목은 이곳의 환경에 크게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먼 길 오느라 힘들었을 텐데 시합까지 했으니, 오늘 하루는 푹 쉬도록 하게나. 내일 임무를 할당받게 될 것이네.”

설명을 마친 청봉이 인사를 하고 떠났다.

청봉이 나가자 석목은 방 안을 구석구석 훑어본 뒤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마침 시간이 생겼으니 거점 곳곳을 구경할 계획이었다.

* * *

깊은 밤, 곤방에서 가부좌를 튼 채 체내의 천상진기를 운기하던 석목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이날 거점의 곳곳을 전부 돌아보며 이곳이 돌아가는 상황을 거의 대부분 이해했다.

쥐굴 거점은 동서남북 네 방향에 모두 출입구가 있었으며, 이름에 걸맞게 그 모양이 쥐가 파놓은 땅굴과 상당히 흡사했다.

부적술사들은 연맹의 부적 제작 임무만 끝마치면 자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남는 시간에 수련을 하거나, 부적 제작실의 옥벽에서 추가로 임무를 받아 공로점수를 벌 수 있었다. 또는 거점에서 멀지않은 곳에 위치한 남성(岚城)의 대형 거점에서 잡동사니를 구매하거나, 공로점수를 써서 수련자원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이런 환경은 석목의 마음에 꼭 들었다.

석목은 반야천상공을 수련하면서 5단계에 오르기 직전에 벽에 부딪힌 상태였다. 그래서 마침 수련에만 전념할 수 있는 시간과 장소가 필요하던 참이었다.

‘단지….’

석목은 금소채를 생각하며 얼굴을 찌푸렸다. 자신을 향하던 그녀의 시선을 떠올리자 다시금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그녀가 이 거점에 배치된 장로가 아닌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그나마 석목을 안심시켰다.

석목은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선천고수의 관심을 받게 되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가 없었다.

석목이 한참 생각에 빠져 있는데,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이 몸을 일으켜 문을 열자 풍리가 서 있었다.

“풍 형이었군요. 들어오십시오.”

석목은 미소를 지으며 풍리를 안으로 들였다.

“내가 찾아와서 귀찮게 하는 건 아니겠지?”

“그럴 리가요. 마침 이곳에 대해서 풍 형에게 물어볼 것이 많았던 참입니다.”

두 사람은 탁자에 마주앉았다.

풍리가 풍성에서 있었던 일을 회상하며 말했다.

“무관의 학생이었던 우리가 이곳에서 다시 만나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구나. 당시 석 사제가 금 씨 가문의 금전을 살해하고 오 씨 가문에 큰 실수를 저질러서, 두 가문에서 현상금을 내걸었을 뿐만 아니라 후천무인까지 파견해 쫓았다고 들었는데…. 무사히 몸을 피해서 흑마문에 들어갔을 줄은 몰랐네.”

“기회와 인연이 들어맞은 덕분이죠.”

석목도 당시의 일을 회상하며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어느 수려한 외모의 여인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따지고 보면 그가 흑마문에 들어올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종수 덕분이었다.

가아의 말에 따르면, 엽홍약을 따라 묘음종에 들어간 종수는 특수한 혈맥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아주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었다. 종문 밖으로 일절 나가지 않고 있어서 이번 야만족과의 전투에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석목은 종수의 대한 생각을 떨쳐내며, 풍리와 서로 종문에 들어가게 된 경위에 대해 대강 이야기했다.

석목이 풍성을 떠난 지 일 년 뒤, 흑호회는 어느 방파의 공격을 받아 대부분의 인원이 죽었고, 풍리를 포함해 몇 명만이 겨우 목숨을 건졌다.

운 좋게 탈출한 풍리는 이후 어느 산적단에 들어갔으며,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아 소두목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상단을 약탈하다가 현무종의 신물(信物)을 얻게 되었고, 얼떨결에 현무종에 가입했다고 했다.

석목은 현무종에 가입하게 된 과정에 대해 뭔가 얼버무리는 듯한 풍리의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굳이 꼬치꼬치 캐묻지는 않았다.

이어 풍리가 웃으며 말했다.

“몇 년 사이 참 많이도 변했구나. 처음 만났을 때는 미처 알아보지 못할 뻔했지.”

“풍 형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로환동이라니…. 이토록 현묘한 심법을 가지고 있는 현무문은 7대 종문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군요.”

“하하, 욱일결(旭日诀)이라는 심법 덕분이네. 젊음을 유지할 수 있다는 걸 제외하고는 큰 효과는 없지.”

풍리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혹시 진이모와 제 여동생이 어떻게 지내는지 알고 있습니까? 제가 큰 사고를 치는 바람에 그녀들까지 말려든 건 아닐지 걱정됩니다.”

당시 진이모는 석목에게 잘 대해준 사람이었고, 여동생 석옥환은 그의 유일한 혈육이었다.

풍리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때 석 사제가 금전을 죽인 일은 확실히 엄청나게 큰 사건이었지. 그래도 진이모는 크게 연루되지는 않았어. 가문 내에서 외출을 금지당하는 처분에 그쳤지. 그리고 석 사제의 여동생 석옥환은 개원무관에 들어간 후 어떻게 됐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네.”

풍리의 말에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두 사람은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누었고, 곧 풍리는 곤방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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