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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79화 (79/916)

79화. 탈태결

“너같이 어린 아이가 마음에 둔 상대가 있을 줄은 몰랐구나. 그게 누구지?”

석목의 말을 들은 금소채가 두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건….”

석목이 잠시 머뭇거리자 금소채의 표정이 굳었다.

“이렇게 우물쭈물하는 걸 보니, 설마 나를 속인 것이냐?”

그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자, 놀란 석목은 온 몸의 털이 곤두섰다.

“아닙니다.”

“그렇다면 말해보도록 해라. 만약 사실이라면 더 이상 너를 난처하게 하지 않겠다.”

금소채가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어느새 그녀는 석목에게서 한 걸음 물러나 있어서, 석목은 간신히 한숨을 돌릴 수 있었다.

석목은 더 이상 숨기지 않겠다는 듯 결연한 눈빛으로 말했다.

“천음종의 천음차녀입니다.”

그러자 금소채는 바보 같은 표정이 되어 석목을 바라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겠지? 천음종의 천음차녀라면 수백 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다. 약관의 나이에 이미 선천의 경지에 올랐으며, 천음종 지계 대장로 공손우의 유일한 직계제자 아니냐?”

“천음차녀는 저와 이미 약조를 했습니다. 만약 제가 서른 살 이전에 선천무인이 된다면 그녀와 만롱산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석목은 금소채의 말에도 전혀 흔들림 없이 대답했다.

“깔깔깔.”

석목의 말에 금소채는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것처럼 허리를 숙이고 웃었다. 그리고 웃음이 그친 뒤에도 한동안 몸을 일으키지 않았다.

한참 후 금소채는 석목을 다시 보지도 않고 몸을 돌려 그 자리를 떠났다.

석목은 방금 겪은 모든 일이 마치 꿈 같이 느껴졌다.

그는 빠르게 멀어지는 금소채의 뒷모습을 보며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선천무인 금소채를 마주하며 느낀 무력감, 자신을 경멸하는 듯한 그녀의 웃음소리가 뼈에 사무쳐 잊히지 않았다.

금소채가 자신에게 계속 접근하는 목적은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녀가 좋은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틀림없는 것은 어머니와의 맹세를 위해, 그리고 천음차녀와의 격차를 좁히기 위해, 자신은 반드시 빠르게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석목은 금소채가 사라진 방향을 다시 한 번 바라보고, 몸을 돌려 거점으로 향했다.

거점의 방으로 돌아온 석목은 침대 위에 조용히 앉았다. 그리고 평소보다 몇 배나 더 시간을 들여서 겨우 마음을 안정시켰다.

석목은 두 눈을 감고 대력마원탈태결의 심법을 세세히 떠올려보았다.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한 그는 1단계에 적혀 있는 대로 심법을 운기하기 시작했다.

심법을 운기할수록 석목은 자연의 기를 자세히 느낄 수 있었다. 천상공과는 달리 이 자연의 기는 경맥으로 들어가지 않고, 물에 떨어진 눈처럼 천천히 전신의 피부로 스며들었다.

그렇게 피부로 스며든 기는 탈태결의 영향을 받아 아주 작은 결정으로 변해 체내에 축적됐다. 그런 식으로 반 시진 사이에 수백 개가 넘는 결정이 쌓였다.

석목은 속으로 기뻐했다. 확실히 심법서에 적혀 있는 대로 탈태결은 수련 방법이 매우 간단했으며, 수련의 속도 또한 굉장히 빨랐다.

세 시진 후 석목은 몸을 살짝 떨며 눈을 떴다. 그는 기지개를 한 번 켜고 나서 다시 눈을 감았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의 몸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은 분명히 느껴졌다. 석목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석후폐맥을 가진 석목은 경맥의 흐름이 매우 느렸다. 그래서 백석 같은 사람과 비교하면 후천심법을 수련하는 속도가 훨씬 더뎠다.

그러나 탈태결은 보조심법이기 때문인지 육신을 수련할 뿐, 경맥과 진기와는 무관했기 때문에 막힘없는 속도로 수련이 이루어졌다.

석목은 속으로 다시 쾌재를 불렀다. 대력마원탈태결은 지금까지 수련한 심법 중 석목에게 가장 적합한 것이었다.

이후 약 한 달 동안, 석목은 연맹에서 하달한 임무 수행을 제외하면 거의 방에서 나오지 않고 틀어박혀 탈태결 수련에 몰두했다.

그렇게 해서 탈태결의 1단계가 대원만의 경지에 올라 첫 번째 벌모세수의 기회가 도래했다.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석목은 앞에 놓인 두 종류의 병을 진지한 표정으로 관찰했다. 한쪽은 금빛의 윤기가 흐르는 손바닥 크기의 푸른색 병 한 개, 나머지 한 쪽은 흰색 병 세 개였다.

잠시 후 석목은 푸른 병을 들어 뚜껑을 살짝 열고 흔들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검은색 안개가 피어올랐다.

공기에 퍼진 검은 안개는 마치 불편한 환경에 온 것 마냥 불안하게 흔들리더니, 곧 바닥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음의 기운을 지닌 마살지기는 자연의 기와는 서로 배척하며, 일반적으로 지하의 깊은 곳에 몸을 숨긴다.

석목은 이번에는 흰 병 한 개를 들었다. 일반 원숭이의 정혈이 들어 있는 병에서는 피비린내가 흘러나왔다.

석목은 신속하게 병의 뚜껑을 열고 안에 든 원숭이의 정혈을 푸른 병에 전부 쏟아 부었다.

그러자 원숭이의 정혈은 불에 기름을 부은 것처럼 순식간에 화염으로 변하더니, 연기가 더 세차게 뿜어져 나왔다. 마치 검은 구렁이가 피의 화염을 한 입에 삼키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넘실거리던 화염은 검은 구렁이의 뱃속에서 소화되듯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작아졌다. 피의 화염이 전부 사라지자 검은 연기는 전과 달리 어렴풋이 붉은 빛을 띠고 있었다.

석목은 나머지 두 개의 병에 있는 정혈도 푸른 병에 부었다. 그러자 검은 안개에 섞인 붉은 핏빛도 점점 선명해졌다.

석목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푸른 병의 뚜껑을 닫고, 손이 닿는 곳에 내려놓았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석목은 가부좌를 틀고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으며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석목이 탈태결 1단계를 천천히 운기하자,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결정이 체내에 무수히 나타났다. 그러나 자연의 기는 무언가에 막힌 듯 더 이상 몸속으로 흡수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석목은 푸른 병의 뚜껑을 열어 안에 든 것을 주저 없이 자신의 몸에 들이 부었다.

푸른 병에서 나온 붉은 빛을 띤 검은 안개는 무언가를 감지한 듯, 이번에는 지하로 사라지지 않고 석목의 몸을 덮었다.

석목의 안색이 순식간에 창백해지더니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러나왔다.

마살지기가 몸에 닿는 순간 전신이 무수한 바늘에 찔리는 것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마치 전신의 피부를 한 점씩 베어내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이를 악문 석목의 심장은 북을 치는 것처럼 뛰었고, 몸은 점점 떨려왔다.

석목의 몸에 침투한 마살지기는 탈태결을 통해 생겨난 눈에 보이지 않는 결정들을 산산이 조각냈다. 조각난 결정들은 기이한 에너지로 변해 마살지기에 엉겨 붙었다.

결정이 조각나면서 석목의 몸 안팎에서는 엄청난 고통이 엄습했다. 정신까지 찢어지는 것 같은 고통이었다.

얼굴이 일그러진 석목의 목과 이마에 굵은 핏대가 솟아올랐다. 온 몸의 근육은 제어가 되지 않아 제멋대로 경련하고 있었다.

‘차라리 죽는 것이 낫겠다.’

이것이 석목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유일한 생각이었다.

마살지기는 신체의 모든 구멍을 들락날락거리며 오장육부와 뼛속까지 빠르게 침투했다.

점점 고통이 심해지자 석목은 뼛속까지 사무치는 고통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 실감했다.

결정이 조각나며 변화한 기이한 에너지는 마살지기를 따라 석목의 체내 곳곳에 깊게 침투해 흡수되면서 그의 체질을 천천히 바꿔놓았다.

탈태결은 마살지기의 힘을 빌려 육신을 단련하고 벌모세수를 진행하는 심법이었다.

일반적으로 마살지기가 육신을 단련하는 동안, 체내의 진기는 경맥을 순환하며 마살지기의 침입에 맞서 경맥을 필사적으로 보호한다.

그러나 석목이 구입한 마살지기는 일반적이지 않은, 극히 정순한 음의 성질을 지닌 것이었고, 그 때문에 탈태결의 도움으로 천천히 진기와 융화되었다.

* * *

한 시진 후, 석목의 신체를 감싸고 있던 검붉은 안개가 허공으로 흩어졌다. 마살지기가 힘을 다한 것이었다.

심법을 멈추자 석목의 전신이 축 늘어지더니, 마치 죽은 물고기처럼 무너지듯 그 자리에 엎어졌다.

그의 두 눈은 풀려 있었고 입술은 창백했으며, 전신은 땀뿐만 아니라 혼탁하고 끈적끈적한 액체에 흠뻑 젖어 있었다.

이로써 그는 탈태결의 첫 번째 벌모세수를 성공적으로 마친 것이다.

족히 반 시진을 쉬고 겨우 체력을 회복한 석목은 준비해둔 물로 몸을 씻었다.

그는 정신을 집중하며 손과 발을 움직여보고, 확실히 몸이 강해진 것을 체감하며 기뻐했다. 속도와 힘이 증가했을 뿐만 아니라 피부가 소가죽처럼 질기고 단단해져 있었다.

그때 배에서 한기를 느낀 석목은 마살지기를 흡수할 때를 떠올리고 잠시 망설였다.

잠시 후, 체내의 천상진기를 운기해본 석목은 매우 흥분했다. 한기는 그의 의지에 따라 단전 속의 천상진기와 빠르게 융합되었다.

석목이 오른손을 뻗어 권풍을 일으키자 한기가 함께 뿜어져 나왔다. 마치 손으로 차가운 바람을 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비록 아직은 미약한 한기였지만, 탈태결을 5단계까지 수련한다면 한기의 위력만으로 적을 상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앞서 겪은 탈태결의 고통스러운 벌모세수 과정을 다시 머릿속에 떠올리자, 석목의 마음속에서 공포가 밀려왔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는 다시 강인한 표정이 떠올랐다.

* * *

두 달 뒤, 석목은 탈태결의 두 번째 벌모세수를 실시했다.

아무리 마음의 준비를 했다고는 하지만, 내장이 찢기는 듯한 통증은 그의 강인한 성격으로도 여전히 견디기 힘들었다.

다행스럽게도 5단계에 다다른 천상공이 경맥을 보호한 덕분에 가까스로 버틸 수 있었다.

석목은 탈태결이 2단계에 오른 후 신체의 강도가 또 다시 대폭 상승하자 쾌재를 불렀다. 수련하기 전에 비해 힘과 속도, 육체의 강도 모두 6할 가량 뛰어올랐다.

자신감이 크게 상승한 석목은 탈태결 수련을 계속했다. 그러나 석 달 뒤, 다시 벌모세수를 했을 때는 앞서 두 차례와 같은 행운은 없었다.

곤방의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석목의 얼굴에는 고통의 흔적이 가득했다.

전신의 땀구멍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와서 돌침대까지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마치 무수한 개미가 체내의 골수를 갉아 먹는 것처럼 따끔하고 가려웠다. 이전의 거의 곱절에 달하는 고통에 석목은 의식을 잃기 직전이었다.

결국 석목은 반각을 더 버틴 뒤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끼며 기절하고 말았다.

* * *

얼마가 지났을까. 석목은 정신이 들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몽롱한 머리를 가로저으려 했지만, 몸이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깜짝 놀란 석목은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았다. 온 몸에 하얗고 긴 털이 자라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꿈속에 들어가 흰 원숭이로 변한 것이었다.

흰 원숭이가 있는 곳은 익숙한 낭떠러지의 거대한 바위 위가 아닌, 빼곡한 숲에 둘러싸인 넓은 공터였다.

숲의 나무는 몸통은 수십 명이 둘러쌀 수 있을 정도로 굵었고, 높이는 천 장이 넘었다. 그것들은 마치 하늘을 받치는 거대한 기둥처럼 구름 속까지 뻗어 있었다.

갑자기 천지를 뒤흔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제야 석목은 흰 원숭이가 탄월식을 수련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원숭이는 머리를 제외한 전신이 흙 속에 파묻혀 있었다.

흰 원숭이를 중심으로 사방에는 별처럼 눈부신 은빛을 뿜는 부문과 무늬가 빼곡하게 새겨져 거대한 진법을 이루고 있었다. 석목은 그 진법을 자세히 살피려 했지만 부문이 몽롱하게 빛나서 선명하게 보이지 않았다.

진법의 양쪽에는 키가 십여 장에 달하는 두 거인이 서 있었다. 거인들의 머리는 털이 하나도 없이 반들반들했고, 얼굴은 악귀 같은 형상이었으며, 전신에 근육이 울퉁불퉁 솟아 있었다. 그들이 입은 황색 옷에는 은색 부문이 새겨져 있었다.

거인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진법 가장자리의 어느 부위를 10장이 넘는 거대한 은색 망치로 내려찍고 있었다.

망치가 바닥을 두드릴 때마다 대지가 굉음과 함께 흔들렸고, 망치로부터 빛이 흘러들어가서 진법의 표면이 은색으로 반짝였다.

진법의 중앙에 있는 석목은 지면이 흔들릴 때마다 기이한 에너지가 차가운 액체처럼 자신을 감싸고, 끊임없이 몸을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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