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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80화 (80/916)

80화. 풍리의 신세

거인이 망치를 휘두르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러자 석목을 누르는 힘도 점점 강해졌다. 석목은 몸이 차가워지면서 바늘처럼 얇은 무수한 힘이 모공을 뚫고 들어오는 걸 느꼈다.

“끼깅!”

흰 원숭이는 이를 악물며 애처로운 비명을 질렀다.

원숭이의 체내에 들어온 차가운 에너지가 오장육부를 찌르기 시작했다.

석목은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그저 죽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기절하기 전보다 몇 배는 강한, 정신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은빛 진법에서 수십 장 떨어진 곳에는 긴 눈썹과 백발을 휘날리는 노인이 보였다. 그는 허공에 떠 있는 청록색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는 이전에 석목의 꿈에서 흰 원숭이에게 탄월식을 전수해준 바로 그 노인이었다.

노인은 비명을 지르는 흰 원숭이를 보고 한 손으로 수인을 맺으며 낮은 목소리로 무언가 읊조렸다.

석목은 이제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점점 더해지는 강렬한 통증에 의식이 점점 혼미해지더니, 얼마 후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또 다시 기절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그의 귀에 주문을 외우는 소리가 뚜렷하게 들렸다.

흰 원숭이는 그 소리를 듣고 정신을 차렸고, 인간의 소리로 주문을 따라 외웠다.

주문에 쓰이는 언어는 낯선 것이었지만, 주문 자체는 마치 수만 번 배워온 것처럼 매우 익숙하게 들렸다.

그러자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흰 원숭이가 주문을 외우자 석목의 몸과 정신에 전해지던 고통이 갑자기 8,9할 정도 줄어든 것이다.

비록 고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견딜 수 없을 정도는 아니었다.

석목은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낀 순간, 눈앞이 다시 캄캄해지며 의식을 잃었다.

그가 정신을 차리고 눈을 뜨자, 몸을 움직이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강렬한 어지럼증이 덮쳐왔다. 팔다리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세 번째 벌모세수의 고통은 석목의 상상을 완전히 초월했다. 그는 혈경각에서 몽고가 한 말을 문득 떠올렸다. 그의 말대로 벌모세수는 과연 탈태결의 치명적인 결함인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석목은 곧 자신의 몸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육체의 힘이 이전보다 크게 늘었고, 단전의 한기도 상당히 증가해 있었다.

석목은 자신이 세 번째 벌모세수에 성공했다는 것을 깨닫고 크게 놀랐다. 그리고 머리를 빠르게 회전시켰다.

꿈속에서 긴 눈썹의 노인이 통증을 경감시켜주는 법결을 전수해준 것과 분명히 관련이 있을 것 같았다.

석목은 꿈속에서 흰 원숭이가 외운 주문을 기억해내려 애썼지만,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끝내 한 글자도 생각해내지 못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석목은 피범벅이 된 몸을 씻고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거점의 밖으로 나갔다.

시간은 깊은 밤이었고 하늘에 밝은 달이 걸려 있었다.

석목은 거점을 떠나 익숙한 길을 따라서 어느 숲에 다다랐다.

석목은 주위를 둘러본 뒤 이상한 것이 없다는 걸 확인하고, 운철흑도를 꺼내들고 공터의 바닥에 구덩이를 팠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그 구덩이로 뛰어들어 하얗게 변한 주먹을 내질렀다.

펑!

주위의 흙이 무너지며 석목의 머리 아래 전신이 흙에 파묻혔다.

그는 두 눈을 감았고 잠시 후 꿈속으로 들어갔다.

주위의 흙이 무너지며 머리 아래로 전신이 흙에 묻혔다.

예상대로 꿈속에서 흰 원숭이는 은색 진법 위에 앉아 있었다. 두 거인이 거대한 망치를 내리칠 때마다 여지없이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몰려왔다.

잠시 후, 석목은 식은땀을 흘리며 꿈속에서 깨어났다.

그리고 구덩이에 그대로 묻힌 채 흰 원숭이가 외운 주문을 기억해내려 했다. 이전보다는 기억이 뚜렷해진 것 같았지만 주문은 여전히 떠오르지 않았다.

석목은 이를 꽉 깨물고 다시 꿈속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꿈속으로 들어갔다가 깨어나기를 몇 차례 반복하며, 흰 원숭이의 주문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이는 매우 고통스러운 과정이었지만, 거듭하면 할수록 주문에 대한 기억은 점점 뚜렷해졌다.

석목은 이를 30,40번 반복한 뒤에야 흰 원숭이가 외우는 주문을 가까스로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석목이 주문을 외자 머릿속에 ‘진혼주’라는 은색 글자가 떠올랐다.

꿈에서 깨어난 석목은 다시 한 번 주문을 외워보았다. 그리고 여러 차례 되풀이해서 외운 끝에 진혼주를 완벽하게 외울 수 있었다.

그 뒤 석목은 구덩이에서 나와서 옷을 정리하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거점으로 돌아왔다.

하늘은 아직 어두웠고 달은 서쪽으로 기울어 있었다.

그때 먼 곳에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놀란 석목은 급히 나무 뒤로 몸을 숨기며 운철흑도를 손에 쥐었다.

발걸음 소리는 먼 곳을 향하는지 점점 작아졌다. 석목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몰래 따라갔다.

몇 십 장을 따라가자 발걸음 소리가 갑자기 사라졌다. 걸음을 멈춘 석목은 은은한 피비린내를 맡고 코를 찡그렸다.

냄새가 나는 방향으로 가보니 덩치가 1장 가까이 되는 표범이 쓰러져 있었다. 죽은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았다.

석목은 표범의 몸이 정수를 전부 흡수당한 듯 바짝 쭈그러들어 있는 것을 보고 놀랐다.

석목이 표범을 자세히 들여다보려 다가간 순간, 갑자기 뒤에서 털이 덥수룩한 손이 그의 뒤통수를 노리고 날아왔다.

석목은 빠르게 몸을 돌려서 눈처럼 하얀 주먹을 내지르며 반격했다. 두 주먹이 매섭게 충돌했다.

쾅!

석목이 뒤로 한 보 후퇴해서 보니, 그를 습격한 것은 회색 원숭이 괴물이었다. 입가의 털이 피에 젖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표범을 죽인 것이 이 괴물인 모양이었다.

원숭이 괴물은 주먹이 부딪히는 충격으로 뒤로 멀리 날아갔지만, 상처를 입지는 않은 것 같았다. 원숭이는 바닥에서 한 바퀴 구른 뒤 곧바로 벌떡 일어나서 피에 굶주린 듯한 새빨간 눈으로 석목을 보았다.

놀란 석목은 운철흑도를 뽑아들었다.

이때 회색 원숭이가 낮게 포효하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그 속도가 매우 빨라서 원숭이는 눈 깜짝할 사이에 석목의 앞까지 도달했다.

원숭이는 두 팔을 위아래로 뻗어 석목의 목과 아랫배를 노렸다. 석목은 원숭이가 상당히 정교한 무예를 구사하는 것에 놀랐다.

순간 석목의 눈에 금색 빛이 스쳤다. 그가 손을 흔들자 검은색의 검영 두 개가 나타나 원숭이의 양손을 번개처럼 베었다.

깡! 깡!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연달아 울리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마치 쇠기둥을 친 것 같은 느낌이었다. 회색 원숭이는 그 충격으로 다시 한 번 뒤로 날아갔다.

석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원숭이의 손톱은 운철흑도를 막아낼 수 있을 정도로 단단했다.

석목은 바닥을 박차고 회색 원숭이에게 뛰어들었다.

순간 운철흑도가 열세 개의 검광을 흩뿌리며 원숭이를 뒤덮었다.

그러나 그때, 석목은 갑자기 놀란 표정을 지으며 운철흑도를 급하게 꺾었고, 칼등으로 원숭이를 후려쳤다.

거대한 소리가 울리며 회색 원숭이는 마치 낙엽처럼 날아갔다. 원숭이는 몇 개의 나무와 부딪쳐 쓰러뜨린 후에야 땅에 떨어졌다.

원숭이는 이를 악물고 일어나려 발버둥을 쳤지만, 어느새 다가온 석목이 발로 원숭이의 등을 강하게 밟아 눌렀다.

석목은 차가운 표정으로 몸부림치는 회색 원숭이를 바라보다가 운철흑도를 향해 시선을 던졌다.

2년 사이에 더욱 무거워진 운철흑도는 이제 칠백 근에 달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렇게 단숨에 회색 원숭이를 쓰러뜨릴 수 없었을 것이다.

석목이 운철흑도로 원숭이의 어깨를 헤집었다.

긴 털이 깎여나가면서 그 안에서 파란색 옷가지가 드러났다.

“역시….”

석목이 다른 발로 원숭이의 손에 자란 털을 헤집었다. 검은색 강철 장갑을 낀 손가락이 털 사이로 어렴풋이 보였다.

그때 회색 원숭이가 갑자기 몸부림을 멈추더니, 비명을 지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석목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

회색 원숭이는 점점 강하게 몸을 떨더니, 몸을 뒤덮은 긴 털이 몸속으로 흡수되며 그 아래 사람의 피부와 옷이 드러났다. 날카로운 손톱 역시 빠르게 줄어들어 인간의 손으로 변했다.

잠시 후 완전히 사람으로 변한 원숭이는 엎드린 채 크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의 등에는 암홍색의 토템 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원숭의 모양의 문신은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야만족?”

미간을 찌푸리며 그 남자의 몸을 뒤집은 석목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풍리!”

원숭이에서 사람으로 변한 자는 놀랍게도 풍리였다.

풍리의 눈에서 붉은빛이 점차 사라지며 청명함이 돌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동공이 흔들리더니 곧 정신을 차렸다.

석목은 그의 목에 운철흑도를 가져다 댔다.

“움직이지 마.”

석목이 운철흑도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말했다.

풍리는 태산이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는 자신을 밟고 서 있는 이가 석목이라는 것을 알고, 얼굴이 창백해져 애원했다.

“석 형… 내 사정을 좀 봐 주게나….”

“사정을 봐 달라?”

석목은 무표정한 얼굴로 칼을 쥔 손에 다시 힘을 주었다. 풍리가 비명을 질렀다.

“악!”

“설마 풍 형이 야만족의 첩자일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이제 와서 무슨 할 말이 있습니까?”

석목은 냉랭한 말투로 내뱉었다.

그가 운철흑도를 살짝 움직이기만 하면 언제든 풍리의 목을 벨 수 있었다.

“나를… 믿어주게나. 맹세할 수 있네. 내, 내가 정말 야만족의 첩자라면 정체를 숨겼겠지. 이곳에 와서 이런 짓을 할 이유가 있겠는가…?”

풍리가 숨을 크게 헐떡거리며 말했다. 목에 차가운 칼날이 닿자 그의 온몸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풍리의 말을 들은 석목이 무언가 생각하는 표정을 지었지만, 손에 쥔 운철흑도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내 몸에는 확실히 야만족의 토템문신이 새겨져 있고 일반적인 인족과도 다른 몸을 가지고 있지만… 다 설명할 수 있다네.”

풍리는 석목의 표정이 살짝 바뀐 것을 보고 다급하게 설명했다.

“좋습니다. 기회를 한 번 주지요. 설명해보십시오.”

석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운철흑도를 조금 들어올렸다.

풍리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인족과 야만족의 혼혈이라네. 어머니는 인족이고 아버지는 야만족이지….”

석목은 풍리의 말에 놀라지 않았다. 방금 그의 몸을 살펴보며 이미 예상한 바였다.

풍리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천천히 털어놓았다.

풍리의 모친은 대제국의 사람이었다. 그녀는 야만족의 침입 당시 야만족 부락에 끌려가 부친의 노예가 되었다.

원래 야만족 부락에 끌려간 인간은 절대 살아남을 수 없었지만, 풍리의 모친은 임신을 한 덕분에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그렇게 해서 인족과 야만족의 혼혈로 태어난 풍리는 어딜 가나 배척당하는 신세였다.

두 모자는 결국 기회를 틈타 야만족 부락에서 탈출했고, 험난한 역경을 겪은 끝에 간신히 대제국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모친은 줄곧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몇 년 뒤 결국 세상을 떠났다.

이야기를 하는 동안 풍리의 표정에는 고통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특히 야만족을 언급하는 그의 눈에는 원한이 가득했다.

석목의 얼굴에서는 이제 냉혹한 표정이 많이 사라져 있었다. 풍리의 유년 시절이 자신과 많이 닮았을 뿐더러, 오히려 더 비참했기에 어느덧 측은지심이 생긴 것이었다.

석목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절반은 인족이라 할 수 있군요. 그렇다면 무슨 꿍꿍이로 현무종에 들어간 것입니까?”

“힘이 필요했어! 야만족 놈들은 어머니에게서 너무 많은 걸 빼앗아갔지. 반드시 강해져서 피의 복수를 할 거야!”

풍리가 상기된 얼굴로 포효하듯 말했다.

석목이 다시 물었다.

“그렇다면 방금 이성을 잃고 몸이 변한 것은 어째서죠?”

“내 몸의 토템문신은 내가 아주 어릴 적 어느 제사장이 새긴 것이네. 어떤 괴수의 혼이 봉인되었는지는 나도 알지 못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아무런 영향이 없었는데, 두 해쯤 전부터 갑자기 변화가 생겼지. 몇 달에 한 번씩 폭주해서 원숭이 괴물로 변해버리게 됐다네. 의식을 침식당하고 피에 미쳐버리면 신선한 피를 마시기 전까지는 원래대로 돌아올 수 없어.”

풍리는 대답을 하며 괴로운 표정으로 이를 악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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