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피습
풍리를 보며 무언가 생각하던 석목은 잠시 후 그의 몸에서 발을 떼고 운철흑도를 거두었다.
그제야 한 숨 돌린 풍리는 살짝 불안한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봤다.
석목이 담담하게 물었다.
“풍 형의 말이 거짓이 아니라는 걸 제가 어떻게 믿지요?”
그러자 풍리의 얼굴 표정이 수차례 변하더니, 무언가 결심한 듯, 목에 걸려 있던 기괴한 형상의 목걸이를 풀어 석목에게 건넸다.
“이건 어머니가 눈을 감을 때 내게 남긴 법기라네. 내 몸의 토템문신과 큰 관련이 있으니 잘 보관하라고 했지. 이 법기가 망가지면 나는 돌이키지 못할 위험에 빠진다고 말이지. 이전까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지만, 이 년 전 원숭이 괴물로 변하게 된 뒤부터는 항상 몸에 지니며 생명처럼 귀하게 여기고 있다네. 내 말을 믿을 아무 근거가 없다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다네. 그러니 이 법기를 석 형에게 맡겨 내 결백함을 증명하겠네.”
석목은 목걸이를 받아들고 자세히 관찰했다.
그것은 세월의 흔적이 꽤 많이 묻어 있는, 옥으로 만들어진 목걸이였다. 한쪽 면에는 풍리의 등에 있는 토템문신과 흡사한 그림이 새겨져 있었다.
석목은 목걸이에 의식을 집어넣으려 시도했지만, 금제에 부딪힌 듯 바로 튕겨져 나왔다. 그러나 금제와 접촉한 찰나에 석목은 그 안에 묶여 있는 살육에 대한 충동을 느꼈다. 그것은 언제든 속박을 뚫고 나가고자 벼르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풍리의 두 눈이 빨갛게 충혈되더니, 갑자기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머리를 감싸고 쓰러지는 바람에 석목은 크게 놀랐다.
풍리는 숨을 크게 헐떡이더니 곧 제정신을 찾았다. 그는 씁쓸하게 웃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이를 본 석목은 잠시 생각하다가 운철흑도를 칼집에 넣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풍 형이 이 물건을 기꺼이 나에게 맡겼으니, 한 번 믿어보도록 하지요.”
“고맙네.”
몸을 일으킨 풍리가 석목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했다.
“그러나 언제라도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가만히 둘 수 없습니다. 그 외에는 풍 형이 무슨 일을 하든, 저와는 관계가 없고 알고 싶지도 않습니다.”
말을 마친 석목은 점점 밝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평온한 표정으로 거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석목의 뒷모습이 멀어지는 것을 본 풍리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뒤 그의 뒤를 급히 따랐다.
* * *
순식간에 석 달의 시간이 지나갔다.
인족과 야만족의 전쟁은 여전히 교착상태에 빠져 있었다. 때때로 큰 전투가 벌어졌고, 결과는 서로 엇비슷했다.
후방에 위치한 쥐굴 거점은 전투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지는 않았기에, 날마다 늘어나는 부적 제작 임무를 제외하고는 평온한 나날이 이어졌다.
석목은 진혼주 덕분에 벌모세수의 고통을 크게 덜었고, 탈태결 5단계까지 수월하게 오를 수 있었다.
그의 몸은 불가사의한 경지에 올라서 탈태결 수련 전의 두 배인, 육칠천 근에 달하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강철 막대기를 손쉽게 비틀어 꽈배기로 만들고, 몇 장 크기의 바위를 일격에 산산조각 낼 수 있는 수준이었다.
뿐만 아니라 피부도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해져서, 진기를 사용하지 않은 일반적인 도검으로는 상처조차 입힐 수 없게 됐다.
또 탈태결의 단계가 오를 때마다 필요한 마살지기의 양도 점점 늘어, 체내에 축적된 한기 역시 상당한 위력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탈태결을 계속 수련하기 위해서는 원숭이 요괴의 정혈이 필요했기 때문에, 석목은 아쉽지만 수련을 잠시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석목이 강해진 것에 기뻐하고 있는 사이, 뜻밖의 사건이 조용히 다가오고 있었다.
* * *
어둠과 구름에 달이 덮인 밤.
쥐굴 거점 부근에 위치한 빼곡한 숲에 커다란 그림자들이 소리 없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거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조용히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먼 곳에서 검은 구름이 흉포한 기세로 밀려왔다. 그 구름은 때때로 호랑이나 표범 같은 맹수의 모습으로 변했다.
검은 구름이 거점 근처의 한 언덕에서 흩어지더니, 그 사이에서 검은 동물의 가죽을 걸친 키가 작은 야만족이 나타났다.
그는 양머리 모양의 기괴한 검은색 모자를 쓰고 있었는데, 얼굴은 늙어 보이지 않았지만 팔은 마치 고목의 뿌리처럼 말라 있었다. 그는 눈구멍에서 검은 화염이 반짝이는 두개골이 얹힌 흰 석장을 들고 있었다.
언덕에 서 있던 야만족 몇 명이 그에게 공경히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통령 대인을 뵙습니다!”
통령이라 불린 작은 야만족이 쉰 목소리로 물었다.
“준비는 됐는가?”
“모든 준비를 마쳤습니다. 거점의 모든 출구에 용사를 배치했으니 단 한 명의 부적술사도 빠져나갈 수 없을 겁니다.”
등에 양날 도끼를 맨 곰 같은 중년의 야만족이 한 걸음 걸어 나오며 말했다. 통령은 고개를 끄덕이며 멀리 거점을 바라봤다.
그러자 중년 야만족이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통령 대인, 정보에 따르면 이 거점은 성계술사가 지키고 있습니다. 우리 용사들이 아무리 용맹하고 날래다지만, 그 자의 상대는 되지 않을 것입니다.”
“내가 있는데 무슨 걱정이더냐. 그 술사라는 자들 때문에 내가 직접 나선 것이다.”
통령이 거만하게 대꾸하자 중년 야만족이 비위를 맞추려는 듯 황급히 말했다.
“그렇습니다. 통령 대인이 직접 나서주시니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통령이 손에 쥔 흰 석장을 휘두르자 귀를 찌르는 소리와 함께 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와 동시에 거점 근처에서 매복하고 있던 야만족들이 살기등등한 함성을 지르며 거점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 * *
한편 쥐굴 거점의 곤방에서는 석목이 침대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반야천상공을 운기하고 있었다.
체내에 진기가 돌자 희미한 검은색 기운이 리본처럼 그의 전신을 감쌌다.
석목은 탈태결을 수련하는 동안에도 반야천상공의 수련 또한 절대 게을리 하지 않았고, 곧 6단계 진입을 앞두고 있었다.
콰르릉!
그때 밖에서 갑자기 커다란 폭음이 들리며 방이 흔들렸다.
깜짝 놀란 석목은 운철흑도를 쥐고 뛰어나가려다 멈췄다. 그는 갑자기 무언가 생각이 난 듯 침대 아래에서 상자를 꺼냈다. 그 안에는 각양각색의 부적뭉치가 들어 있었다.
석목은 상자에서 부적을 꺼내 품에 넣고 방을 나섰다.
밖으로 나오니 사방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한층 더 크게 들렸다.
‘거점이 공격당한 것인가?’
석목은 주위를 훑어본 뒤 방향을 정하고 달리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위의 한 통로에서 요란스러운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강하게 쥐었다가 곧 긴장을 풀었다. 발자국 소리의 주인은 풍리를 포함한 대여섯 명의 부적술사였다. 그들도 상대가 석목이라는 것을 확인하고는 안심했다.
천음종의 옷차림을 한 부적술사가 급하게 물었다.
“석 사형,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죠?”
“저도 모르지만, 아마도 적의 기습인 것 같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통로의 앞쪽에서 고함과 함께 법력이 충돌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행은 놀라서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마주보고는 곧장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렸다.
석목이 달리면서 풍리에게 말을 걸려는 순간, 가장 앞서가던 두 부적술사가 통로가 꺾인 곳으로 부주의하게 뛰어들었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급하게 주의를 주려 했다.
“조심하….”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귀를 찌르는 파공성이 울렸고, 맞은편에서 날아온 검은 화살이 두 부적술사의 몸에 명중했다.
부적술사들은 처절한 비명을 지르며 화살 째로 통로의 벽에 박혔다. 엄지손가락 두께의 화살꼬리가 위아래로 흔들리며 부채꼴 모양의 잔영을 남겼다.
둘 중 한 부적술사는 급소를 맞고 그 자리에서 절명했고, 아직 숨이 붙어 있는 다른 부적술사는 일행에게 도움을 구하는 눈빛으로 힘없이 팔을 들어올렸다.
휙!
그때 검은색 뼈창이 날아와 그의 목을 꿰뚫었다. 창은 벽에 반 척 가량 박히며 균열을 만들었다.
석목은 신중한 표정으로 벽에 몸을 밀착시킨 뒤 품속에서 네다섯 장의 부적을 꺼내들었다. 그리고 주위의 소리에 집중했다.
다른 일행은 벽에 꽂힌 두 사람의 시체를 보고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쳤고, 풍리만 석목의 옆으로 다가왔다.
일행이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확인한 석목이 목소리를 낮춰 풍리에게 말했다.
“야만족의 침입으로 보이는데, 설마 풍 형….”
그러자 풍리는 씁쓸하게 웃으며 조용히 대꾸했다.
“석 형, 나는 야만족을 깊게 증오하는 사람이네. 인족에게 해를 끼칠만한 일은 절대 하지 않아. 내 목숨을 좌우할 수 있는 물건까지 건네주지 않았는가.”
그의 말에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고개를 돌렸다.
거점의 지금 상황을 빨리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이 통로는 외길이었다. 눈앞의 야만족들을 처리하지 않고서는 이곳을 벗어나는 게 불가능했다.
석목의 기량이 아무리 뛰어나다 한들, 상대가 몇 명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경솔하게 뛰어들 수는 없었다.
석목이 머뭇거리는 사이에 풍리가 갑자기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석 형, 내가 제대로 감지한 것이라면 앞에는 네 명이 있을 것이네.”
석목이 놀라서 물었다.
“그걸 어떻게 알죠?”
“내 몸이 토템문신으로 인해 변화가 생긴 이후, 나는 토템문신을 지닌 야만족을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네. 다만 이 능력은 50장의 거리 내에서만 유효하지. 더 멀어진다면 대략적으로밖에 감지하지 못한다네.”
석목은 풍리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진짜로 토템용사가 넷뿐이라면 숨어 있을 필요가 없겠군요.”
쾅!
그때 지하의 통로 전체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거대한 물건이 거점이 있는 산봉우리에 강하게 충돌한 것 같았다.
바닥이 흔들리자 풍리는 몸을 숙였고, 다른 일행은 균형을 잃고 쓰러질 듯 비틀거렸다.
그러나 석목은 진동이 멈추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앞으로 몸을 날리며 꺾어진 통로로 뛰어들었다. 그곳에는 정말 풍리의 말대로 네 명의 야만족이 있었다.
그중 활을 들고 있던 두 야만족은 진동 때문에 비틀거리고 있었다. 이를 본 석목은 몇 장의 부적을 꺼냈다.
곧바로 부적에서 빛이 나며 일고여덟 개의 얼음기둥이 야만족들을 향해 날아갔다. 깜짝 놀란 야만족들은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했다.
그러나 그 사이에 석목은 그들의 앞에 다가가 운철흑도를 뽑았다. 붉게 타오르는 운철흑도가 녹색 장궁을 든 야만족을 향해 내리 꽂혔다.
야만족 궁수는 포효와 함께 활로 머리 위를 막았다.
그 활은 야만족의 황무지에서만 나는 녹색 광석으로 주조한 것으로, 철보다 단단했다. 그는 이 활로 석목의 일격을 막아내기만 한다면 옆의 동료들이 곧 자신을 도울 것이라고 생각했다.
뚝!
그러나 운철흑도는 녹색 활을 두부처럼 간단히 두 동강을 냈고, 그대로 야만족의 몸까지 반으로 쪼개버렸다.
이어 석목은 흩날리는 피보라 사이에 바위처럼 서서 자신을 겨냥하는 다른 궁수를 옆으로 베었다.
번뜩이는 검광과 함께 야만족의 몸은 깔끔하게 두 동강이 났다. 다시 한 번 피보라가 휘날렸다.
그때,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나머지 두 야만족이 고함을 지르며 석목에게 덤벼들었다.
그들의 두 팔은 토템의 힘을 발동시킨 듯 부풀어 올랐고, 한 사람은 검은 검을, 다른 한 사람은 커다란 도끼를 들고 있었다.
석목은 재빨리 몸을 한 바퀴 회전시키며 운철흑도를 옆으로 휘둘렀다.
캉! 캉!
무기가 절단되는 소리와 함께 두 야만족의 목에 붉은 선이 생기는가 싶더니, 놀란 표정을 한 그들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머리를 잃은 두 시체는 힘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석목이 네 야만족을 처치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바닥의 진동은 모든 상황이 마무리된 뒤에야 멎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