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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82화 (82/916)

82화. 포위망을 뚫다

석목은 쓰러뜨린 야만족의 시체 뒤에 세 구의 부적술사 시체가 뒹굴고 있는 것을 보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중 하나는 석목이 이곳에 온 날 부적 제작 대결을 했던 천음종의 제자 구명이었다.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그는 이미 숨을 쉬고 있지 않았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풍리가 다가왔다.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야만족의 시체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예전에 원숭이 괴물로 변이한 자신을 가볍게 제압한 것도 그렇고, 석목이 약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네 명의 토템용사와 정면으로 맞붙어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인 줄은 몰랐다.

풍리는 숨을 길게 내뱉고 나서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석목은 주저 없이 대답했다.

“야만족이 이곳까지 들어온 걸 보니 이미 거점이 거의 점령당한 것 같습니다. 이곳에는 부적술사가 많지만 대부분 전력에는 보탬이 되지 않고, 단지 부적지를 제작하는 이들이라면 더더욱 그렇지요. 살고 싶다면 밖으로 뚫고 나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풍리가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거점에는 방상사가 머물고 있지 않나? 설마 성계술사인 그도 야만족의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란 말인가?”

“연맹의 구역에 이토록 깊숙이 들어와 거점을 공격한 것으로 보아,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작전이 분명합니다. 방상사가 우리를 구출하러 올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봅니다.”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풍리는 가슴이 철렁했다.

“그럴 수가….”

“오래 생각할 시간이 없어요. 시간을 지체할수록 위험합니다. 출발하죠.”

석목이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풍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쫓았다.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두 분, 잠시 기다려주십시오.”

두 사람을 불러 세운 것은 아까 물러서 있던 부적술사들이었다.

“우리도 함께 갈 수 있을까요?”

묘음종의 녹색 복장을 입은 청년이 바닥의 시체를 보고 창백한 얼굴이 되어 물었다.

다른 사람들도 비슷한 표정으로 석목을 보았다.

부적술사인 이들은 그동안 대부분 종문의 보호를 받아왔기 때문에 전투경험이 부족했다. 야만족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은 더더욱 해본 적이 없었다.

그들은 야만족이 침입한 혼란스러운 상황에서 침착성과 뛰어난 실력을 보여준 석목과 함께 하고 싶은 듯했다.

석목은 그들을 보며 잠시 망설였다.

실전경험이 거의 없는 이들이 야만족을 만났을 때 실력을 발휘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게다가 자신과 풍리보다 움직임이 느린 그들을 데리고 다니려면 번거로울 것이 자명했다.

그러나 같은 거점에서 함께 생활하던 사람들을 거절하는 것도 미안하고 마음에 걸렸다.

“석 형, 함께 하던 동료들이니 데리고 가는 것이 좋겠네. 부득이한 경우에는 저들을 화살받이로 이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풍리가 말했다. 두 번째 말은 석목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인 것이었다.

석목은 고개를 저으며 부적술사들에게 담담히 말했다.

“따라오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그렇지만 야만족을 만났을 때 각자의 목숨은 스스로 챙겨야 할 것입니다.”

석목의 말을 듣고 부적술사들은 크게 기뻐하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통로를 따라 앞으로 달려가던 일행의 앞에 얼마 지나지 않아 갈림길이 나타났다.

쥐굴 거점은 규모가 엄청나게 큰 것은 아니었지만, 지금과 같은 비상사태에 대비해 동서남북으로 뚫린 주 통로 외에도 많은 갈림길이 있었다.

“풍 형, 안내해주세요.”

풍리가 잠시 정신을 집중하더니 왼쪽의 통로를 향해 움직였다. 석목은 망설임 없이 그를 따랐다.

다른 부적술사들은 석목의 행동을 보고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말없이 쫓아갔다.

일행은 풍리의 안내에 따라 여러 갈림길을 지나 북쪽 출구로 향했다. 이동 중에는 다행히 야만족과 거의 마주치지 않았다.

* * *

이각 후, 석목은 어느 모퉁이의 벽에 몸을 밀착하고 있었다. 그 모퉁이만 돌면 바로 거점의 북쪽 출구였다.

석목은 머리를 살짝 내밀어 출구 쪽을 살폈다. 그곳에는 거대한 야만족들이 서성이며 경계를 하고 있었다.

“전부 열세 명이 있고 그중 두 명이 후천후기, 나머지는 후천중기의 무인이네.”

석목의 옆에서 풍리가 무언가를 감지하며 눈을 감은 채 말했다.

석목은 풍리가 야만족의 숫자뿐만 아니라 그들의 역량까지 감지해내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일단 후퇴하죠.”

안쪽으로 퇴각한 그들은 어느 좁은 통로에 도착했다.

석목이 손을 뻗어 벽을 두 번 두드리자 통로에 틈이 생겼다. 두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자 틈은 곧바로 사라졌다.

그곳은 원래는 잡동사니를 보관하는 작은 방이었다. 외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직까지 야만족 무리에게 발각되지 않은 것이다.

방에서 기다리던 다른 일행이 두 사람을 보고 다가왔다.

녹색 옷을 입은 청년이 불안한 표정으로 물었다.

“출구 쪽 상황은 어떤가요?”

석목이 상황을 설명해주자 모두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서로의 얼굴만 보았다.

“지금으로서는 뚫고 나가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교전을 벌이는 소리가 이미 거의 들리지 않고 있어요. 오래 머물면 더 위험해질 겁니다.”

풍리의 말에 일행이 서로를 한 번 바라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하자, 석목이 말했다.

“좋습니다. 야만족의 수가 우리보다 많으니 작전을 세워보도록 하죠.”

바로 그때, 덜컥 소리가 나며 방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야만족의 복장에 동물가죽으로 만든 가면을 쓴 야만족이었다. 그는 안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고 순간 얼이 빠졌는지 그대로 서 있었다.

순간 서늘한 검광이 반짝이며 그의 목을 향해 빠르게 찔러 들어갔다.

아무 방비도 하지 않고 있던 야만족은 근거리에서 찔러 들어오는 검을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그러나 풍리의 검이 야만족의 목을 꿰뚫기 직전, 갑자기 나타난 검은 도가 풍리의 검을 막았다.

“풍 형, 잠시 기다리세요. 이 자는 야만족의 복장을 입었을 뿐 야만족이 아닙니다.”

풍리의 검을 쳐낸 석목이 그의 팔을 잡아끌며 빠르게 말했다.

각자 부적과 무기를 꺼내 공격하려던 다른 부적술사들도 석목의 말에 동작을 멈췄다.

“접니다.”

야만족이 가면을 벗자 낯익은 얼굴이 나타났다. 청봉이었다.

“청봉 사형이었군요….”

놀란 풍리가 검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제야 안심하며 각자 손에 쥔 무기를 내려놓았다.

문을 닫은 청봉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석 사제는 관찰력이 정말 뛰어나군. 하마터면 죽음을 면치 못할 뻔했네.”

“옷은 바꿔 입었지만 신발은 그대로더군요. 게다가 진짜 야만족이었다면 틀림없이 풍 형이 미리 눈치를 챘겠죠.”

석목이 담담하게 말하자 풍리가 얼굴을 살짝 붉혔다.

그는 지나치게 긴장하고 있었던 탓에, 자신의 능력도 잊고 야만족을 보자마자 반사적으로 공격을 한 것이었다.

석목의 말에 청봉이 의아한 표정으로 풍리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석목이 마른기침을 하며 화제를 돌렸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하지요. 그런데 청 사형도 북문의 출구로 탈출하려 했나요?”

청봉이 씁쓸한 웃음과 함께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그렇다네. 그런데 보아하니 출구를 지키는 야만족 토템용사의 수가 적지 않더군. 이곳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네.”

“저희도 이곳을 벗어나려 하던 참이니 같이 행동하는 것이 어떤가요?”

석목이 물었다.

그러나 청봉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무언가 머뭇거리는 기색이었다.

석목은 청봉의 그런 반응이 의외라고 생각했지만, 이야기를 길게 끌지 않고 말했다.

“다른 계획이 있다면 괜찮습니다. 각자 행동하도록 하지요.”

사실 청봉 역시 술사학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에서는 있어도 그만이고 없어도 그만이었다.

“이해해줘서 고맙네.”

어색하게 대답한 청봉은 석목과 다른 사람들이 대책을 논의하는 것을 한쪽 에서 지켜보았다.

“다들 기억하세요. 가진 부적을 한 번에 전부 사용해서 상대의 진형을 어지럽히고 혼란을 틈타 탈출할 겁니다. 성공 여부는 각자의 운에 달려 있습니다.”

석목이 빠르게 설명했다. 지금으로서는 혼란을 만들어 정면으로 돌파하는 방법이 최선이었다.

그의 말에 일행은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부적을 꺼내 손에 쥐었다.

“출발하죠.”

석목이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청봉이 무언가 결심한 듯 갑자기 따라나서며 그를 불렀다.

“석 사제, 기다리게. 나도 함께 행동하겠네.”

석목은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어째서 갑자기 생각을 바꾸신 거죠? …아닙니다. 여유 있게 대화할 시간은 없으니 같이 행동하도록 하죠. 방금 우리의 이야기는 들으셨죠? 가지고 있는 부적 전부를 동시에 사용하면 됩니다.”

청봉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끄덕이고, 품속에서 푸른색 부적 두 장을 꺼냈다. 마치 푸른색 회오리바람처럼 뒤엉켜 있는 부문이 그려진 부적이었다.

석목은 그 부적이 무척 생소하다고 생각했지만, 한가롭게 물어보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는 앞장서서 출구 쪽으로 향했다.

“뚫어요!”

모퉁이를 돈 석목이 고함을 지르며 질풍처럼 달려 나갔다.

동시에 그가 던진 붉은 색 부적들이 삼 척 길이의 화염으로 변해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더니, 쾅 하는 굉음과 함께 야만족들에게 뜨거운 불꽃의 비를 뿜었다.

석목이 사용한 것은 하급 부적 중에서는 흔치 않은 범위 공격 부적인 화사부(火蛇符)였다.

청봉도 들고 있던 푸른색 부적을 발동시켰다. 1장 높이의 바람기둥이 두 개 나타나더니 하나로 합쳐졌다.

하나로 합쳐지며 더욱 거대해진 바람기둥은 마치 괴수의 포효 같은 소리를 내며 출구를 향해 몰아쳤다.

광풍이 스치며 벽의 단단한 돌을 부수자 전방의 통로가 더욱 넓어졌다. 그 광경을 본 사람들이 소리쳤다.

“중급부적 권풍부(卷风符)다!”

나머지 술사들도 각자 부적을 던졌다. 순식간에 화염구, 얼음기둥 등의 온갖 술법이 비처럼 쏟아졌다.

출구를 지키던 야만족들은 석목 일행을 발견하고 공격하기도 전에 술법에 휘말렸다. 위기에 처한 야만족들이 토템의 힘을 사용해 신체를 변화시켰다.

술법에 가격당한 야만족들은 바닥에 쓰러지거나 충격으로 날아갔지만, 사실 하급 술법의 공격력으로는 급소에 명중한 경우를 제외하면 그들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 없었다.

그러나 그 정도로도 충분했다. 야만족들이 광풍에 쓰러질 듯 비틀거리자 가지런하던 방어진이 한순간 흔들렸다.

석목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단숨에 몇 장의 거리를 돌진했다. 이제 거점의 출구까지는 얼마 남지 않았다.

바로 그때, 뿌연 먼지 사이에서 핏빛 창이 나타나 석목의 가슴을 향해 독사처럼 뻗어왔다. 창은 매우 빠른 속도로 석목의 바로 앞까지 순식간에 도달했다.

놀란 석목은 즉시 발을 멈추고 창의 측면을 팔꿈치로 찍었다.

쾅!

창은 마치 무거운 물건을 가격한 것처럼 튕겨나갔다.

그러자 먼지 너머에서 놀란 외침이 들려오더니, 이번에는 창이 일고여덟 개의 핏빛 잔상을 만들며 석목의 가슴과 아랫배를 향해 맹렬하게 찔러 들어왔다.

어느새 눈이 금빛으로 변한 석목은 콧방귀를 뀌며 그중 한 개의 실체를 주먹으로 가격했다.

쾅!

핏빛 잔상이 전부 흩어지며 구부러진 창의 모습이 드러났다.

석목은 상대가 회수하려는 창을 한 손으로 잡아 세차게 끌어당겼다.

그러자 자욱한 먼지 사이에서 한 야만족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비틀거리며 끌려 나왔다. 북쪽 출구를 지키던 두 후천후기 토템용사 중 하나였다.

토템용사의 체구는 들소처럼 웅장했고 두 팔에는 구불구불한 혈관이 솟아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약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석목의 힘 앞에서는 어린아이나 마찬가지였다.

사내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에 석목의 일격이 번개처럼 뻗어나갔다.

사내는 놀라서 창을 내던지고 두 팔을 교차해 주먹을 막았다. 그러나 석목의 주먹은 사내의 두 팔을 부러뜨리고 그대로 가슴을 강타했다.

쾅!

토템용사는 비명을 지르며 찢어진 마대자루마냥 날아가서 통로의 벽에 부딪혔다. 그는 파열된 내장 조각이 섞인 피를 뱉어내더니 곧 절명했다.

두 배 가까이 힘이 강해진 석목이 진기를 주입해 공격하자, 후천후기 토템용사가 단 일격에 죽은 것이다. 뒤따라오던 일행은 이 광경을 보고 환호하며 기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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