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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84화 (84/916)

84화. 만겁시혼주(万劫尸魂咒)

석목은 한참 후에야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중얼거렸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야만족이 죽기 전 한 행동과 말로 미루어, 그가 자신에게 좋은 일을 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석목은 잠시 고민했지만 지금으로서는 뭔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는 고개를 저으며 폭발에 날아간 운철흑도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이곳은 쥐굴 거점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곳은 아니었기 때문에 지금의 싸움으로 다른 야만족의 시선을 끌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런데 운철흑도를 주워 등 뒤의 칼집에 집어넣던 석목이 갑자기 얼빠진 표정을 지었다.

그가 입고 있는 흑마문의 옷은 연이은 격렬한 전투로 여기저기 찢어져 있었다. 그런데 석목이 손을 들자 찢어진 옷 사이로 붉은빛이 어렴풋이 보였던 것이다.

석목은 놀라 옷섶을 풀어헤쳤다. 그의 가슴에는 어느새 핏빛 구렁이 모양의 토템문신이 새겨져 있었다.

“이것은….”

석목은 자폭하기 전 원한에 찬 야만족의 표정을 떠올리며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가까스로 혼란스러운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는 주위를 둘러본 뒤, 누런 장궁과 부전을 집어 들고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어찌됐든 우선 이곳을 최대한 빨리 벗어나야 했다.

이 부근의 지리에 익숙한 석목은 뛰어난 시력을 이용해 야만족을 피했고, 두 시진 만에 남성의 거점에 도착했다.

그가 도착했을 때 남성의 거점은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도시 전체에 계엄령이 내려져서 연맹의 제자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아마도 쥐굴 거점에서 살아남은 부적술사 중 누군가가 이곳에 와서 상황을 알린 모양이었다.

석목은 연맹의 신분증명서를 제출하고 통행 허가를 받아서 성내로 들어갔다. 쥐굴 거점에서 도주한 부적술사들은 모두 한 건물에 모여 있었다.

스무 명 이상이었던 부적술사는 열 명도 채 남지 않았고, 생존자 대부분은 석목과 함께 북문으로 탈출한 이들이었다.

그들은 상당수가 부상을 입고 있었지만, 그래도 목숨을 건져서 다행이라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역시나 무사했군.”

석목이 건물 안으로 들어서자 풍리가 그를 발견하고 다가왔다. 석목도 그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풍리는 무언가 말하려다 갑자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석목도 그의 표정이 변한 것을 눈치 채고, 눈을 빛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 석목과 함께 탈출했던 다른 부적술사들이 다가왔다. 자신과 함께 나온 일행이 거의 대부분 살아남은 것을 본 석목은 미소를 지었다.

“다들 무사히 도주했군요, 정말 다행입니다.”

“석 사형이 없었다면 도망칠 수 없었을 거예요. 모두 석 사형 덕분입니다.”

부적술사들이 감격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런데 청봉 사형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군요.”

“청봉 사형도 이곳에 왔네. 거점의 장로에게 불려갔지.”

쥐굴 거점에서 친하게 지내던 사람 중 한 명인 청봉도 무사하다는 풍리의 말에 석목은 안심했다.

그때 흰 옷을 입은 한 노인이 여러 사람을 대동한 채 나타났다.

노인은 좌중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쥐굴 거점이 습격당했다는 소식은 이미 연맹의 고위층에 알려졌다. 야만족의 포위에서 벗어나느라 고생했을 테니 한동안 남성에서 머물며 휴식을 취하도록 하라.”

노인의 말에 석목과 다른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남성 거점에서는 쥐굴 거점에서 온 부적술사들에게 상당히 넓은 거처를 마련해주었다.

한 시진 후, 석목은 방 안에서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불안하게 방안을 서성이는 중이었다.

그는 곤경에서 무사히 빠져나왔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법기도 얻었다. 그러나 몸에 원치 않는 기괴한 문양이 생겨났다.

아직까지 이상한 징후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렸다. 석목이 방문을 열어보니 풍리가 서 있었다.

“어서 들어오십시오. 안 그래도 풍 형을 찾아가려고 했습니다.”

풍리는 방 입구에서 좌우를 살피더니 문을 굳게 닫았다. 그리고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석 형, 어째서 몸에서 야만족 토템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인가?”

석목은 한숨을 쉬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풍리에게 확인을 받으니 자신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이 나왔다.

“역시 토템이었군요….”

석목은 옷을 벗었다. 그의 가슴에 있는 거대한 구렁이 문양이 드러났다. 그것을 보자 풍리는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달아나던 중에 한 토템용사와 겨뤘는데, 그가 자폭을 한 뒤에 이게 생겨났습니다.”

석목은 푸른 야만인과 싸우던 당시의 상황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다.

풍리는 석목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생각에 빠졌다.

한참 뒤에야 풍리는 무언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풍사형의 표정을 보아하니, 무언가 알고 있나보지요?”

석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러나 풍리는 잠시 망설였다.

“나는 아주 어렸을 때 야만족 부락을 떠났네. 야만족에 대해 아는 것이 많지는 않지. 석 형의 상황에 대해서도 완전히 확신할 수는 없고, 추측한 것만을 말해줄 수밖에 없다네.”

“괜찮습니다. 편하게 말씀해주세요.”

석목의 말에 풍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야만족 부락에 오래 전부터 전해지는 저주의 비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네. 석 형이 겪은 일은 만겁시혼주라고 불리는 저주와 비슷하네.”

“만겁시혼주요?”

풍리는 잠시 망설인 후 말을 이었다.

“내가 알기로 만겁시혼주를 아는 야만족은 많지 않네. 게다가 아주 지독한 저주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니라면 어지간해서는 시전하지 않지. 이 저주를 위해서는 자신의 혼백을 토템에 봉인된 괴수의 혼에게 먹이로 주어야 한다네.

자신의 주인을 삼키고 저주를 받은 토템은 다시 적의 몸에 봉인되어 상대의 혼을 점차 침식하지. 토템은 결국 일 년 후에 폭발해서 숙주에게 절망적인 고통을 선사하네. 숙주는 전신이 피고름으로 변해 죽고, 혼백은 영원한 파멸에 이르게 된다네.”

풍리의 설명에 석목은 얼굴이 창백해지며 휘청거렸고, 탁자를 손으로 붙잡아 가까스로 넘어지지 않고 버텼다.

“너무 당황하지 말게. 이 주술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라네.”

풍리의 말에 석목이 그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그런 건 빨리 좀 얘기하시죠! 놀라서 죽을 뻔했잖습니까!”

풍리는 머쓱한 표정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런 부류의 저주를 풀기 위한 방법은 일반적으로 두 가지가 있네. 하나는 지계 혹은 그 이상의 경지에 오른 이에게 도움을 청해 저주를 봉인, 저주의 힘을 강제적으로 억누르는 것이지. 그렇지만 이런 봉인술은 원기를 크게 소모할 뿐 아니라 도움을 주는 이에게 거꾸로 저주가 옮겨갈 위험이 있네. 어쨌든 임시방편에 불과한 것이지.”

석목이 턱을 쓰다듬으며 낯빛을 살짝 흐렸다.

7대 종문은 현재 야만족과의 전쟁 때문에 지계고수와 선천고수 하나하나가 무척 귀했다. 이 일을 연맹에 보고한다 한들, 일개 후천무인인 석목을 위해 위험을 무릅쓸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른 방법은요?”

“두 번째 방법은 석 형이 토템 비술을 수련하는 것이지. 만겁시혼주가 몸에 심어진 사람이 만약 같은 종류이면서도 더욱 강한 괴수의 혼을 몸에 봉인한다면, 체내의 저주를 억제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흡수해 사용할 수도 있게 되네.”

풍리의 설명에 석목의 안색이 또 한 번 변했다.

“더 강한 괴수의 혼을 봉인한다고요?”

석목은 최근 몇 년 동안 전선에서 야만족과 교전을 벌여왔다. 그래서 그들의 토템 비술에 대해 상당부분 이해하고 있었다.

야만족의 토템 비술은 괴수의 혼백을 체내에 봉인해 괴수의 능력을 일부 사용하는 비술이다. 그리고 봉인 과정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위험하고 어려웠다.

“고맙습니다. 어쨌든 쉽진 않겠지만, 지계고수의 도움을 받는 것보다는 현실성이 있군요.”

석목이 안색이 몇 차례나 바뀐 뒤에 감사의 말을 했고, 풍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한숨을 쉬었다.

토템 비술을 수련해 저주를 없애기 위해서는 야만족의 황무지를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 각종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은 그곳에서 생활해본 풍리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괜찮네. 나는 그저 알고 있는 사실을 말해준 것뿐이야. 실질적으로 괴수의 혼을 구하는 일에 관해서는 내가 도움을 줄 방법이 없다네.”

“아닙니다. 손 놓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보다 뭔가 방법이라도 알고 있는 게 훨씬 낫지요.”

석목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참, 야만족의 황무지로 들어가게 된다면 주의할 것이 있다네.”

풍리가 진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엇이지요?”

“푸른 야만족이 속한 부락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아마도 그 부락의 토템용사라면 일정한 범위 내의 만겁시혼주를 감지할 수 있을 것이네.”

풍리의 말에 석목은 놀라움을 감출 수 없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자신이 야만족의 황무지에 들어갈 경우 위험이 몇 배로 늘어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이 문제 역시 해결할 수 없는 것은 아니지. 남성의 거점에서 외뿔살무사의 정혈을 판매하는 걸 보았네. 외뿔살무사는 황무지의 괴수 중 등급이 비교적 높은 뱀 계열의 괴수이기 때문에, 토템문신 위에 그것을 바르면 한동안 저주를 억제하고 숨길 수 있을 것이네.”

풍리의 말에 석목은 얼굴이 환해지며 기뻐했다.

풍리는 야만족의 황무지에 관해 몇 가지 이야기를 더 해준 뒤 자리에서 일어서려 했다.

“풍 형, 잠시 기다리세요.”

석목이 갑자기 풍리를 불러 세웠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의문점이 하나 있는데 대답해주실 수 있나요?”

“말해보게.”

“만겁시혼사는 매우 드문 저주이니 그 해법 역시 굉장히 비밀스러울 텐데, 풍 형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죠?”

석목의 질문에 풍리는 한참 동안이나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하기 어렵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고맙네.”

석목의 말에 풍리는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사실 풍리에 대한 석목의 의심은 이제 많이 사라진 상태였다. 그래서 석목은 황무지에 가기 전에 풍리의 목걸이를 돌려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문득 풍리의 과거가 그리 간단하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풍리에 관한 의문을 떨쳐내려고 애썼다. 그리고 자신의 저주를 풀 방법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야만족의 황무지는 위험이 수두룩한 곳이었다. 7대 종문은 과거부터 그곳에 고수들을 여러 차례 파견했고 그중에는 선천고수도 있었지만, 살아 돌아온 이들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은 그곳에 들어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소식이 끊겼다.

석목은 흑마문의 서적을 통해 이런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목숨이 걸려 있는 상황이니 무리해서라도 뛰어드는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다만 그전에 준비해야 할 일들이 있었다. 아무 기별 없이 거점을 떠난다면 탈주자가 되어 지명수배가 내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한참 후에 방을 나선 석목은 자원을 교환할 수 있는 건물로 향했다.

그리고 이틀 후 새벽, 석목은 다른 경로를 통해 풍리의 말이 틀림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는 흑마문에 서신을 남긴 뒤 조용히 남성의 거점을 나서 야만족의 황무지 쪽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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