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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86화 (86/916)

86화. 사불상(四不象)

석목이 황무지에 들어온 지도 벌써 반년이 흘렀다.

그동안 그는 때때로 출몰하는 야만족의 기병을 최대한 피해 다니며 괴수와 싸워야 했다. 이곳의 환경과 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그에게는 매우 험난한 여정이었다.

그러나 그 결과 석목은 야만족 황무지의 깊숙한 곳까지 들어올 수 있었다.

석목은 경계심 가득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눈에 들어오는 것은 여전히 생명의 존재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광경뿐이었다.

석목은 그제야 운철흑도를 내려놓고 물통의 물을 조금 마신 뒤, 바위 그림자 아래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반야천상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물이 귀한 야만족 황무지에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역시 식수였다. 처음 황무지에 왔을 때 석목은 준비가 부족했던 탓에 식수가 떨어져 여러 번 난처한 상황에 처했었다.

다행히도 우연히 만난 야만족이 자신의 물을 나눠주고, 근처에 수원이 있는 곳을 알려주었다. 황무지에서 물을 얻는 건 매우 힘든 일이었지만, 석목은 이제 수풀이 무성한 곳에는 반드시 수원이 있다는 걸 알았다.

석목은 물을 아끼기 위해 뜨거운 태양을 피해 밤에 움직이기로 결정한 참이었다. 밤은 괴수와 독충이 활발하게 활동하는 시간이라 위험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결정이었다.

처음으로 밤에 이동을 하던 날에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독개미에 물려 오른쪽 다리가 퉁퉁 붓기도 했다. 그때도 우연히 마주친 야만족 노인이 기괴한 약초를 사용해서 치료를 해줬다.

석목은 일반 야만족 중에는 인족의 백성처럼 선량한 사람이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면서 야만족에 대한 적의도 많이 희미해지고 있었다.

해가 서쪽으로 질 때쯤 석목은 눈을 떴다. 무언가 위험을 감지한 것이다.

고양이처럼 소리 없이 일어난 그의 손에는 이미 운철흑도가 쥐여 있었다.

송아지만한 크기의 괴수 수백 마리가 석목을 포위하며 다가오고 있었다. 굶주린 괴수들의 눈이 잔혹하게 번득였다.

석목은 그들이 야만족 황무지에서 악명이 자자한 늑대 계열의 괴수 질풍랑(疾风狼)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아봤다.

질풍랑은 황무지에서 서식하는 식물의 색과 비슷한 자색 털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걸음소리가 매우 조용하며, 일단 사냥감을 찍었다 하면 질풍 같은 속도로 움직이는 등 기습에 능한 괴수였다.

그중에서도 여느 질풍랑보다 몸집이 유독 큰 우두머리가 무리의 뒤쪽에 있는 것이 석목의 눈에 들어왔다.

석목은 몇 걸음 달려가다가 뛰어올라 우두머리를 향해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예닐곱 마리의 질풍랑이 번개 같은 속도로 사방에서 덮쳐왔다. 흰 발톱과 이빨이 석목을 향해 쏜살같이 다가왔다.

그때 석목이 팔을 꺾자 열 개가 넘는 검영이 사방으로 날아갔다.

날카로운 물체가 살을 베는 소리가 울려 퍼지면서, 일곱 마리의 질풍랑이 두 동강이 났고, 순식간에 피 냄새가 진동했다.

석목이 다음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다시 열 마리가 넘는 질풍랑이 그를 덮쳤다. 그 사이에 질풍랑의 우두머리는 재빨리 무리 사이로 몸을 숨겼다.

다시 화려하고 혼란스러운 검영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검영이 가는 곳마다 피의 비가 흩뿌려졌다.

열 마리가 넘는 질풍랑이 눈 깜짝하는 사이에 모두 산산조각이 났다.

석목이 법력을 주입해 화염으로 감싼 운철흑도를 휘두르자 붉은 검영이 사방으로 물결쳤다.

다시 그를 덮치려던 수십 마리의 질풍랑이 뜨거운 불의 열기에 본능적으로 물러났다. 그러나 흉흉한 눈빛은 여전히 석목에게 고정돼 있었다.

석목은 그 짧은 틈에 주위를 빠르게 훑어 우두머리의 위치를 파악하고 운철흑도를 맹렬하게 던졌다.

붉은 빛이 쓸고 지나간 곳마다 화염이 피어올라 십여 마리의 질풍랑을 집어삼켰다.

아우-!

처절한 늑대의 울음소리가 하늘을 뒤덮었다.

교활한 우두머리는 불길함을 느끼고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으나, 불같이 뜨거운 운철흑도에 가슴을 꿰뚫려 바닥에 꽂힌 채 피를 뿜어냈다. 곧 우두머리의 몸은 주변에 솟은 화염에 의해 순식간에 재가 되었다.

가장 강한 우두머리가 일격에 살해당하는 광경을 본 질풍랑들은 꼬리를 늘어뜨리고 깨갱거리며 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났다.

석목은 달아나는 질풍랑들을 쫓지 않고, 까맣게 타버린 우두머리의 주변에서 운철흑도를 뽑아 칼집에 넣었다.

그리고 허리춤에서 수통을 꺼내 익숙한 손놀림으로 늑대의 피를 담았다. 이것이 황무지에서 ‘물’을 얻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석목은 질풍랑의 피를 몇 모금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했다. 그리고 하늘이 어두워지자 다시 출발했다.

밤새 조심스럽게 길을 걷던 석목은 태양이 뜨기 전 작은 산에 있는 거대한 암석 앞에 도착했고, 그 주위를 돌아보다가 동굴 하나를 찾아냈다.

동굴의 넓이는 고작 1장 정도였지만 몸을 숨기기에 알맞은 천연 동굴이었다. 허리를 숙이고 그 안에 들어간 석목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천상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석목은 다급한 말발굽 소리에 놀라 눈을 떴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것으로 보아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은 출발 전에 풍리가 조언해준 것을 떠올리고, 눈을 빛내며 운철흑도를 들고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20여 장 밖의 거리에서 세 필의 말이 석목이 있는 방향으로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앞쪽에서 달리는 두 마리의 말에는 남녀 야만족이 각각 타고 있었다. 뒤쪽 말에는 아무도 타고 있지 않았는데, 마치 뒤쪽의 말이 앞의 두 사람을 쫓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석목은 정신을 집중해서 살펴보았다. 그리고 뒤에 오는 말의 생김새가 무척 특이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 말은 소의 머리와 사슴의 몸, 말의 발굽, 사자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다.

달려오던 두 야만족은 갑자기 나타난 석목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때 등 뒤의 괴수가 우렁차게 포효했다.

앞서 달리던 말들이 놀란 듯 갑자기 앞다리를 꿇었다. 그 바람에 말에 타고 있던 야만족들이 튕겨 나와 석목의 근처까지 날아와서 떨어졌다.

그러자 괴수는 갑자기 방향을 돌렸다. 그리고 아직 상황 파악을 제대로 하지 못한 석목을 향해 엄청난 속도로 돌진해왔다. 괴수의 머리에 달린 날카로운 비수 같은 쇠뿔이 석목을 향했다.

휙!

운철흑도가 붉게 빛나더니 열세 개의 검영이 괴수의 머리를 향해 날았다.

그런데 검광이 괴수에게 막 닿으려는 찰나, 석목은 이 괴수에 대해 전해들은 이야기를 문득 떠올렸다.

이처럼 네 가지 동물의 특징을 한 몸에 가진 괴수를 사불상이라 했다. 아주 희귀한 괴수 중 하나로, 그리 강하지는 않지만 달리는 속도는 야만족이 타는 탈것보다 훨씬 빨랐다.

석목은 흥분한 표정으로 순간적으로 운철흑도의 방향을 틀며 손에서 놓았다.

휙!

그의 손에서 벗어난 운철흑도가 날아가서 근처의 돌에 깊숙이 박혔다.

사불상의 뿔이 자신의 가슴을 들이받기 직전, 석목은 기합을 지르며 괴수의 두 뿔을 잡았다. 그리고 다리를 앞뒤로 벌리고 허리에 힘을 주었다.

쾅!

강한 힘이 두 팔을 타고 전해지는 것을 느낀 석목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지만, 하체는 그 자리에 뿌리를 내린 고목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

사불상은 무언가 단단한 것에 충돌한 듯 고통스러운 신음을 냈다. 그리고 공포에 질린 얼굴로 석목을 뿌리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머리를 흔들었다.

그러나 뿔에 전해지는 거대한 힘에 고통을 느낀 사불상은 자신도 모르게 석목을 향해 다가갔다.

전력을 다하는 석목의 전신에는 근육이 울룩불룩 솟아 있었으며, 체내에서 진기가 세차게 흐르고 있었다.

만약 탈태결과 천상공이 5단계에 들어서며 선천초기의 고수에 필적하는 힘을 가지지 않았더라면, 진즉에 괴수의 엄청난 힘에 나가떨어졌을 것이다.

석목과 사불상의 거리는 이제 지척에 이르렀다. 석목이 한 번 더 힘을 주어 끌어당기자 사불상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두어 걸음 더 다가왔다.

석목은 기세를 몰아 괴수의 등에 올라탔다. 두 손은 여전히 뿔을 꽉 쥐고 두 다리로 괴수의 복부를 강하게 죄었다.

놀라고 분노한 사불상은 사방으로 뛰어다니며 석목을 떨어뜨리려 몸을 흔들어댔다.

그러나 석목은 사불상의 몸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사불상이 몸을 흔들며 저항할 때마다 복부를 발로 걷어차 고통을 주었다.

일각이 지나자 겨우 얌전해진 사불상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했다. 사불상은 매우 총명했다. 석목이 한 쪽 발로 가볍게 차면 방향을 전환했고, 두 발로 동시에 차면 즉시 움직임을 멈췄다.

석목은 기뻐하며 사불상의 등에서 뛰어 내렸다. 사불상은 달아나지 않고 석목의 뒤를 따라왔다.

그제야 석목은 야만족 남녀가 놀란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을 눈치 챘다.

야만족 남자는 열네다섯 살 정도로 보였다. 키는 석목보다 머리 반 개 정도 작았고, 머리에 검은 깃털을 꽂고 있었다. 방금 말에서 떨어지면서 생긴 듯 얼굴에는 상처가 나 있었다.

그가 타고 있던 말은 다리가 부러졌는지 석목이 몸을 숨기고 있던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 쓰러져 고통의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야만족 여자는 소년보다 한두 살 정도 많아보였다. 옅은 검은색의 피부에 얼굴 생김새가 수려했고, 키는 인족의 여성만 했다.

“목숨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등아(腾鸦)부족 사성의 절을 받으십시오!”

야만족 소년이 석목에게 공경히 예를 표하며 말했다. 소녀 또한 석목에게 예를 표했다.

“고마워할 필요 없습니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칼집에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야만족 소녀가 기대에 찬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제 이름은 사교이며 사성의 누나입니다. 용사님의 존성대명을 여쭈어도 될까요? 귀하를 우리 등아부족의 손님으로 모시고 싶습니다. 저희를 구해주셨으니 아버지께서 매우 감사해하실 겁니다. 곧 열리는 아신제전에 이토록 존귀한 손님이 참여한다면 분명 모두가 기뻐할 것입니다.”

“맞습니다. 아신제전은 저희 아버지가 직접 주최하는 행사로 매우 즐거울 겁니다.”

소년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거들었다.

석목은 그들의 말에 마음이 흔들렸다.

그가 최근 야만족에 대해 알게 된 바로는, 일반적으로 제전은 부족의 제사장만이 주최할 수 있는 것이었다.

야만족 토템의 비밀을 알아낼 방법을 찾지 못해 걱정하던 참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제사장의 자녀를 구한 것이다.

석목은 살짝 웃으며 말했다.

“제 이름은 목입니다. 두 분의 초대에 감사드립니다. 폐가 되지 않는다면 등아부족의 아신제전을 체험해보고 싶군요.”

“정말인가요? 잘 됐네요! 아버지께서 분명 좋아하실 겁니다."

사성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교 역시 미소 띤 얼굴로 눈빛을 반짝였다.

"누나, 빨리 가자!"

사성이 더 기다리지 못하겠다는 듯 누나를 떠밀며 말했다.

말에 올라탄 사교는 사성이 뒤에 타자 말머리를 돌려 동북쪽 방향을 향해 달렸다.

석목도 사불상에 올라 그들과 나란히 질주하며 물었다.

“어쩌다가 사불상에게 쫓기게 된 것이죠?”

“사성이 오늘 꼭 사냥을 나가서 제전에 올릴 괴수 고기를 구해야 한다며 저를 끌고 나왔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사불상이 나타났고, 우리가 설치한 함정은 괴수의 화만 돋울 뿐 아무 소용이 없었죠. 도움이 없었다면 자칫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사교는 말을 하다 말고 새삼 화가 난 듯 고개를 돌려 사성을 째려봤다. 사성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석목은 가는 동안 자신과 나이가 얼마 차이 나지 않는 그들과 전혀 어색함이 없이 웃고 떠들었다.

사교와 사성의 말에 따르면 등아부족은 부락 인구가 총 삼사백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부족이었다. 세 명의 토템용사가 있었으며, 제사장인 아버지도 그중 하나였다.

한 시진쯤 달리자 1장 넓이의 작은 시냇물이 멀리 석목의 눈에 들어왔다.

시냇물의 양쪽에는 소가죽으로 만든 천막 백여 개가 어지럽게 세워져 있었고, 주변에서 방목 중인 소와 양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석목은 하늘에서 검은 점들이 선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시력을 집중했다. 빼곡한 점들은 전부 까마귀였다.

석목 일행이 부락에 가까이 가자 그 점들은 화살처럼 빠른 속도로 그들을 향해 강하했다.

석목은 본능적으로 운철흑도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나 까마귀들이 사교와 사성을 둘러싸고 선회하는 것을 보고 손에 힘을 뺐다.

석목은 사람과 아주 친밀해 보이는 그 까마귀들이 사교와 사성의 아버지가 기르는 괴수라는 걸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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