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평만과 흉만
부락의 중심에는 광활한 공터가 있었고, 공터에는 거대한 암석으로 이루어진 삼 장 넓이의 원형 제단이 있었다.
세 사람은 제단의 맞은편에 있는 커다란 천막 앞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검은 망토를 걸친, 네모난 얼굴에 짙은 눈썹의 중년 야만족이 서 있었다.
말에서 내린 사교와 사성이 달려가자 중년의 야만족은 그들을 한꺼번에 두 팔로 안고 등을 토닥이며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석목은 곧 자신과 사불상을 바라보는 중년 야만족의 시선을 느꼈다. 그들이 자신이 목숨을 구해준 이야기, 사불상을 길들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화를 마친 중넌의 야만족이 석목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갑자기 야만족의 표정이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미묘하게 변했고, 곧 원래대로 돌아왔다.
“저는 등아부족의 족장 사랑입니다. 아이들을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중년의 야만인은 한손을 가슴에 얹으며 허리를 숙여 석목에게 예를 표했다.
석목은 이곳으로 오는 동안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알고 있었다. 그는 부락의 제사장이자 족장으로 후천중기의 실력을 가진 무인이며, 세 토템용사 중 우두머리라고 했다.
석목이 담담하게 웃으며 허리를 숙인 사랑을 일으켰다.
“족장님, 이러실 필요 없습니다.”
사랑은 석목의 손에서 전해지는 저항할 수 없는 힘을 느끼고 놀란 표정이 되었다. 놀라운 힘을 가졌다더니 과연 허언이 아니었다.
“목 용사, 임무를 받고 이곳에 온 것이라면, 우리 부족이 도움을 드리고 싶습니다.”
사랑이 쾌활하게 말하자 석목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호의에 감사드립니다. 그렇지만 제가 부족을 떠나온 것은 특별한 임무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우리 등아부족에서 며칠 머무는 것이 어떤가요? 성심껏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랑은 웃으며 말했고, 더러워진 석목의 옷을 보고 덧붙였다.
“참, 모래바람을 많이 맞았으니 우선 천막에서 몸을 씻는 것이 좋겠군요.”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석목이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야만족의 황무지에 들어온 이후 그는 오랫동안 제대로 몸을 씻지 못했다. 게다가 오늘 사불상과 힘을 겨루느라 땀을 많이 흘려서 매우 찝찝한 상태였다.
사랑은 사람을 불러 사불상에게 물을 먹이도록 지시하고, 직접 석목을 멀지 않은 천막으로 데려갔다. 그곳은 족장이 거주하는 곳을 제외하고 부족 내에서 가장 좋은 천막이었다.
이 모습을 본 사교는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등아부족은 원래 손님을 극진히 대접하곤 했지만, 오늘 아버지가 석목을 대하는 모습은 그런 것 이상이었다. 마치 석목을 공경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잠시 후, 모두 떠나고 천막에 혼자 남은 석목은 무기를 전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자 건장한 두 야만족이 물이 든 욕조를 가지고 들어왔다. 두 사람이 나간 뒤 석목은 옷을 벗고 욕조에 몸을 담갔다.
같은 시간, 족장이 기거하는 천막에서 사랑은 자녀들의 질문에 답하는 중이었다.
“아버지, 등아부족의 족장이면서 제사장인 아버지가 어째서 목 용사를 그토록 공경히 대하는 것이죠?”
사교가 물었다.
옆에 있는 사성의 얼굴에도 호기심이 가득했다.
“교아, 성아야, 경험이 부족한 너희는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당연하다. 목 용사는 큰 부족에서 시련을 위해 나온 왕족의 자제일 가능성이 아주 높단다.”
사랑은 자애로운 눈빛으로 아이들을 보며 이야기하다가 순간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교와 사성은 둘 다 천부적인 소질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이들도 조건이 좋은 다른 부족에서 자랐다면 괴수를 처치하는 경험을 쌓으며 이미 토템용사가 됐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사랑 자신은 고작 초보 제사장일 뿐이었다. 무인으로서도 그리 강하지 않아서 자녀들을 토템용사로 만들어줄 능력이 없었다.
“왕족의 자제요?”
사랑의 말에 사교가 다시 물었다.
“그렇단다. 방금 그와 접촉했을 때, 목 용사의 몸에 봉인된 괴수의 힘이 굉장히 강하다는 걸 느꼈다. 작은 부족 출신이나 보통의 야만족이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지. 게다가 그의 몸에서 중급 무기(巫器)의 파동이 느껴졌다. 그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하급 무기를 지니고 있더구나.
우리 같은 작은 부락은 하급 무기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을뿐더러, 부족민 대부분 무기라는 것을 본 적조차 없지. 그러니 그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다는 증거란다. 그는 아마도 우리 부족의 모든 토템용사가 덤빈다 해도 상대가 되지 않을 만큼 강한 실력자일 것이다.”
아버지의 설명에 사교와 사성은 무척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사교의 눈빛은 어딘지 모르게 침울했다.
* * *
이각 후, 몸을 씻은 석목은 천막 밖으로 나와 부족의 야만족들과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교와 사성이 데리고 온 손님인 만큼 부족의 야만족들은 석목을 매우 극진하게 대접했다. 그들은 석목에게 직접 만든 젖술등을 권했다.
그다지 부유하지 않은 작은 부락에서는 사치스러울 만큼 귀한 식품이었기 때문에, 석목은 야만족의 순수한 선량함을 다시 한 번 피부로 느꼈다.
석목은 이 기회에 황무지에서 생존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고자 했고, 이야기의 화제는 자연스럽게 그의 관심사 쪽으로 넘어갔다.
석목은 부족민에게서 수원을 찾는 다양한 방법과 독충, 괴수에 대응하는 방법 등을 빠르게 배웠다.
석목 또한 그 보답으로 물고기를 잡는 요령을 알려주었다.
본래 어부였던 석목은 물고기를 잡는 법에 정통했다. 그는 아주 간단한 도구만을 써서 시냇가에서 어패류를 잡았다.
물을 찾아다니며 거주하지만 물에 익숙하지는 않은 야만족들은 평소에 맛보기 어려운 해산물을 보고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그 날 저녁, 한쪽 천막에서는 통통한 양 한마리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며 향긋하고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사랑은 만면에 웃음을 띤 채 천막 가운데 위치한 상석에 앉아 있었고, 석목은 사교 남매와 함께 사랑의 좌측에서 음식을 즐기며 웃고 떠드는 중이었다.
사랑의 우측에는 서른 명 가량의 야만족 사내가 앉아 술과 고기를 먹고 있었다. 석목은 양고기를 베어 물며 맞은편에 있는 두 야만족 사내를 눈으로 훑었다.
한 사람은 금색 곱슬머리를 하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변발에 둥근 귀걸이를 하고 있었으며 드러난 가슴에는 흉악하게 생긴 검은색 까마귀가 새겨져 있었다.
이들은 후천초기의 실력을 가진 등아부족의 두 토템용사였다.
석목은 이날 오후 야만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이리저리 돌려 물어본 끝에 알게 된 사실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야만족이 흉만과 평만의 두 부류로 나뉜다는 것이었다.
흉만은 잔혹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다른 부락을 강탈하여 집어삼키는 것을 좋아했다. 심지어 인족을 침략하고 전쟁을 일으키는 것을 성전(圣战)이라 칭하며 극도로 추앙하기도 했다.
반면 평만은 대체로 성격이 온화하며 손님을 접대하기를 좋아했고, 보통 방목과 수렵을 생계수단으로 삼았다. 이들은 거인의 핏줄이 희박한 탓에 흉만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했고, 토템용사를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
그리고 등아족은 평만에 속하는 부족이었다. 그것이 삼사백 명이 있는 부락에 토템용사가 고작 셋밖에 되지 않는 이유였다.
석목은 이날 저녁 연회에서 부족민 모두가 자신을 매우 공경히 대한다는 것을 느꼈다. 심지어 사교 남매마저도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뭔가 조심스러웠다.
그러나 석목은 이 부족에 오래 머물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그다지 마음에 두지 않았다.
모두 식사를 마칠 즈음이 되자 사랑이 박수를 쳤다. 그러자 열 명 가까이 되는 야만족 여인이 줄지어 들어와 단조로운 북소리에 맞춰 춤을 추며 흥을 돋우었다.
“사 족장님, 등아부족의 토템은 낮에 본 검은 까마귀들입니까?”
석목이 여성 야만족의 치마에 있는 까마귀 그림을 보며 물었다.
“지금은 그렇습니다. 이 까마귀들은 황무지에서 가장 하급에 속하는 괴수지만 개체수가 상당히 많지요. 게다가 강하하는 속도가 번개 같이 빠르고 부리는 도검처럼 단단합니다. 이들이 무리를 이룬다면 일반적인 토템용사는 대적하지 못합니다.”
사랑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당하고 차분하게 대답했다.
까마귀는 확실히 신기한 괴수였다. 그러나 까마귀는 일정한 수가 무리를 지어야 후천중기의 토템용사 하나를 겨우 상대할 정도인 것 같았다.
석목은 눈을 반짝이며 재차 물었다.
“그렇다면 이전의 토템은 까마귀가 아니었다는 말씀입니까?”
“본 부족에 계승되는 고서적의 기록에 따르면, 등아부족은 천 년 전 금오(金乌)부족이라 불리는 거대한 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까마귀뿐만 아니라 대다수 조류 괴수의 혼을 봉인할 수 있는 토템비술이 전승되어 왔지요.”
자랑스럽게 이야기를 이어가던 사랑의 얼굴에 어렴풋이 슬픈 표정이 떠올랐다.
“하지만 수차례 전란과 이주를 겪으며 부족은 사분오열했고 날이 갈수록 쇠퇴했습니다. 긴 세월 동안 줄곧 강력한 제사장이 배출되지 않아서 강대한 괴수의 혼을 봉인할 수 없었고, 부족의 부흥에 대한 희망도 점차 사라졌습니다.”
옆에서 이야기를 듣던 사교와 사성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한참 후, 석목은 사랑과 자녀들의 기분이 다시 좋아지기를 기다렸다가 그동안 가장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이전에 거대한 핏빛 구렁이 토템을 본 적이 있는데, 봉인된 괴수의 혼이 매우 강했습니다. 등아부족의 토템비술로도 그렇게 강한 괴수의 혼을 봉인할 수 있습니까?”
“충분히 강한 제사장이 있다면 가능하겠지요. 등아부족이 가장 강성했던 시절에는 전설의 괴수 대붕금지(大鹏金翅)의 봉인에도 성공한 적이 있으니까요.”
사랑이 설명을 하다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석목에게 물었다.
“참, 목 용사가 말한 그 부족의 야만족은 피부가 푸른색이지요?”
석목은 잠시 생각을 한 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제 추측이 맞다면 그것은 8대 부족에 속해 있는 열사부족의 고유한 토템일 겁니다.”
사랑의 확신에 찬 말에 석목의 두 눈이 빛났다. 석목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족장님, 열사부족의 근처에서 수련을 하고 싶은데 길을 알 수 있을까요?”
사랑은 석목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지만, 굳이 이유를 캐묻지 않고 열사부족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석목은 매우 기뻐하며 밤늦게까지 사교 남매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 * *
쉬익!
허공을 가르고 날아간 푸른색 화살이 거대한 바위 위에 비스듬히 누워 있는 노란 고목에 박혔다.
그러자 화살에 맞은 고목이 갑자기 하늘 높이 솟아오르더니 몸부림을 치며 주위의 관목들을 쓰러뜨렸다.
자세히 보니 그 고목은 거대한 구렁이의 머리였다. 화살은 꼬리의 깃털만 조금 보일 만큼 구렁이의 머리에 깊게 박혀 있었다.
구렁이의 길이는 5장이 넘었으며, 몸은 암석 같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구렁이가 몸부림을 칠 때마다 주위에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나무들이 거대한 꼬리에 맞아 굉음을 내며 쓰러졌다.
구렁이는 일각 가까이 몸부림친 끝에 결국 흰 배를 드러내고 누웠고,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구렁이가 쓰러지자 이삽십 장쯤 떨어진 곳의 바위 위에서 몇 사람이 뛰어 내려왔다. 가장 앞서 내려온 것은 석목이었고, 사교와 사성을 비롯한 등아부족 사람들이 뒤를 따랐다. 이들은 모두 크고 작은 수렵물을 들고 있었다.
석목은 삼 척 길이의 황색 장궁을 들고 있었는데, 활의 양 끝은 뱀 머리 모양이었고, 두 뱀의 입이 검은색 시위로 연결돼 있었다.
이 장궁은 과거 푸른 피부의 야만족과 싸울 때 손에 넣은 파천궁이었다. 석목은 혹시라도 야만족이 이 활을 알아볼까 걱정이 되어, 장식을 더한 뒤 괴수의 피를 바르고 황색 염료로 물들였다.
그는 자신의 손에 들린 장궁을 바라보며 크게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파천궁의 위력은 이전에 석목이 사용하던 자강궁보다 훨씬 강했다.
풍리의 말에 따르면, 파천궁에 새겨진 것들은 야만족 부락의 특수한 무문(巫文)이었다. 태고의 신비한 힘을 지닌 무문은 인족의 부문과 비슷한 효과를 지니고 있다고 했다.
무문의 힘으로 강화된 파천궁은 자강궁보다 사정거리가 훨씬 길었다. 그뿐만 아니라 갑옷을 뚫을 수 있을 만큼의 강한 위력도 더해졌다.
게다가 법력을 주입하면 일정한 범위 내에서 크기를 변화시킬 수 있어서 휴대하기에도 매우 편리했다.
석목이 쏜 화살에 맞아죽은 거대한 구렁이는 후천중기의 무인과 비견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괴수였다. 그러나 파천궁과 추풍전 앞에서는 여느 동물과 다를 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