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아신(鸦神)제전
등아부족 사람들은 노란 구렁이의 시체 곁으로 빠르게 달려갔다.
“목 용사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구렁이의 시체를 본 사성이 존경심이 가득 담긴 눈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맞습니다! 이 구렁이는 주위의 환경에 따라 비늘의 색이 변하고, 움직일 때도 기척을 내지 않는 매우 교활한 녀석입니다. 게다가 비늘이 마치 철과 같이 단단해서 중무기를 사용한다 해도 상처 입히기가 쉽지 않은데… 활로 일격에 사냥하다니, 진정한 파로특(巴鲁特)이십니다!”
한 곱슬머리 야만족 사내가 탄복한 듯 큰 목소리로 덧붙였다.
파로특은 야만족들이 용사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무예를 숭상하는 야만족은 자신이 진정으로 존경하는 이에게만 이 호칭을 썼다.
석목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과찬입니다. 무기의 덕을 봤을 뿐입니다.”
피부의 색을 바꾸는 능력이 있는 구렁이는 확실히 까다로운 상대였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과 추풍전, 파천궁을 가진 석목은 어렵지 않게 사냥에 성공한 것이다.
석목은 구렁이의 시체에서 추풍전을 뽑아 피를 닦은 뒤 허리의 화살통에 꽂았다.
석목이 푸른 야만족에게서 빼앗은 추풍전의 수는 고작 열세 개였다. 이 화살은 매우 강한 위력을 지니고 있었으나, 사용할 때마다 무문의 힘이 조금씩 감소했다.
석목의 계산대로라면 하나의 추풍전을 다섯 번 사용하면 무문의 힘이 완전히 소실됐다.
등아부족 사람들이 석목이 들고 있는 활과 화살을 부러운 표정으로 보았다.
그들이 사용하는 무기는 대부분 괴수의 뼈로 제작한 것이었고, 풍족하지 못한 부족의 살림 때문에 강철로 단조한 무기는 많지 않았다.
“그것들은 무기(巫器)인가요?”
사교가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죠.”
석목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며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작아진 파천궁을 품속에 넣었다.
사교는 석목이 파천궁에 대해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눈치 채고, 재빨리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날도 늦었고 사냥감도 많이 잡았으니, 이제 마을로 돌아가죠.”
일행은 구렁이의 시체를 줄로 묶어 들어 올린 후 마을 쪽으로 향했다. 다들 돌아가는 발걸음이 가벼웠고, 웃고 떠드는 소리가 가득했다.
사냥한 구렁이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었다. 한 마리를 잡으면 모든 부족원이 이틀은 먹을 수 있는 식량이 될 만큼 살이 많았다.
또 껍질은 연갑 제작에 사용되었고, 근육과 뼈는 활과 화살의 재료로 좋았다. 다른 부족과 물물교환을 통해 필요한 물건을 얻을 수도 있었다.
일행이 커다란 구렁이를 짊어지고 돌아오자 마을에 난리가 났다.
구렁이를 아직 본 적이 없는 아이들은 신이 나서 시끄럽게 떠들며 일행을 따라다녔다.
사교와 일행이 구렁이를 사냥한 과정을 설명하자, 부락의 야만족들은 석목을 더욱 존경하는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석목은 뒷짐을 진 채 서서 부락을 둘러보았다.
부족민들은 저녁의 제전을 위해 많은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부락의 중앙에 있는 광장에는 높은 나무판자가 설치되었고, 그 주위에는 아직 불을 붙이지 않은 횃불 십여 개가 세워져 있었다.
제단 위에는 무엇을 조각한 것인지 알아보기 힘든 검은 새 모양의 조각상이 있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특히 붉은 빛을 희미하게 발산하고 있는 두 핏빛 눈은 진짜로 주위를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석목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정신을 집중하자, 그 느낌은 착각이었던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때 사교에게 구렁이 사냥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들은 족장 사랑이 석목에게 다가와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 이 구렁이까지 사냥하다니 용사님의 강함은 정말 깊이를 헤아릴 수 없군요.”
“과찬입니다. 제전에 참여하는데 선물로 드릴 것이 없으니 대신 아신께 드리는 공물로 구렁이를 잡아온 것입니다.”
석목은 조각상에서 눈빛을 거두고 기분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족장이자 제사장으로서 아신에 대해 남다른 경외심을 가진 사랑은 석목의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석목에 대한 호감이 더 커졌고, 그에게 희미하게 남아있 던 일말의 경계심도 모두 사라졌다.
“제가 아신을 대표해 그 진심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사랑은 한 손을 가슴에 올리며 숙연하게 말했다.
사랑은 사교, 사성과 몇 마디 대화를 더 나눈 뒤 부족원을 시켜 구렁이를 해체하도록 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석목이 갑자기 눈썹을 찡그렸다.
토템저주의 힘이 갑자기 폭주하면서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작렬한 것이다.
석목은 안색이 창백해져서 살짝 비틀거렸다.
“괜찮아요?”
석목의 상태가 이상한 것을 발견한 사교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조금 피곤한 것뿐이에요. 잠시 쉬면 좋아질 겁니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사교를 향해 억지로 웃어보였다. 그리고 사랑에게 인사를 한 후 자신의 처소로 향했다.
멀어지는 석목의 뒷모습을 보는 사교의 아름다운 얼굴에 서글픈 표정이 떠올랐다.
석목은 자신의 처소로 돌아와 급하게 옷을 벗었다. 가슴의 구렁이 토템이 붉은 빛을 내뿜고 있었다. 그 빛은 마치 혈액처럼 토템의 윤곽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그걸 본 석목의 표정이 흐려졌다. 만겁시혼주가 결국 몸을 침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석목은 품속에서 호리병을 꺼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며 그것을 조심스럽게 기울이자 남색의 걸쭉한 액체가 흘러나왔다. 남성을 떠나기 전에 구입한 독각 구렁이의 정혈이었다.
석목은 정혈을 가슴의 토템에 천천히 발랐다. 뼛속까지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이어 토템이 뿜어내던 붉은 빛이 천천히 희미해지더니 결국 완전히 사라졌다.
석목은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의 온몸은 이미 땀에 흥건히 젖어 있었다.
호리병을 챙긴 뒤 창가로 걸어간 석목은 끝없이 넓은 동쪽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의 두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눈빛이 점점 차갑게 가라앉았다.
‘어머니, 반드시 살아남아 가장 강한 사람이 될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 * *
모닥불이 타오르며 순식간에 밤하늘을 붉게 밝혔다.
일 년에 한 번 열리는 등아부족의 아신제전이 시작된 것이다.
모든 부족원이 아신에게 제사를 드리기 위한 제단 앞에 모였다. 석목도 사랑을 비롯한 부족의 어른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제전은 두 단계로 나뉘어 진행됐다. 먼저 부족의 제사장인 사랑이 제단 앞에서 아신의 찬가를 읊고 공양을 바치며, 내년에도 부족을 지켜달라는 기도를 드렸다.
엄숙하게 신에게 제를 올린 후에는 모두 밤새 축제를 즐겼다.
제단 앞의 불더미에 모인 사람들은 평소에는 맛보기 힘든 고기와 음식들을 먹으며, 쇠뿔로 만든 잔과 뼈 그릇에 술을 가득 담아 마셨다. 은은한 현(弦) 소리에 맞춰 발을 구르며 부르는 노랫소리가 온 부락에 울려 퍼졌다.
“드시지요.”
사랑이 석목에게 술을 가득 따라 건넸다. 석목은 살짝 웃으며 한 입에 잔을 비웠다.
“맛있군요!”
석목이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야만족의 술은 인족의 술과는 비교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석목이 낮에 잡은 구렁이의 쓸개를 정제해 만든 이 술은 굉장히 독특하고 상쾌한 풍미를 지니고 있었다.
“천만에요. 이 작은 부락의 술이 어찌 넓은 세상을 경험한 목 용사님의 성에 찰 수 있겠습니까.”
사랑은 겸손하게 말했지만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했다.
석목은 크게 웃으며 말했다.
“너무 그렇게 겸손하게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술은 다른 곳에서는 맛볼 수 없는 특별하고 독특한 풍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은 석목이 그저 예의상 이야기하는 것을 알면서도 기분 좋게 웃었다.
바로 그때 주위에서 갑자기 환호성이 들려왔다.
어느새 인파의 중앙에 사교가 서 있었다.
그녀는 붉은색 긴 치마를 입고 반들반들한 이마에 월아석이 끼워진 장신구를 두르고 있었다. 손목과 발목에는 방울이 달린 붉은 실이 매여 있었다. 평소의 늠름하고 씩씩한 모습과는 크게 다른, 고상함과 아름다움이 두드러진 모습이었다.
사교는 멀리서 사랑에게 허리를 숙여 예를 표하고, 석목을 슬쩍 곁눈질한 뒤 광장의 중심으로 뛰어들었다. 제비처럼 가뿐한 그녀의 몸짓에 주위의 부족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사교의 양쪽에 선 야만족 악사들이 뼈로 만든 현금을 튕기고 북채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사교는 아름다운 몸을 현금 소리에 맡기고 나풀나풀 춤을 추었다. 그녀가 손과 발을 움직일 때마다 은방울이 흔들리며 맑은 소리를 냈다.
붉은 치맛자락을 이리저리 휘날리며 제자리에서 도는 사교의 모습은 마치 그림 같았고, 고개를 돌려 웃는 얼굴은 꽃 같았다. 그녀는 막 피어난 진달래처럼 형언할 수 없을 만큼 아름답고 매혹적이었다.
연주가 끝나고 소녀가 치맛자락을 든 손을 놓자, 땅이 울릴 정도로 폭발적인 환호성이 쏟아졌다.
특히 청년들은 더욱 눈을 반짝이며 취한 듯 사교를 바라봤다. 그녀는 막 솟아오른 태양처럼 눈이 부셨다. 온 하늘을 뒤덮은 별들이 빛을 잃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제 딸의 춤이 어떤가요?”
사랑이 짧은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자랑스럽다는 듯 물었다. 딸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한 표정이었다.
“굉장히 아름다웠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춤은 처음 보는 것 같군요.”
석목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을 했다.
그 말에 사랑은 크게 웃으며 술을 한 잔 비웠다.
아신제전은 일 년 동안 고생한 부족민을 위한 축제이기도 했다.
부족민들은 서로에게 축하의 말을 건네며 술을 실컷 마셨다. 때때로 광장의 중앙에서 소년소녀들이 야만족 고유의 연주에 맞춰 흥겹게 노래하고 춤을 췄다. 이미 몇몇 야만족은 술에 취해 얼굴이 새빨개지고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인사불성이 되어 있었다.
신명나는 축제는 밤이 깊어서야 끝났다.
술을 많이 마신 듯 얼굴이 발갛게 달아오른 사교는 취해서 몸을 가누지 못하는 사성을 익숙하게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사성을 부축해 거대한 천막 안쪽 방에 눕히고 가죽 이불을 덮어준 뒤, 아직 불이 켜져 있는 한 방을 바라보았다.
불빛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교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볼이 살짝 붉어지더니, 곧 몸을 돌려 다른 방으로 걸어갔다.
불이 켜진 방에서는 사랑과 석목이 마주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둘 다 상당히 많은 양의 술을 마셨지만, 얼굴에 살짝 홍조가 돌 뿐 취기는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한담을 나누던 석목이 찾아온 이유를 단도직입적으로 밝혔다.
“족장님. 요 며칠간의 환대에 감사드립니다. 그런데 저는 꼭 해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어서 내일 떠나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밤은 작별인사를 하러 찾아온 것입니다.”
사랑은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목 용사님의 신분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이미 알아봤습니다. 하셔야 한다는 일 역시 분명 중요한 일일 테니 막을 수 없겠지요. 참, 이번에 열사부락으로 간다고 하셨지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자, 사랑은 열사부락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주었다.
“열사부락은 이곳에서 천리는 족히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그곳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흑사(黑土)사막을 건너야 하는데, 그 사막은 매우 광활해 아무리 기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사흘은 꼬박 걸어야 횡단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에는 극독을 가진 사막 전갈이 득시글거리고 있습니다.”
사랑은 잠시 생각한 뒤 말을 이었다.
“사막전갈들은 훈장수(熏獐兽)를 매우 두려워합니다. 그 냄새만 맡고도 멀리 도망갈 정도죠. 수컷 훈장수는 체내에 향기를 내는 구슬을 가지고 있는데, 냄새가 아주 진하고 오래 가서 몸에 지니고만 있어도 전갈들이 알아서 달아날 겁니다. 내일 사교에게 목 용사님의 사냥을 돕도록 일러두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족장님.”
석목은 사랑의 따뜻한 마음을 느끼며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때, 방 밖에서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사랑이 문 쪽을 바라보고 이마를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사교냐? 들어오너라.”
문이 열리며 사교가 뜨거운 차 주전자와 찻잔 두 개를 쟁반에 담아 들고 들어왔다. 쟁반은 흠뻑 젖어 있었고, 안색이 약간 창백한 사교의 손은 빨갛게 익어 있었다.
“아버지, 목 오라버니. 사막의 밤을 우려낸 차입니다. 해장에 좋을 겁니다.”
사교는 쟁반을 탁자에 놓고 석목을 한 번 보더니 빠르게 밖으로 나갔다.
사랑은 여전히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목도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그는 사랑과 몇 마디 이야기를 더 나눈 뒤 방을 나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