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천랑(天狼)부족
둘째 날 이른 아침, 석목이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문을 열자 사성과 사교, 그리고 요 며칠간 사이좋게 지냈던 젊은 야만족 십여 명이 서 있었다.
사교가 어색하게 말했다.
“목 오라버니, 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었어요. 최근 황무지의 기후 변화가 심해서 훈장수의 수가 많이 감소한데다, 수컷 훈장수는 특히 잡기가 어렵기 때문에 모두 함께 왔어요.”
그러자 사성이 해맑게 웃으며 덧붙였다.
“다 함께 배웅하러 왔다고 생각하세요.”
석목은 눈앞의 야만족들을 바라보며, 며칠간 받았던 환대가 떠올라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나 그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사양하지 않고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여러분께 신세를 지겠습니다.”
사냥 준비를 마친 석목 일행은 부락을 떠나 먼 곳을 향해 걸었다.
그리고 근처의 언덕에서는 사랑이 곱슬머리 야만족 사내와 나란히 서서 부락에서 점점 멀어지는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행의 모습은 서서히 검은 점이 되었다가 곧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졌다.
“족장, 사교가 목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는 것 같던데, 어째서 그가 부락을 떠나는 걸 만류하지 않았지요?”
곱슬머리 사내가 시선을 거두며 사랑에게 물었다.
사랑이 씁쓸하게 웃더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내가 왜 그런 생각을 안 해봤겠나? 그렇지만 그건 불가능하다네. 목의 신분은 절대 평범하지 않아. 아마 어느 커다란 부족의 직계자손일 테지. 그런 사람이 어찌 이런 작은 곳에 남고자 하겠는가?”
“그렇다면 왜 사교에게 그를 돕게 한 것이죠? 사교가 더 힘들어질 겁니다.”
곱슬머리 사내가 재차 묻자 사랑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안심하게나. 사교는 마음이 단단한 아이야. 부족의 남자들보다도 낫지. 알아서 잘 해결할 것이네.”
그러자 곱슬머리 야만족은 화제를 돌리며 말했다.
“이번 성전은 정말 길군요. 벌써 몇 년째 지속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전쟁의 어디에서도 쾌락과 행복은 조금도 얻을 수 없지. 전쟁은 죽음과 슬픔을 가지고 올 뿐이다.”
사랑은 먼 곳의 하늘을 보며 말했다. 흉만부족이 전쟁을 일으킨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투였다.
곱슬머리 사내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말했다.
“최근 부락 근처에서 흉만의 야만족이 자주 발견되고 있어 주의를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미친 늑대는 때로 맹호보다도 무섭기 마련이니까요.”
사랑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네. 내가 부족원들에게 최대한 그들을 건드리지 않게 조심하라고 일러두겠네.”
그때, 언덕을 내려가려던 두 사람의 눈에 먼 곳에서 일어나는 자욱한 먼지구름이 보였다. 그것은 부락 쪽으로 곧장 다가오고 있었다.
“저것은….”
좋지 않은 예감을 느낀 곱슬머리 사내가 몸을 흠칫 떨었다.
곱슬머리 사내보다 눈이 더 좋은 사랑은 시력이 미치는 곳까지 멀리 바라보았고, 먼지구름 사이에서 수십 기의 기병과 뒤따라오는 수많은 보병을 발견했다. 그들은 흉악하게 생긴 검은 늑대가 그려진 커다란 깃발을 들고 있었다.
“큰일이군. 천랑부족이다!”
사랑이 소리치자 곱슬머리 사내가 아주 나쁜 소식을 들은 것처럼 안색이 대번에 바뀌었다.
“홀한, 서둘러 부족원들을 모아라. 저들이 좋은 의도로 온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의 말에 홀한이라고 불린 곱슬머리 사내는 급히 언덕을 뛰어 내려갔다. 곧 맑고 은은한 호각소리가 울리며 부락이 순식간에 부산스러워졌다.
잠시 후, 백오육십 명의 성년 남성 부족민이 무기를 들고 밖에 모였다. 그들은 대부분 뼈나 돌을 갈아서 만든 도끼와 창 등을 들고 있었다. 철제 무기는 거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보이던 먼지구름이 가까워졌다.
선두에서 달려오던 야만족이 탄 늑대들이 큰 소리로 울더니 부락 앞에 하나 둘씩 멈춰 섰다. 늑대를 탄 야만족은 이십여 명이었는데,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으로 미루어 모두 토템용사인 것 같았다.
이어 그들을 뒤따라온 야만족 병사들이 곱지 않은 눈빛으로 등아부족 사람들을 노려보았다.
가장 앞에 서 있던 사랑은 눈앞의 광경을 보고 표정을 일그러뜨렸다.
그의 양 옆에는 부락의 나머지 두 토템용사인 곱슬머리 사내와 귀걸이를 한 사내가 서 있었다.
“사랑, 몇 년 못 본 사이에 동굴에 숨어 밖으로 머리도 못 내미는 사막쥐가 되었군.”
천랑부족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키 크고 마른 사내가 앞으로 몇 걸음 나오더니 조롱하듯 말했다.
주위에 있는 이들보다 훨씬 강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는 그는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고수였다.
“비도, 우리 등아부족에는 무슨 일로 온 거지?”
검은색 목제 지팡이를 든 사랑이 우렁찬 목소리로 물었다.
비도라고 불린 야만족은 사랑을 위아래로 훑어보면서 차갑게 웃었다. 그는 느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는 건 귀찮으니 바로 본론을 말하겠다. 우리 천랑부족은 대제사장의 의지를 받들어 전선의 비열한 인족을 정벌하러 간다. 지금부터 너희 부락의 식량 이천 근, 고급 술 열 단지, 준마 열 필을 성전의 이름으로 징발하겠다.”
그 말을 들은 등아부족의 야만족들이 무기를 휘두르며 포효하기 시작했다. 천랑부족의 요구는 넉넉하지 않은 등아부족에게는 거의 전 재산을 내놓으라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앞쪽에 서 있던 등아부족의 한 청년이 분노에 차 소리쳤다.
“성전은 너희 흉만이 일으킨 것이니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여기서 무언가 가져갈 생각은 하지 마라!”
그러자 비도가 눈을 흉악하게 번뜩이더니 채찍을 휘둘러 그 청년의 팔을 감아 끌어당기려 했다.
그때 사랑이 앞으로 나서며 손에 든 지팡이를 휘둘렀다. 비도의 채찍이 단번에 반 토막이 났다.
뒤에 있던 등아부족의 야만족 두 명이 재빨리 다가와 쓰러진 청년을 부축했다.
비도가 미간을 찌푸렸다. 채찍이 끊어진 곳에는 그을린 흔적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사랑의 손에 쥔 지팡이에서는 은은한 검은 빛의 화염이 뿜어져 나오며 형상을 이루고 있었다.
“하하, 몇 년 못 본 사이에 무화지술(巫火之术)을 상당히 수련했나 보군. 하지만 고작 이런 얕은 수로 우리 부족의 천랑용사(天狼勇士)를 막으려 하는 것은 아니겠지?”
비도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그가 거대한 기운을 뿜어내자, 타고 있던 검은 늑대가 하늘을 보며 울부짖었다. 그러자 뒤에 있던 이십여 마리의 늑대가 따라 울었다.
뒤에 있던 보병들 역시 늑대 울음소리를 내며 한걸음 앞으로 걸어 나왔다. 그 순간 무형의 기운이 사랑을 압박해왔다.
사랑은 그것이 천랑부족이 상대의 마음을 교란시키기 위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챘다.
사랑은 지팡이를 휘둘러 부족민들 앞에 검은 빛의 장막을 만들었다.
거세게 밀려온 무형의 파동이 검은 장막에 충돌했다. 파동을 간신히 막아낸 검은 장막은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흩어져 사라졌다.
사랑은 얼굴이 살짝 붉어져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등아부락의 야만족들이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사랑을 보았다. 그러나 물러서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사랑, 주제를 안다면 우리 천랑부족과 맞서려 하지 말거라. 우리에게 물건을 건넬 것인지, 아니면 멸족을 당할 것인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라.”
그 말에 사랑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눈앞의 토템용사들을 보고 고민하던 사랑은 한참 후 천천히 말했다.
“식량 이천 근은 너무 많으니 오백 근으로 줄여주게. 술과 말은 부락에 여유가 있으니 요구대로 주겠네. 어떤가?”
그러자 등아부족의 야만족 중 상당수는 족장의 말에 분노한 표정으로 고함을 지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랑은 손을 저어 주위의 불만을 가라앉혔다.
“하하, 식량 오백 근? 지금 우리가 구걸하는 것으로 보이나? 이천 근에서 곡식 한 톨도 부족해서는 안 된다. 참, 우리 소군주께서 네놈의 딸 사교를 본 이후로 줄곧 잊지 못하고 있더군. 만약 딸을 넘긴다면, 그녀에게 첩의 지위를 하사하고 식량 징발도 면해주겠다. 너희 등아부족에게는 영광스러운 일 아닌가?”
비도가 징그럽게 웃으며 말했다.
“비도, 비록 우리 등아부족이 큰 부족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무나 능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랑은 차가운 표정으로 사납게 말했다.
그의 뒤에 있던 다른 부족민들도 분분히 무기를 들어올렸다.
“좋다. 네놈이 죽음을 원한다면 사양하지 않겠다.”
비도가 입가에 잔인한 냉소를 머금으며 손을 크게 휘저었다.
그러자 이십여 명의 기병과 뒤에 있던 백여 명의 보병이 등아부족 야만족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안으로 대피하라!”
사랑은 큰 소리로 명령을 내리며 주술을 외웠다. 그의 지팡이에서 짙은 검은색 빛이 뿜어져 나왔고, 갑자기 나타난 검은 구름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순간 구름 속에서 쏟아져 나온 수십 마리의 까마귀가 화살처럼 기병들에게 쏘아져 나갔다.
견고한 신체를 가진 토템용사들이었지만, 빠른 속도로 날아오는, 송곳처럼 날카로운 까마귀의 부리 공격은 화살보다도 더욱 위력적이었다.
미처 피하지 못한 몇몇 기병은 까마귀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늑대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그중 운이 나쁜 야만족은 눈을 공격당해서 부리가 머리 깊이까지 파고들어갔다. 그 토템용사는 비명을 지르며 쓰러져서 발버둥 치다가 곧 숨이 끊어졌다.
이어 사랑이 큰 소리로 주문을 외우자, 부락 내의 어디에선가 갑자기 검은 빛이 치솟더니 순식간에 그의 체내로 흡수됐다.
곧 사랑의 몸에서 검은 빛이 솟구쳐 나와 은은한 까마귀의 형상을 이루었고, 그가 들고 있던 지팡이는 붉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사랑의 얼굴은 붉은 빛이 비쳐서 불그스레해졌다.
사랑이 크게 소리를 지르며 지팡이를 창처럼 찌르자, 지팡이는 달려오던 기병의 가슴을 뚫고 나왔다.
그때 또다시 두 줄기의 빛이 부락에서 솟아오르더니, 등아부족의 다른 두 토템용사의 몸으로 흡수됐다. 그러나 그 빛은 사랑의 몸에 들어간 빛에 비해서는 훨씬 옅었다.
두 야만족 역시 몸에서 검은 빛을 뿜어내기 시작했고, 이때 붉은 빛을 발하는 그들의 무기는 공격력이 크게 증가했다.
세 토템용사는 등아부족의 다른 부족원들과 힘을 합쳐 방어선을 구축했다. 그 결과 일반 부족원이 스무 명 정도 희생되긴 했으나, 가까스로 적의 진격을 막아냈다.
이를 본 비도는 크게 분노했다. 기병들은 그의 사병이나 마찬가지였다. 한 명이라도 죽으면 엄청난 손실이었다.
비도가 크게 포효하자 그의 손에서 검은 빛이 번개처럼 빠르게 쏘아져 나갔다.
철추를 휘두르는 후천중기의 기병과 격렬하게 싸우고 있던 사랑은 갑자기 가슴에 통증을 느꼈다. 그는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숙여 내려다보았고, 곧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의 가슴에는 어느새 커다란 구멍이 뚫려 있었다. 상처는 까맣게 타 들어간 상태였다.
퍽!
사랑이 움직임을 잠시 멈춘 사이, 어느새 날아온 철추가 그의 몸을 가격해 날려버렸다.
“족장님!”
곱슬머리 사내가 다급히 소리쳤다.
그러나 곱슬머리 사내가 잠시 한눈을 판 순간, 독사처럼 다가온 검은 창이 그의 목을 꿰뚫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선혈이 쏟아져 나와 바닥을 적셨다.
이로써 대세는 기울어졌다. 등아부족의 마지막 남은 토템용사마저 얼마 버티지 못하고 적들의 창에 온몸을 꿰뚫리고 말았다.
비록 천랑부족도 기병을 몇 명 잃었지만, 전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사랑과 두 토템용사가 쓰러지자 기병들은 등아부족의 방어선을 가볍게 뚫고 일반 부족민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살아 있는 놈들을 다 잡아 죽여라!”
비도가 백여 명의 보병을 직접 이끌고 부락 안으로 돌진했다.
곧 피의 비가 등아부락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