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폐허
석목 일행은 하늘이 어두워질 즈음 부락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석목이 탄 사불상의 안장에는 노루와 비슷하게 생긴 괴수 한 마리가 걸려 있었다.
석목은 달걀만한 노란 구슬을 손에 들고 자세히 관찰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마치 돌 같이 생겼는데, 기이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그는 노란 구슬을 주머니에 넣어 허리춤에 걸고, 주위 사람들에게 웃으며 감사를 표했다.
“여러분의 도움 덕분에 훈장수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이날 훈장수를 잡기 위해 일행은 상당히 많은 공을 들였다.
사성이 활짝 편 가슴을 손으로 두드리며 큰 소리로 말했다.
“친구를 돕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런 말 할 필요 없어요.”
그러나 옆에서 말을 타고 따라오는 사교의 얼굴에는 쓸쓸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석목은 그런 그녀를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쉴 뿐, 말을 걸지는 않았다.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일행은 금세 부락의 근처에 도착했다.
그때 석목이 눈을 찌푸렸다. 뛰어난 시력으로 멀리 떨어진 부락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불길함을 감지한 석목의 표정이 급격히 가라앉았다.
석목을 몰래 살피던 사교가 가장 먼저 그의 표정 변화를 알아챘다. 그녀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목 오라버니, 무슨 일이죠?”
석목은 무거운 표정으로 말했다.
“부락의 상황이 심상치 않습니다. 속도를 올리죠.”
석목의 말에 놀란 일행은 부락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에는 부락의 상황이 전혀 보이지 않았지만, 석목의 무거운 표정을 보고 급히 속도를 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냇물의 상류에 도착한 일행은 모두 놀라서 그대로 넋이 나갔다.
그곳에 등아부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부락이 있던 곳은 이미 폐허가 된 후였다. 시냇물의 양쪽에 세워져 있던 천막들은 모조리 불타 쓰러졌고,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무너진 천막 사이에는 시체와 무기들이 어지럽게 널려 있었다. 노인과 아이, 등아부족 전사 등 익숙한 얼굴들이 모두 차가운 시체가 되어 있었다.
아주 잔인하게 손을 쓴 듯 상당수 시체가 토막이 나 있었고, 바닥이 피에 흥건히 젖어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다.
석목과 함께 사냥을 나섰던 야만족들은 비명을 지르며 폐허가 된 부락으로 달려갔다.
“아버지… 오라버니…!”
“동생아!”
“흑흑… 안 돼, 이건 꿈이야….”
그들은 울부짖으며 폐허 사이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찾기 시작했다.
석목은 얼굴이 종이처럼 창백해져서 몸을 흠칫 떨었다.
눈앞의 아수라장에 놀란 듯 사불상이 불안하게 울며 발굽으로 흙을 헤집었다.
전쟁을 겪으며 살육과 피에는 익숙해진 석목이었지만, 마치 가슴을 에는 것 같은 통증이 밀려왔다.
바로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그는 이 부락에서 열정적이고 소박한 야만족들과 먹고 마시며 춤과 음악을 즐겼다.
그들은 비록 가난했지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이들이었고, 아신의 비호 아래 다음 해에는 더 나은 생활을 할 수 있기를 꿈꾸고 있었다.
석목은 두 주먹을 꽉 쥐며 눈을 감은 채 깊은 호흡을 했다. 그의 표정은 곧 평온을 되찾았지만, 두 눈은 더욱 매섭게 빛났다.
사불상에서 뛰어내린 석목은 부락 쪽으로 가지 않고 고개를 숙여 땅을 보았다. 땅에는 사람과 늑대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었다.
석목은 발자국을 따라 몇 걸음 걸어가다가 고개를 들어 앞을 보았다.
황무지의 바닥은 매우 단단했지만 어렴풋이 알아볼 수 있었다. 백여 명이 넘는 인원이 동남쪽 방향에서 다가왔다. 그리고 그들이 왔던 방향으로 돌아갈 때는 그 수가 두 배 가까이 늘어나 있었다.
석목은 눈을 차갑게 번득였다. 그리고 몸을 홱 돌려 부락을 향해 걸어갔다.
사교와 사성, 야만족들은 여전히 비통한 표정으로 이곳저곳을 헤집고 있었다.
열악한 황무지에서 자란 야만족은 어려서부터 강인한 성격을 지녔으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치욕스러운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이들은 지금 참을 수 없는 슬픔에 잠겨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들에게 다가가 위로하려던 석목은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어떤 말도 지금 그들 앞에서는 소용이 없을 것 같았다.
그때, 흐느끼는 소리와 함께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아버지…!”
석목은 눈을 빛내며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달려갔다.
소리가 난 곳은 부락의 중앙에 위치한 광장이었다. 바로 어젯밤 축제와 만찬을 즐겼던, 아신의 제단이 세워져 있는 곳이었다.
아신의 조각상은 산산이 부서져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그리고 파괴된 제단 앞에 세워진 십자가에는 온몸에 상처를 입은 한 야만족 사내가 못 박혀 있었다.
바로 등아부족의 족장 사랑이었다.
사랑의 상처는 극심했으나 얼굴에는 아직 혈색이 남아 있었다. 사교는 사랑을 끌어안고 목 놓아 절규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사성이 급하게 달려왔다. 그는 어디선가 부러진 칼을 찾아와서 그것으로 아버지를 십자가에서 구해내려고 했다.
그러나 사랑의 사지는 뼈를 꿰뚫은 강철못으로 십자가에 강하게 박혀 있는 상태였다.
사성은 어떻게 해야 아버지를 더 다치지 않게 구할 수 있을지 몰라서 안절부절 못했다.
그때 달려온 석목이 사교의 손을 잡아 끌면서 말했다.
“상처가 깊습니다! 그렇게 흔들면 안 돼요!”
석목이 숙연한 표정으로 소리치는 말을 듣고 사교의 몸이 순간 굳었다.
석목은 사교를 옆으로 비키도록 하고, 사성에게도 경거망동을 하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그리고 운철흑도를 뽑아 든 뒤 십자가 주위를 한 바퀴 돌며 관찰했다.
이윽고 석목이 팔을 휘두르자 십자가가 검은 검광에 휩싸이더니 사랑의 몸이 떨어졌다. 그의 손발을 꿰뚫고 있던 강철못이 깔끔하게 절단된 것이다.
석목은 칼을 거두며 두 팔로 사랑의 몸을 받아냈고, 그를 조심스럽게 바닥에 눕혔다.
“아버지!”
사교가 달려와 사랑의 품에 뛰어들었다. 사성도 손에 쥐고 있던 부러진 칼을 내던지고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석목은 무거운 표정으로 사랑의 목에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진기를 살짝 흘려보내서 그의 몸 상태를 확인했다.
사교 남매는 옆에서 그 광경을 보며 그저 애를 태울 뿐이었다.
잠시 후, 석목은 어두운 표정으로 손가락을 거두었다.
“오라버니, 아버지는….”
사교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내장이 여러 군데 파열됐고 외상 역시 심각한 수준입니다. 지금까지 버틴 것만도 기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 능력으로는 살릴 수 없어요.”
석목은 침울하게 말했다.
그 순간 사교는 온 몸에 힘이 빠지는 것을 느끼며 그 자리에 쓰러졌다.
“누나!”
사성이 화살처럼 달려가 쓰러지는 사교를 부축했다.
두 남매를 보며 잠시 생각하던 석목이 말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으니 잠시 정신을 차리게 할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깨어난 뒤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숨을 거둘 것입니다.”
석목이 한숨을 쉬며 말을 이었다.
“만약 정신을 들게 한다면… 아마 일각도 버티지 못할 것입니다. 어떻게 할 것인지는 두 사람이 결정을 하세요.”
사교는 몸을 흠칫 떨며 사성을 한 번 바라보더니, 사랑의 손을 꽉 잡고 고개를 숙였다.
잠시 그대로 침묵하던 사교가 다시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고여 있는 그녀의 두 눈에는 증오가 가득 차 있었다.
사교는 또박또박 말했다.
“아버지를 깨워주세요. 대체 누가 우리 부족민을 죽이고 부락을 불태웠는지 들어야겠습니다.”
옆에 있는 사성도 눈물이 채 마르지 않았지만 강인함이 서려 있는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사교와 사성을 번갈아 바라본 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품속에 있는 병에서 꺼낸 흰 단약을 사랑에게 먹였다. 이어 사랑의 이마에 회춘부를 붙이고 주문을 외웠다.
곧 회춘부가 녹색 빛을 발산하더니 사랑의 몸을 감쌌다.
사랑의 몸에 나 있던 일부 상처가 천천히 회복되기 시작하더니, 혈색이 약간 회복됐다. 그러자 사교와 사성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목이 눈을 금빛으로 반짝이며 사랑의 가슴과 아랫배의 혈을 짚었다. 그러자 그의 천상진기가 사랑의 체내로 천천히 흘러들어갔다.
사랑이 몸을 떨더니 호흡이 점점 거칠어졌다. 그는 기침을 하며 피를 한 움큼 토해내고 나서 천천히 눈을 떴다.
그는 날이 저물기 직전에 저녁노을이 반짝이는 것처럼, 죽음을 앞두고 잠시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아버지!”
사교와 사성이 급하게 달려왔다.
석목은 묵묵히 자리에서 일어나 옆으로 자리를 피해주었다.
“사교야, 사성아… 무사해서… 정말… 정말 다행이구나….”
사랑은 힘겹게 고개를 돌려 두 자녀를 보더니, 안도하는 표정으로 힘없이 말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부족원들이 사랑의 목소리를 듣고 몰려왔다. 그들 모두 침통한 표정에 손이 비어 있는 것을 보니 다른 생존자를 찾지 못한 것 같았다.
“아버지, 도대체 누가 이런 거죠?”
사교가 사랑의 손을 잡으며 원망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사랑의 표정이 다시 어두워졌다. 그가 천천히 말했다.
“너무 강대한 적이다… 너희들은 대적할 수 없으니… 복수할 생각은 하지 말거라….”
“우리는 두렵지 않습니다! 우리 등아부족의 용사 중에 겁쟁이는 없어요!”
옆에서 지켜보던 한 야만족 청년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다른 야만족들도 분노해서 외치기 시작했다.
“우리는 복수를 원합니다! 핏값은 피로 받겠습니다!”
사랑은 격앙된 부족원들을 보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사랑 역시 복수를 원했다. 그러나 천랑부족은 너무 강대했다. 복수를 시도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그때 사성이 말했다.
“아버지, 천랑부족이 벌인 짓이지요?”
사성의 말에 사랑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사성이 천천히 자신의 손을 폈다. 그의 손에는 두껍고 긴 회색늑대의 털이 쥐여져 있었다.
지켜보던 석목은 얼굴을 찌푸렸다. 그는 이곳에 온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부족원들에게 주위의 부족 세력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천랑부족은 반경 오백 리 안에서 가장 세력이 크고 강력한 흉만부족이었다. 그들은 살육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야만족들은 모두 분노한 표정을 지었다. 어깨를 부들부들 떨며 고개를 치켜든 사교의 눈에는 깊은 원한이 서려 있었다.
그러자 사랑이 숨을 깊게 들이마시더니 말했다.
“사교야, 등아부족 제사장의 이름으로 족장의 지위를 네게 넘기겠다. 오늘 이후로 너는 부족원의 안위를 지키는 것을 소임으로 여기도록 하고, 네 동생을 잘 보호하도록 해라…. 아신에게 영혼의 맹세를 하건데, 만약 천랑부족에게 복수를 하려 한다면 내 영혼은 영원한 고통에 빠져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그의 말에 사교가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아리따운 몸을 떨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교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안 돼요… 아버지, 그러지 마세요….”
사랑은 힘겨운 듯 가슴을 한 번 들썩이더니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사교야… 이것은 내가 등아부족의 족장으로서, 그리고 네 아버지로서 마지막으로 하는 부탁이다…. 나의 유언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냐?”
사랑의 말을 듣고 사교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 바람에 그녀의 입가에서 선혈이 흘렀다.
그녀는 고개를 숙이며 천천히 말했다.
“알겠습니다, 아버지. 약속할게요.”
사랑은 그제야 안심한 듯, 힘겹게 손을 뻗어 사교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웃음을 지었다.
사랑이 주위의 젊은 야만족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너희도 마찬가지다. 우리 야만족의 황무지는 긴 세월 동안 약육강식의 법칙을 따랐다. 해마다 무수히 많은 부락이 사라지고 생겨나지. 등아부족이 전멸하는 것 역시 특별한 일이 아니다. 너희가 앞으로 잘 지내야만 내가 구천에서도 미소를 지을 수 있을 것 같구나.”
사랑의 말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유창해졌으나, 그와 반대로 안색은 점점 핏기 없이 투명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야만족들은 복수를 말리는 사랑의 말이 그리 달갑지는 않은 듯했지만, 결국 흐느끼며 잇따라 대답했다.
“목 용사님.”
사랑은 고개를 돌려 이번에는 석목을 불렀다.
“네, 족장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