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복수
석목은 몇 걸음 다가가서 한쪽 무릎을 꿇고 사랑에게 얼굴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그러자 사랑은 갑자기 숨을 깊이 들이키더니, 주먹 절반만한 크기의 검은 뼛조각을 입에서 뱉어냈다. 그리고 부들거리는 팔로 그것을 석목에게 건넸다.
석목은 착잡한 표정으로 뼛조각을 받았다.
“목 용사님, 이 안에는 고대부터 전승되어온 무법(巫法)과 토템비술이 담겨 있습니다. 살아남은 부족원 중에는 무법의 소질을 가진 자가 없으니 목 용사님에게 맡기겠습니다. 비록 진귀한 물건은 아니지만… 등아부족에서 가장 귀중한 물건입니다.”
사랑은 말을 마치고 창백한 얼굴로 숨을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뼛조각을 받아 든 석목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가 천천히 물었다.
“이것을 저에게 주신 것은 무언가 부탁하실 일이 있기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남은 아이들은 더 이상 이곳에서 거주할 수 없습니다. 그들이 외삼촌에게 몸을 의탁할 수 있도록 서남쪽 사막에 위치한 도곽(图霍)부락까지 안전하게 데려다주세요.”
사랑은 간절하게 바라는 눈빛으로 석목을 보며 말했다.
석목은 살짝 복잡한 표정이 되었다가, 뼛조각을 손에 쥐고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시선을 돌려 폐허로 변한 부락과 잔혹하게 훼손된 시체들을 보았다. 눈앞에 펼쳐진 모든 광경이 마치 못처럼 그의 가슴을 찔렀다.
이윽고 석목이 시선을 거두고 정중히 말했다.
“안심하세요. 반드시 안전하게 데려다주겠습니다.”
그의 말에 사랑이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나 눈의 생기는 더욱 줄어들어 있었다.
석목이 말했다.
“족장님에게 따로 물어볼 것이 있으니, 모두 잠시 자리를 비켜주시겠습니까?”
석목의 말에 사랑이 그를 바라보며 입술을 달싹였다.
주위의 사람들도 미간을 찌푸리기 시작했다.
이제 사랑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다. 그렇기에 다들 이 소중한 시간을 사교와 사성에게 남겨줘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석목은 표정을 바꾸지 않고 다시 한 번 말했다.
“제가 묻고자 하는 것은 시간이 많이 필요하지 않으니, 잠시면 됩니다.”
부족민들은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어찌할 줄 몰라 하다가, 결국 사교에게 시선을 돌렸다.
사교는 석목과 사랑을 번갈아 본 뒤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
“그렇다면… 최대한 짧게 얘기해주세요.”
그리고 그녀는 사성을 데리고 멀리 떨어진 곳으로 갔다. 나머지 부족민들도 그녀의 뒤를 따랐다.
이제 그 자리에는 석목과 사랑 둘만 남았다.
석목은 한숨을 쉰 후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사 족장님, 방금 부락의 밖에서 흔적을 찾았습니다. 이곳으로 온 사람들의 발자국보다 부락을 떠난 사람들의 발자국이 상당히 많더군요. 게다가 아직 자세히 본 것은 아니지만, 현장에는 부녀자와 아이의 시체가 매우 적어요. 분명 천랑부족에게 끌려간 것이겠죠?”
석목의 말을 들은 사랑이 몸을 흠칫 떨더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정말 예리하군요. 맞습니다. 부족민들조차 지키지 못해 천랑부족에게 끌려가게 두다니, 모두 제가 무능한 탓이지요….”
감정이 격해진 사랑이 격렬하게 헐떡였다.
그러자 석목은 재빨리 손을 뻗어 사랑의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다 댔다. 정순한 진기를 주입하자 격렬한 호흡이 곧 정상으로 돌아왔다.
사랑은 가슴을 들썩이며 의아한 눈빛으로 석목을 보았다.
“천랑부족 사람들은 이미 반나절 전에 이곳을 떠났을 테지만, 부녀자와 아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바닥에 바퀴자국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보아 도보로 그들을 후송하는 중이겠죠. 따라서 이동하는 속도가 빠르지 않을 테니 지금 출발한다면 늦지 않을 겁니다.”
손을 거둬들인 석목은 잠시 숨을 돌리고 말을 이었다.
“성대한 환대를 받은 것에 대한 보답으로 그들을 구출해오겠습니다.”
석목의 말을 들은 사랑은 복잡한 표정으로 입을 절반 정도 열었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그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석목이 천천히 말했다.
“지면의 흔적을 보면 천랑부족의 수는 백 명이 넘는 것 같지만, 토템용사가 몇 명 있는지, 그리고 그들의 실력은 또 어느 정도인지 구체적인 판단을 내릴 방도가 없습니다. 무모하게 덤볐다가는 승산이 낮아지니, 사랑 족장님이 설명해주셨으면 합니다.”
사랑은 석목의 눈을 깊게 쳐다본 후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호의에 감사합니다. 하지만 천랑부족의 수가 많아 사교와 부족민들을 보내는 것도 말리는 마당에, 어떻게 외부인을 연루시킬 수 있겠습니까.”
“저는 경솔한 사람도 아니고,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도 아닙니다. 자신의 분수를 잘 아는 편이죠. 그리고 족장님도 부족의 부녀자와 아이들이 천랑부족의 손에 떨어져 치욕을 당하는 것을 원치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석목의 말에 사랑은 크게 감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저 역시 더 이상 사양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적의 현황을 자세하게 설명해주세요.”
석목은 숙연한 표정으로 한동안 사랑의 말을 경청했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석목이 멀리 떨어져 있던 이들에게 손짓을 했다.
그 사이 사랑의 안색은 더욱 나빠져 있었다. 이제 그의 얼굴에는 혈색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누가 보더라도 사랑의 생명이 다하기 직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사교가 달려와 사랑에게 안겼다.
“아버지!”
“사교, 앞으로 모두를… 너에게 맡기겠다….”
사랑은 숨을 헐떡이며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려 사랑하는 딸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만지려 했다. 그러나 곧 절반 정도 올린 팔을 힘없이 떨어뜨리며 결국 숨을 거두었다.
사교와 사성이 대성통곡을 했다. 주위의 야만족 청년들은 눈물을 억지로 참으려 했지만, 그들 역시 흐느끼고 있었다.
석목은 그들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몸을 돌려 묵묵히 부락 밖으로 걸어갔다.
사불상이 있는 곳에 도착한 석목은 방금 사랑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리며 허리에 찬 파천궁을 만지작거렸다.
잠시 후, 석목은 숙연한 표정으로 사불상에 올라탔다. 그리고 발자국의 흔적을 따라 이동하려 했다.
그때 부락에서 달려 나온 사교가 석목을 불렀다.
“목 오라버니.”
석목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고삐를 당겼다.
사교가 석목을 보며 말했다.
“천랑부족을 쫓아가서 포로로 잡혀간 이들을 구해오려는 것입니까?”
석목은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짧게 침묵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먼 곳을 바라보며 말했다.
“성공할 수 있을지는 저도 확신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시도조차 하지 않는다면 분명 후회가 남을 것입니다.”
사교가 이를 꽉 깨물더니 입술을 움직여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석목은 그녀의 말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당신들의 실력으로는 짐이 될 뿐입니다. 함께 간다면 성공할 수 있는 일말의 가능성조차 없어질 것입니다.”
석목은 계속 말을 이었다.
“족장님과 부족민들을 안장하고 기다리도록 하세요. 이틀 후에는 성공 여부와 상관없이 돌아올 겁니다.”
말을 마친 석목은 고개를 다시 돌렸다.
석목이 고삐를 흔들자 사불상이 울음소리를 내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사교는 석목이 멀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 * *
등아부락에서 십 리쯤 떨어진 곳에 위치한 울퉁불퉁한 언덕지대.
이백여 명의 야만족 대열이 그곳을 지나고 있었다.
대열의 가장 앞에는 이십여 명의 기병이 있었고, 그들 뒤로 백여 명의 야만족 보병이 따르고 있었다.
그리고 가장 뒤에는 등아부족의 부녀자와 아이들, 그리고 크고 작은 가축들이 있었다. 가축들은 마른 고기 등 식량과 술항아리를 등에 싣고 있었으며, 그 양은 상당히 많았다.
여인들과 아이들은 밧줄에 줄줄이 묶인 채였다. 그들은 두려움에 찬 표정으로 찍소리도 없이 그저 묵묵히 앞으로 걸었다.
이들은 등아부족을 학살하고 강탈한 물건을 가득 싣고 돌아가는 천랑부족의 행렬이었다.
포로와 가축들의 움직임이 느렸기 때문에 대열의 행군 속도는 빠르지 않았지만, 그들은 움직임을 재촉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무리의 가장 앞쪽에는 거대한 늑대에 올라탄 비도가 득의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등아부족을 몰살하고 빼앗은 물자는 그가 상상한 것 이상으로 많았다. 물론 천랑부족도 어느 정도 피해를 입긴 했지만, 이 정도의 식량과 포로라면 족장은 질책은커녕 오히려 포상을 내릴 것 같았다.
다만 소군주가 원했던 사교를 붙잡지 못한 것이 유일하게 아쉬운 점이었다.
주위의 몇몇 측근이 비도의 기분이 좋은 것을 눈치 채고 아첨하기 시작했다.
“정말 용감무쌍하십니다. 반년 사이에 벌써 다섯 번째 부락입니다.”
“이 정도 성과를 낼 수 있는 사람은 부족 전체를 통틀어도 몇 사람 되지 않을 것입니다.”
“족장님께서 약속했던 도통(都统) 관직을 미리 제수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비도는 이들이 기회를 틈타 자신에게 아첨하는 것을 알고 있었으나, 듣기 에 나쁘지는 않았다. 그는 웃으며 자화자찬을 했다.
“하하, 이 몸이 나섰으니 이런 작은 부족을 처리하는 것 정도야 식은 죽 먹기지.”
그때 옆에서 조용히 있던 한 토템용사가 갑자기 입을 열어 물었다.
“어르신, 저는 도통 이해가 안 됩니다. 듣기로는 전선에서 인족과의 싸움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하던데, 족장님은 어째서 식량을 조달하라는 명령을 하신 것일까요?”
비도가 차가운 눈빛으로 힐끗 보자, 그 토템용사는 목을 움츠리며 입을 다물었다.
비도 역시 그와 같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족장이 직접 명령한 것에 대해 감히 연유를 물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본래 살육을 즐기는 그로서는 이런 명령은 언제나 대환영이었다.
바로 그때, 대열의 뒤쪽이 갑자기 소란스러워졌다. 등아부족의 포로들이 있는 곳이었다.
비도가 낯빛을 흐리며 말했다.
“가서 무슨 일인지 확인해 보거라.”
비도의 명령에 옆에 있던 덩치가 우람한 토템용사가 대답한 뒤, 즉시 늑대를 몰고 대열의 후미로 이동했다.
하루를 꼬박 걸어서 이동한 등아부족의 부녀자와 아이들은 안색이 창백했고, 흙먼지까지 잔뜩 뒤집어써서 매우 초췌해보였다. 그들의 두 발에는 피가 흐르고 있었으며, 나이가 어린 몇몇 아이는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무슨 일이냐?”
덩치가 우람한 토템용사가 크게 소리쳐 물었다.
그러자 주위에 있던 야만족 병사가 달려와 말했다.
“어르신, 노예들의 체력이 다해 더 이상 걸을 힘이 없는 것 같습니다.”
“걸을 힘이 없다라….”
덩치가 우람한 야만족이 차갑게 웃었다. 그는 눈을 흉악하게 빛내더니 채찍을 휘둘러 등아부족의 젊은 여인을 때렸다.
찰싹!
젊은 여인의 옷이 찢어지며 어깨에 선명한 채찍자국이 생겼다.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진 여인이 격렬한 통증에 몸을 벌벌 떨었다.
덩치가 큰 야만족은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등아부족과의 교전 중에 형제를 잃었다. 스무 명이 넘는 등아부족 야만족을 직접 살해한 뒤에도 아직 그 원한이 풀리지 않은 채였다.
이 여인들은 추후에 노예로 부락에 남거나 팔려갈 천랑부족의 재산이지만, 한두 대 때려서 화풀이를 하는 건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는 다시 팔을 들어 올려 채찍을 휘두르려고 했다.
바로 그때, 검은 빛이 모두의 눈앞을 지나더니 덩치 우람한 야만족의 목을 꿰뚫었다.
야만족은 마치 머리를 강하게 가격당한 사람처럼 고개를 젖히며 뒤로 날아가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는 두 손으로 목을 감싸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무언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손가락 굵기의 검은 화살이 그의 목을 꿰뚫은 것이었다.
야만족은 목에서 피를 쏟아내며 곧 숨이 끊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