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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93화 (93/916)

93화. 구출

비도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진기를 운용해 저린 팔을 회복하며 석목에게 물었다.

“귀하는 대체 누군데 우리 천랑부족을 이유 없이 습격하는 것이오?”

그러나 석목은 비도의 질문에 대답할 뜻이 전혀 없는 듯 지면을 강하게 박찼다. 바닥이 한 척 가량 깊게 파이며 그의 몸이 번개처럼 빠르게 비도의 앞에 이르렀고, 운철흑도에 새겨진 붉은 부문이 크게 빛났다.

비도는 잠시 낯빛을 흐렸으나, 곧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죽음을 자초하는구나!”

이제까지의 경험으로 판단해보면, 후천중기의 실력을 가진 상대라면 그저 힘을 강화시켜주는 토템을 새긴 것에 불과할 터였다.

비도가 크게 기합을 지르자 철추가 빛을 내며 세 개로 나뉘었다. 그것들은 석목의 머리와 가슴, 아랫배를 노리고 날아갔다.

석목이 눈을 금빛으로 반짝이며 붉게 타오르는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적색 검광이 순식간에 열세 개로 나뉘어 철추를 향해 몰아쳤다.

그 광경을 본 비도가 매섭게 소리쳤다.

“이런, 인족이었구나!”

비도는 전선에서 인족과 겨루어본 적이 있었다.

야만족의 무예는 일반적으로 간단하고 직접적이었다. 절대적인 실력으로 상대를 찍어 누를 뿐, 이런 정묘한 초식의 변화는 절대 사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비도가 스스로 연마한 무예는 잘 다듬어진 인족의 무예와는 전혀 비교가 되지 않았다.

철추와 운철흑도의 검광이 한데 뒤섞이며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열세 개의 검광은 철추를 튕겨내며 절반가량 사라졌으나, 남은 검광들은 그대로 철추의 손잡이를 매섭게 가격했다.

철추로부터 전해진 거대한 힘 때문에 비도는 하마터면 철추를 놓칠 뻔했다.

그때, 비도의 눈이 갑자기 연한 녹색으로 변하더니 괴수와 같은 차가운 눈빛을 뿜어냈다.

동시에 그의 몸이 순식간에 팽창했다. 팔다리가 거의 두 배가량 두꺼워졌으며, 손에서 파란색 털이 자라났고, 열 손가락 끝에서 날카로운 손톱이 뻗어 나왔다.

토템의 힘을 발동시킨 것이다.

순식간에 힘이 5할 정도 증가한 비도가 두꺼운 팔을 휘두르자, 철추가 검푸른 잔상을 남기며 엄청난 기세로 운철흑도 위로 떨어졌다.

하늘을 뒤흔드는 소리가 울리면서 석목이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났다.

순간 비도의 눈이 잔인하게 빛났다. 그는 기세를 몰아 석목의 머리를 철추로 으깨려 했다.

바로 그때, 석목의 입에서 흰 빛줄기가 빠르게 뿜어져 나와 비도의 얼굴을 가격했다. 기폭술이었다.

쾅!

비도의 얼굴을 뒤덮은 빛줄기가 폭발하자 선혈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기폭술은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고수에게는 그리 대수롭지 않은 공격이었다. 그러나 안면에 상처를 입히기에는 충분했다.

비도가 비명을 질렀다. 토템의 힘을 발동시킨 그의 반응속도는 매우 빨랐고, 그는 맹렬하게 바닥을 박차면서 뒤로 몸을 날렸다.

그러자 맞은편에 있던 석목도 뒤로 몸을 날리며 은색 곡도를 던졌다.

기폭술에 맞아서 눈앞이 캄캄해진 비도는 앞을 볼 수 없었지만, 청력은 그대로 살아 있었다. 자신의 정면으로 날아오는 무언가는 그 소리로 미루어 암기의 한 종류인 것 같았다.

그는 손에 쥔 철추를 휘둘러 날아오는 은색 곡도를 정확히 가격했다.

폭음과 함께 은색곡도가 폭발했고, 거대한 붉은색 버섯구름으로 변한 곡도가 지척에 있던 비도를 휩쓸었다.

월광해담의 위력을 잘 아는 석목이 차갑게 웃었다.

그러나 그 월광해담은 석목이 마지막으로 가지고 있던 한 자루였다. 야만족의 황무지에서는 이런 특수한 곡도를 만들 수 있는 사람을 찾을 수 없었다.

처량한 비명이 버섯구름 속에서 울려 퍼졌다.

이어 비도가 폭발 속에서 뛰쳐나와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는 온몸이 까맣게 타고 피범벅이 되어 원래의 모습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휙!

허공을 가르며 운철흑도가 날아갔다.

운철흑도는 비도의 등을 꿰뚫으며 그의 몸을 그대로 지면에 못 박았다.

석목은 천천히 팔을 내렸다. 그의 손아귀에서도 피가 흐르고 있었다. 방금 전 철추를 막으며 생긴 상처였다.

석목은 비도에게 다가갔다. 그는 월광해담의 폭발로 중상을 입은 데다 운철흑도에 몸을 뚫려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석목은 비도의 몸에서 운철흑도를 뽑은 뒤 그의 머리를 베어냈다.

그는 등아부락을 파괴한 주범이었다. 야만족의 풍습에 따라 망령을 추모하기 위해서는 그의 수급이 필요했다.

석목은 비도의 수급을 감싸기 위해 시체의 옷을 잘라냈다.

툭!

그러자 비도의 옷 앞섶에서 검은색 주머니가 떨어졌다. 석목은 천으로 감싼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럽게 들어올렸다.

주머니를 열어보니 그 안에는 금덩어리 한 더미와 주먹의 절반만한 검은색 원통이 들어 있었다.

야만족 황무지에서는 황금이 많이 나왔고, 그래서 금을 주로 화폐로 사용했다. 이 정도의 양이라면 상당한 금액이었다.

석목이 이전까지 가지고 있던 은표와 자산은 황무지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쉬골단 등의 수련물자와 교환한 터였다. 야만족의 황무지에서는 은표를 사용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황금이 있다면 야만족의 시장에서 보급품을 구할 수 있을 것이었다.

석목은 재빨리 황금을 챙긴 뒤 검은 원통을 집어 들었다. 특수한 금속으로 제작되었는지 손이 닿자 차가움이 느껴졌다.

그런데 원통을 관찰하던 석목의 표정이 점점 변했다.

그는 조심스럽게 원통을 뒤집었다. 뒤쪽에 손가락 굵기의 오목한 구멍이 보였다.

석목의 얼굴에 놀란 표정이 떠올랐다가 곧 기쁜 표정으로 바뀌었다. 얼핏 보고 물건을 담는 용기인 줄 알았는데, 크게 잘못 본 것이었다.

그 원통은 흑황화통침(黑蝗火筒针)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암기였다. 그가 종공밀전에서 본 기록대로라면 그 위력은 월광해담보다도 한 수 위였다.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는데, 이 암기는 단거리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발동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시간 동안 사전준비를 해야 했다.

석목은 월광해담을 전부 사용해버려서 살상력이 강한 암기가 필요했던 참이었기 때문에, 흑황화통침을 손에 넣고 그게 기뻐했다.

그러나 지금은 더 자세히 관찰할 겨를이 없었다. 석목은 원통을 조심스럽게 챙겼다. 그리고 사불상에 올라타 움직이며 길에 널브러진 시체들에서 추풍전을 하나씩 회수했다. 시체의 몸을 뒤져 금 조각도 챙겼다.

* * *

언덕 아래에서는 백여 명의 천랑부족 보병들이 먼 곳을 초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비도가 전 기병을 이끌고 적을 쫓아간 지 거의 반 시진이 지났다.

처음에는 멀리서 교전을 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지금은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마치 토템용사들이 한 입에 잡아먹히기라도 한 듯했다.

이들이 불안에 벌벌 떨고 있을 즈음, 먼 언덕에서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사람은 대열을 향해 곧장 달려왔고, 그가 점점 가까이 다가올수록 병사들의 얼굴이 점점 일그러졌다.

사불상을 타고 다가오는 그 사람은 얼굴에 가면을 덮어쓰고 있었고, 등에는 검은 도를 메고 있었다.

상황을 파악한 보병들의 안색이 창백하게 질렸다.

휙! 휙! 휙!

멀리서 여러 개의 검은색 화살이 날아왔다. 화살은 하나당 한 명, 혹은 두 명의 천랑부족 병사를 꿰뚫었다.

순식간에 열 명 이상의 천랑부족 병사들이 죽어 쓰러졌다.

“도망가!”

천랑부족의 병사들에게는 이십 명이 넘는 토템용사를 무찌른 석목을 상대로 맞서 싸울 의지가 전혀 없었다. 그들은 사방팔방으로 도주해 순식간에 사라졌다.

이제 그 자리에는 백 명 가까운 등아부족의 포로만 남아서 석목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석목이 그들에게 다가가 가면을 벗었다.

“목…목 용사님!”

그제야 석목을 알아본 여인들이 놀라 소리쳤고, 울던 아이들은 웃기 시작했다.

석목이 사불상에서 뛰어내리며 말했다.

“모두들 고생했습니다. 구하러 왔습니다.”

여인들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 곧바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리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등아부족이 몰살당하는 참상을 겪은 데다 끌려가서 노예가 될 뻔했던 신세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감사합니다! 용사님이야말로 아신이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보낸 파로특입니다!”

마음을 가라앉힌 여인들이 아이들을 데리고 석목에게 급히 예를 표했다. 그들의 표정에는 깊은 감격, 그리고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혼자 힘으로 무려 스무 명이 넘는 천랑부족의 정예 토템용사를 물리친 석목은 그녀들의 눈에 마치 신의 사자처럼 보였다.

그러나 석목은 담담한 표정으로 손을 휘저었다.

“천만에요. 가시죠. 오래 머물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부락으로 돌아가지요.”

석목은 천랑부족의 병사들이 도망간 방향을 힐끔 쳐다보며 말했다.

“목 용사님, 부락은 지금… 상황이 어떤가요?”

한 젊은 야만족 여인이 주저하며 물었다.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분분히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눈빛에는 걱정과 희망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었다.

석목은 잠시 망설이다가, 살아남은 몇몇 부족민에 대한 것과 사랑 족장이 임종 전에 남긴 이야기를 간단하게 전했다.

그러자 여인들은 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했다가 이내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석목은 그들의 표정을 보고 잠시 어리둥절했으나, 문득 깨달았다.

그들의 부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교가 새로운 족장이 되었고 눈앞에 갈 곳이 명확하게 있으니, 부족이 다시 부흥할 수 있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황무지의 열악한 환경에서 생활하는 야만족들에게 생존에 대한 희망이 있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큰 것이었다.

포로로 잡혔던 여인들은 장거리 이동과 천랑부족의 만행 때문에 상당수가 몸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석목은 물자를 일부 포기하고, 그 대신 상처 입은 여인과 아이들을 가축 위에 태운 후 등아부락으로 향했다.

며칠 후, 석목은 사교와 백여 명의 야만족을 사막에 있는 도곽부락까지 무사히 데려다 준 다음 작별을 고했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황무지에서는 사방의 모든 것이 희뿌옇게 보였다.

먼 곳에 있는 높고 낮은 언덕들이 흩날리는 모래 사이로 희미하게 드러났다.

십여 명의 야만족 기병이 모래바람을 맞으며 동쪽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말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 서쪽을 향해 나아갔다.

이 기병들은 야만족의 기준에서 봤을 때 키나 덩치가 큰 편이 아니었다. 이들은 말에 걸려 있는 뼈 무기 외에도 다양한 철제 무기를 지니고 있었다.

대열의 최전방에서는 세 명의 야만족이 나란히 이동하고 있었다.

좌우에는 키가 크고 건장한 두 야만족 사내가 있었고, 그 가운데에는 가냘픈 소녀가 자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행의 대표자는 바로 그녀인 것 같았다.

소녀는 스무 살 정도의 나이로 보였으며, 피부는 조금 까무잡잡한 편이었지만 외모는 청아하고 수려했다. 호피로 만든 저고리를 입고 있었고, 땋은 머리채가 말의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그녀의 표정에는 기개가 가득했고, 말에 타고 있는 자세도 매우 꼿꼿했다.

“지도에 의하면 이 앞은 과우(戈牛)부족의 세력인데, 돌아가는 것이 좋을까요?”

그녀의 왼쪽에 있던 눈썹이 짙고 눈이 큰 청년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아니에요. 이미 흉만 부족을 피해가느라 시간을 크게 지체했어요. 과우부족은 평만이니 인족을 적대하지는 않을 겁니다. 우리만 조심하면 문제는 없을 거예요.”

호피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녀의 표정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노련했다.

청년이 그녀에게 대답하고 고개를 돌리려 할 때, 소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냉 사형, 벌써 한참 동안이나 수원을 발견하지 못했어요. 곧 마실 물이 떨어질 것 같으니 주위의 수원을 찾아보세요.”

“하하, 걱정 마세요. 지도에 따르면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습니다. 이 주변 백 리 안에서 가장 큰 수원이지요. 잠깐 다녀오겠습니다.”

청년은 말을 타고 신속하게 대열을 벗어나더니 쏜살같이 달려 나갔다.

그가 떠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이번에는 낮은 남성의 목소리가 소녀의 귀에 들려왔다.

“공주마마, 이번 야만족과의 교섭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얼마나 될까요?”

선천고수의 기운을 뿜어내는 중년의 남성이 다가와서 물었다.

공주라 불린 소녀는 잠시 머뭇거린 뒤에 대답했다.

“전쟁을 주장하는 흉만과 화합을 주장하는 평만의 비율은 반반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야만족 대제사장의 입장이 극히 중요합니다. 장 장군은 우선 조급해하지 마세요. 성산(圣山)에 도착해서 상황을 봅시다. 야만족도 분명 해족이 어부지리를 얻는 것을 원치 않으리라 믿습니다. 하지만 설령 교섭에 성공한다 하더라도 대제국의 변경 3주는 단기간 내에 돌려받기는 어려울 겁니다.”

낮은 목소리로 대답한 장 장군은 손에 든 양날도끼를 꽉 쥘 뿐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고삐를 늦추고 앞으로 나아가며, 소녀는 무슨 생각을 하는 듯 뿌연 하늘을 바라보며 눈을 반짝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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