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오해
잠시 후, 몸을 일으킨 석목은 고요한 호수를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등아부족의 사람들과 헤어진 지도 벌써 한 달 가까이 됐다.
처음에 석목은 낮에는 수련을 하고 밤에는 길을 재촉했다.
사랑이 구렁이 쓸개를 정제해 만든 특제 술을 마신 덕분에 석목은 드디어 반야천상공 6단계에 올랐고, 육신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이제 한 단계의 심법만 오르면 후천후기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보다 최대한 빨리 열사부족에게 가서 토템비술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토템 저주의 발작이 점점 잦아지는 것으로 보아 저주를 억제하는 외뿔 살무사 정혈의 효과가 점차 떨어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석목은 최대한 빨리 열사부족에 도착하고자 최근에는 거의 밤낮으로 쉬지 않고 길을 재촉했다.
바로 그때, 석목의 표정이 살짝 변하며 귀가 쫑긋 움직였다.
오아시스의 앞쪽에서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누군가 전투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석목은 무거운 표정으로 사불상의 등에서 운철흑도와 파천궁을 챙겼다. 그리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다가갔다.
몇 백 장을 걸어가니 소리가 점점 커졌다. 충돌음뿐만 아니라 분노에 찬 외침, 고통에 찬 신음소리도 들렸다.
수풀을 가로지르자 석목의 눈앞에 공터가 나타났다. 그는 관목 뒤에 몸을 숨긴 채 전방을 보았다.
전방의 공터에는 일고여덟 명의 야만족과 호피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격렬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석목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소녀는 야만족처럼 꾸미고 있었지만, 정묘한 검법을 사용하는 인족이었기 때문이다.
그 역용술(易容術)은 정말 감쪽같아서, 석목처럼 놀라운 시력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면 쉽게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소녀가 들고 있는 삼 척 길이의 장검은 흰색 한기를 뿜어내고 있었는데, 검을 휘두를 때마다 은색 검영이 투명하게 반짝이며 그녀의 몸 주위로 구(球)형 검막을 형성했다. 그 모습은 마치 눈덩어리 같았다.
주위에 있는 야만족은 모두 후천중기의 토템용사로 보였다. 푸른색 장도를 휘두르는 그들의 움직임은 마치 살쾡이처럼 민첩했다.
그러나 그들이 어떤 공격을 퍼부어도 소녀의 검막은 뚫리지 않았다.
소녀는 옷에 피가 많이 묻어 있는 데다 안색이 창백한 것으로 보아 이미 상처를 입은 것 같았다.
주변의 바닥에는 이미 세 명의 야만족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시체들은 목에 난 상처를 제외하고 다른 상처는 없는 걸 보니 모두 일격에 사망한 듯했다.
한편 소녀의 검법은 매우 정묘했지만, 점점 체력의 한계에 다다르고 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야만족들은 그녀를 포위한 채 공격을 퍼부었지만, 무모하게 달려들지는 않았다. 그 대신 그녀의 체력을 지속적으로 소모시키려 했다.
이 광경을 본 석목은 전혀 망설임 없이 등 뒤의 파천궁을 뽑아들었다.
그때 소녀의 눈빛이 살짝 흔들리더니 얼굴이 갑자기 붉어지며 거듭 기침을 토해냈다. 그녀가 휘두르던 검이 불안정해지면서 매끄러운 검막에 드디어 빈틈이 드러났다.
덩치 큰 야만족이 그 빈틈 사이로 푸른 장도를 빠르게 휘둘러 소녀의 목을 노렸다. 그녀의 머리를 일격에 날릴 기세였다.
그 순간 소녀가 눈빛을 빛내며 야만족의 도를 검으로 찔렀다.
깡!
그녀의 검은 야만족의 장도를 쉽게 두 동강냈다. 상당한 명검인 것 같았다.
소녀는 멈추지 않고 다시 한 번 검을 찔렀다. 그 속도가 눈으로 쫓기 힘들 정도로 빨라서 그저 서늘한 빛만 어렴풋이 보였다.
도를 쥐고 있던 야만족의 팔이 잘려 하늘로 솟아올랐고, 동시에 그의 목에 붉은 선이 생겨났다. 야만족은 목을 움켜잡고 비틀거렸고, 뒷걸음질을 치다가 공기가 새는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아몽!”
야만족들은 분노했지만, 감히 복수를 위해 달려들 엄두는 내지 못했다. 그저 더욱 힘차게 도를 휘두르며 소녀를 계속 압박하는 게 전부였다.
커다란 야만족을 처치한 소녀는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피를 토하며 움직임을 멈췄다. 체내의 상처가 도진 듯했다.
그러나 방금 전의 상황에서 교훈을 얻은 야만족들은 무모하게 덤비지 않았다. 시간을 들여 소녀를 천천히 죽음으로 몰아넣으려는 심산이 분명했다.
바로 그때 파공성이 울렸다.
멀지 않은 곳에서 검은 빛이 밤하늘의 번개처럼 빠르게 날아오더니 한 야만족의 가슴에 박혔다.
야만족 사내의 몸은 거대한 것에 부딪히기라도 한 것처럼 뒤로 튕겨나갔다. 그가 커다란 나무에 부딪히자 나무가 크게 흔들리고 나뭇잎이 떨어졌다.
그의 가슴을 꿰뚫은 검은색 화살이 나무에 깊게 박혀 흔들렸다.
야만족 사내는 입을 크게 벌리고 공포에 찬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격에 급소를 꿰뚫린 그는 비명소리조차 내지 못했고, 몇 번 경련을 일으키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그 광경을 목격한 야만족과 소녀는 모두 크게 놀랐다. 그들이 다시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두 줄기의 검은 빛이 다시 날아왔다. 육안으로는 그것의 정확한 궤적을 파악할 방도가 없었다.
“으악!”
화살에 가슴을 관통당한 두 야만족이 단말마의 비명과 함께 멀리 날아가서 절명했다.
쉬익!
화살 하나가 다시 날아왔다. 뱀의 눈처럼 빨간 눈동자를 가진 야만족이 푸른 장도로 호선을 그리며 화살을 막아냈다.
붉은 눈의 야만족은 자신도 모르게 한 걸음 뒤로 물러나며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화살은 번개처럼 빠른데다 엄청난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멍청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것이냐! 결도진(结刀阵)을 펼쳐 공격을 막아라!”
붉은 눈의 야만족이 큰 소리로 외쳤다.
그러자 남은 야만족들도 정신을 차렸다.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서로 등을 맞대고 원을 만들었다.
네 야만족이 장도를 휘둘러 푸른색 회오리를 일으키며 사방을 물 샐 틈 없이 방어했다.
쉬익!
검은 화살이 다시 날아왔다. 이번에도 빠른 속도였다.
그러나 날아온 화살은 검광의 회오리와 충돌한 순간 토막이 나서 바닥에 떨어졌다.
그 사이에 붉은 눈의 야만족은 몰래 손을 움직였다. 그는 허리춤에서 주먹만 한 크기의 전갈을 꺼내서 석목이 몸을 숨긴 곳을 향해 날렸다.
한편 야만족의 압박에서 벗어난 소녀는 비틀거리며 뒤로 물러나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야만족이 전갈을 날리는 것을 얼핏 본 그녀는 놀란 표정으로 주의를 주려고 했다.
바로 그때, 붉은 빛이 반짝이더니 반으로 절단된 검은색 전갈이 야만족 쪽으로 다시 날아왔다. 바닥에 떨어진 전갈은 잠시 꿈틀거리다가 움직임을 완전히 멈췄다.
붉은 눈의 야만족이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소녀의 수려한 얼굴에도 놀라움이 떠올랐다.
그들의 얼굴에서 놀라움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 푸른 화살이 번개처럼 날아왔다. 목표는 바로 붉은 눈의 야만족이었다.
붉은 눈의 야만족은 이번에 날아온 화살의 색이 다른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그는 진법에 매우 자신이 있는 듯, 다시 한 손으로 허리춤의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며 무언가를 준비했다.
그때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다가온 푸른 화살이 종이에 구멍을 내듯 검광의 회오리를 가볍게 뚫어버렸다.
놀란 붉은 눈의 야만족은 도를 휘둘렀다. 순간적으로 열 개가 넘는 푸른 검영이 만들어지면서 그의 몸 앞을 막았다.
퍽!
화살과 부딪힌 푸른 검영이 맥없이 흩어져 사라졌다. 그럼에도 푸른 화살은 속도가 전혀 줄어들지 않았고,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는 붉은 눈의 야만족의 가슴을 그대로 꿰뚫었다.
“추…추풍….”
야만족은 몇 마디를 겨우 내뱉은 뒤 거대한 힘에 밀려 뒤로 날아갔다. 십 장 가까이나 날아가서 바닥에 내팽개쳐진 그는 그대로 즉사했다.
그 광경을 본 야만족 사내들은 크게 놀라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쉬익! 쉬익! 쉬익!
푸른빛이 달아나는 야만족을 쫓았다. 야만족들은 겨우 이십 장 정도밖에 달아나지 못하고 전부 화살을 맞고 죽었다.
야만족들이 쓰러지자 소음이 전부 사라지며 주위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부전?”
소녀는 흔들리는 눈빛으로 화살에 새겨진 부문을 보며 중얼거렸다.
잠시 후, 관목 속에서 석목이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댄 채로 걸어 나왔다.
그의 옷은 전갈 때문에 크게 찢어져 있었으며, 눈에는 여전히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방금 전의 그 검은 전갈은 후천초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라면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지만, 놀라울 정도로 속도가 빨랐다. 석목이 뛰어난 시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면 자칫 위험할 뻔했다.
까맣게 빛나는 전갈의 꼬리에는 한눈에 봐도 치명적인 극독이 차 있었다. 만약 살짝 긁히기라도 했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상상도 하기 싫었다.
“당신은… 인족입니까?”
소녀가 석목을 위아래로 살펴보며 확신이 없다는 듯 물었다.
석목은 소녀를 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흑마문의 석목이라고 합니다. 귀하의 이름은 무엇이죠?”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석목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반문했다.
“신분을 증명할만한 물건이 있나요?”
석목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품속에서 검은색 영패를 꺼내 보였다. 흑마문 제자의 신분증이었다.
영패를 본 뒤에야 소녀의 표정이 겨우 풀렸다. 그리고 석목에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저는 천음종의 전화무입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야만족의 황무지에서 7종문의 제자를 만날 줄은 몰랐군요. 정말 반갑습니다.”
살짝 웃으며 뭐라고 말을 하려던 소녀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선혈을 토해내며 비틀거리더니 뒤로 넘어지려 했다.
석목은 급하게 다가가 그녀의 몸을 부축했고, 커다란 나무에 기대고 앉을 수 있도록 도왔다.
“감사합니다.”
전화무는 석목을 향해 억지로 웃어 보이며, 품속에서 병을 꺼내 단약을 복용하려 했다.
바로 그때, 그녀의 표정이 급격하게 변하더니 순식간에 몸이 굳어졌다.
석목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전 사저, 어떻게 된….”
그러나 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전화무가 갑자기 석목의 가슴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놀란 석목은 바닥을 박차고 뒤로 물러나며 거리를 벌렸다.
석목의 반응은 상당히 빨랐지만, 너무 근접해 있었던 탓에 옷자락이 찢어지며 가슴께의 피부가 훤희 드러났다. 자칫했다가는 그대로 가슴이 갈릴 뻔했다.
분노한 석목은 표정을 굳히며 전화무에게 따지려 했다.
그러나 이미 위쪽으로 뛰어오른 그녀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석목을 덮쳤다.
“파렴치한 야만족! 감히 인족의 제자를 사칭하다니, 죽어라!”
전화무의 공격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그녀의 검이 하얗게 반짝이며 온몸의 급소를 노리고 날아왔다.
석목은 공격을 몇 차례 피한 뒤에 눈을 금빛으로 빛냈다. 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검 사이로 손을 뻗어 전화무의 손목을 낚아챘다.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검을 놓치자, 석목은 떨어지는 검을 잡아내는 동시에 뒤로 몇 장 물러났다.
안색이 창백해진 전화무는 다시 한 번 선혈을 토해냈고,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더니 나무를 짚고 섰다.
그녀의 수려한 얼굴은 투명하게 보일 정도로 핏기가 없었고, 몸의 떨림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그녀는 지계강자와의 싸움에서 요행으로 탈출했으나 내상을 크게 입었는데, 조금 전 붉은 눈의 야만족 일행과 격전을 벌이느라 내상이 더욱 심해진 상태였다.
전화무는 고개를 돌려 뒤쪽에 떨어져 있는 흰색 단약을 보았다. 그녀가 방금 전 복용하려다가, 석목과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는 바람에 땅에 떨어뜨린 것이었다.
전화무는 손을 뻗어 단약을 집으려 했지만, 노인처럼 손을 떠는 바람에 몇 번이나 다시 떨어뜨렸다.
그때, 가늘고 긴 손가락이 흰 단약을 집더니 전화무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보니 어느새 다가온 석목이 평온한 눈빛으로 그녀의 옆에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이때 전화무는 석목을 한 번 바라보고 잠시 머뭇거렸으나 결국 입을 열어 단약을 받아먹었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다시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전화무는 복잡한 표정을 지으며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잠시 후, 흰 빛이 떠오르더니 그녀의 신체를 감싸며 한기를 뿜어냈다.
시간이 흐르면서 그녀의 주위는 점점 서리에 뒤덮였다.
석목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전화무처럼 후천후기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 가진 진기로는 불가능한 현상이었기 때문이다. 방금 먹은 단약 덕분인 것 같았다.
한참 뒤에 안색이 한결 좋아진 전화무가 눈을 뜨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뭔가 복잡한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전 사저, 무언가 오해를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설마 이 토템 때문입니까?”
그가 자신의 상의를 젖히자 탄탄한 가슴에 새겨진 붉은 구렁이 토템이 드러났다.
거대한 구렁이는 이전보다 색이 훨씬 선명해져서 더욱 진짜처럼 보였다.
“흥! 몸에 야만족의 토템을 새기고 있는 야만족이 흑마문의 제자를 사칭하다니, 도대체 무슨 수작이냐?”
전화무는 구렁이 토템을 보고 수려한 얼굴을 살짝 붉히더니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진심인 척 한 번 도와준 것을 가지고 내가 너를 믿을 것이라 생각하지 말거라.”
그녀는 또박또박한 말투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하, 제 몸에 있는 것은 야만족의 토템이 아닌 토템 저주입니다.”
석목은 살짝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는 연맹의 부적제작 거점이 야만족에게 습격 받았을 당시, 만겁시혼주에 당한 일에 대해 설명했다.
“저는 이후 지계의 경지에 오른 강자가 저주를 봉인하거나,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배워 더욱 강한 괴수의 혼을 봉인시켜야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저로서는 지계의 강자를 움직이게 할 능력이 없으니, 위험을 무릅쓰고 야만족의 황무지에 잠입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석목은 평온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