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96화 (96/916)

96화. 성산(圣山)으로 향하다

석목의 이야기를 듣던 전화무의 표정이 시시각각 변했다.

쥐굴 거점이 습격당했다는 이야기는 그녀 역시 들은 바가 있었다. 게다가 석목이 말한 내용이 아주 상세한 것을 보니 꾸며낸 말은 아닌 것 같았다.

게다가 전화무는 어린 나이에 천음종에 들어가 배분이 매우 높았고, 아는 것도 상당히 많았다. 그녀는 석목이 말한 것과 유사한 저주술을 야만족이 사용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무엇보다 석목이 정말 적이었다면, 그녀가 쓰러졌을 때 바로 목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생각해보니 자신이 너무 섣불리 판단을 내리고 악랄한 수를 사용한 것 같아서, 전화무는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석목에게 다시 물었다.

“이제야 조금 이해가 될 것 같군요. 그렇지만 모두 입으로 하는 이야기일 뿐입니다. 증거를 가져오지 않는 한은 당신을 믿을 수 없어요.”

“그것은….”

석목이 난색을 표했다. 확실히 그는 어떤 실질적인 증거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살짝 짜증이 난 그는 차가운 말투로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믿을 수 없다고 해도 어쩔 수 없지요. 그럼 이만 가보겠습니다.”

석목이 그대로 왔던 길로 돌아가려 할 때, 전화무가 손을 뻗으며 말했다.

“기다려요. 내 검 좀 가져다줘요.”

석목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그녀에게 은색 장검을 돌려줬다.

전화무는 검을 건네받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그녀는 갑자기 은색 장검으로 석목의 가슴을 찔렀다.

놀라서 얼굴이 파랗게 질린 석목은 순식간에 몸을 뒤로 날려서 그녀와 십 장 가까이 거리를 벌렸다.

토템이 새겨진 그의 가슴에 상처가 생기며 피가 찔끔 배어 나왔다.

“이게 무슨 짓이죠? 저와 싸우자는 겁니까?”

석목이 표정을 가라앉히며 차갑게 말했다.

그러나 전화무는 대답을 하지 않고 검신을 눕히더니, 검 끝에 맺힌 핏방울을 들여다보았다.

이윽고 그녀는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증거를 내놓지 못하겠다고 하니, 제가 직접 알아보는 수밖에요.”

전화무는 품속에서 엄지손가락 크기 만 한 구슬을 꺼냈다. 투명한 옥으로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구슬은 표면에 매우 작은 부문이 새겨져 있는 법기였다.

전화무의 말에 석목은 분노를 거두고 그녀의 행동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전화무가 무언가를 읊조리자 구슬 표면에서 흰색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녀는 팔을 흔들어 검 끝의 핏방울을 구슬에 떨어뜨렸다.

치익!

빨갛게 달궈진 쇳덩이에 물방울이 떨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그 순간 투명한 구슬 안에서 운무가 소용돌이치며 피어올랐다.

그 광경을 본 전화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더니 구슬을 다시 집어넣었다.

“토템에 심각한 저주의 힘이 깃들어 있는 걸 보니, 방금 당신이 한 말이 전부 사실이었나 보군요.”

그녀의 말에 석목은 콧방귀를 뀌며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정말 죄송합니다. 저 역시 방금 행동이 매우 실례됐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맡은 임무가 굉장히 중해서, 조금만 차질이 생기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운 결과가 발생할 수 있다 보니 무례를 범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전화무는 깊게 허리를 숙이며 사죄했다.

“그게 무슨 말이죠?”

전화무의 정중한 태도에 어느덧 화가 많이 풀린 석목이 물었다.

그러자 전화무는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는 천음종의 제자이면서 대제국의 공주입니다.”

그녀는 최근 3국의 섬에서 벌어진 일, 그리고 연맹의 명령을 받은 자신이 야만족의 성지(圣地)로 향하던 중 맞닥뜨린 일에 대해서 설명했다.

전화무의 이야기를 들은 석목은 크게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는 황무지 깊숙이 들어와 있던 터라 그런 일들이 일어난 사실을 알 방도가 없었기 때문이다.

“설마 전혀 모르고 있었나요?”

석목의 표정을 본 화무공주가 놀라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제가 몇 달 전 야만족의 황무지에 진입할 때까지만 해도 그런 소문은 들은 바 없었습니다.”

석목은 말을 하면서도 이 사건이 자신의 계획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화무공주는 살짝 넋이 나간 석목을 보며 잠시 주저했으나, 결심한 듯 말했다.

“방금 제가 저지른 무례는 어떤 말로도 용서가 안 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이 하나 있는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겠습니까?”

“공주께서는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으니 당연히 매사에 조심할 수밖에 없지요. 저는 마음이 좁은 사람이 아니니, 하실 말씀이 있다면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석목이 대답했다.

“교섭을 위해 함께 출발한 사절단은 저만 남기고 모두 전멸했습니다. 게다가 전 중상을 입었어요. 그런데 성산에 도착하려면 아직 한 달은 더 가야합니다. 7종문의 제자로서 제가 무사히 성지에 도착할 수 있도록 호위를 해줄 수 있을까요?”

화무공주가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말을 들은 석목은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

야만족과의 협정은 인족의 안위와 관련이 있는 중요한 일이다. 게다가 대제국의 국민으로서 공주를 호위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성지까지 오가려면 거의 두 달의 기간이 소요된다. 석목은 자신의 몸에 새겨진 저주 때문에 잠시도 지체할 여유가 없었다. 성지에 다녀온다면 이번에는 정말 죽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자 화무공주는 석목이 무슨 걱정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토템저주에 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이 협정은 야만족에게도 매우 중요하니, 기회를 봐서 야만족의 대제사장에게 열사부족의 토템수련법을 요구하겠습니다. 그에 따르는 대가는 얼마가 됐든 간에 모두 연맹에서 부담할 것이고요.

혹시 대제사장이 동의하지 않더라도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연맹의 총본부가 위치한 천청산(天青山)에 돌아가면, 제가 공손장로의 직계제자 신분으로 지계의 강자에게 직접 도움을 요청하도록 하겠습니다.”

석목은 잠시 생각을 한 뒤 결정을 내렸다.

“좋습니다. 목숨을 걸고 공주님을 지키도록 하겠습니다.”

혼자 위험을 무릅쓰고 열사부락에 잠입한다고 해도 그들의 토템수련법을 얻을 수 있다는 보장은 없었다. 그보다는 화무공주와 함께 성산에 가는 것이 오히려 성공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혹여나 대제사장이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성산은 야만족의 성지이니 분명 다른 방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화무공주는 석목의 대답을 듣고 매우 기뻐하는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오래 머물러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지요.”

그러나 화무공주는 말을 마치자마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기침을 했다.

그녀는 가슴의 답답한 느낌이 점점 강렬해지자 미간을 찌푸렸다.

이에 석목이 말했다.

“상처가 심하니 오늘은 일단 휴식을 취하고 내일 출발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화무공주는 싸우느라 입은 내상을 빙서단(冰絮丹)으로 진정시킨 상태였다. 그러나 무리해서 즉시 길을 나섰다가는 다시 악화될 것이 분명했다.

“좋습니다. 이 시체는….”

화무공주는 말을 하다 잠시 머뭇거렸다.

“저에게 맡기세요.”

석목은 야만족의 시체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

석목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들의 시체를 뒤졌고, 금덩어리밖에 찾지 못하자 살짝 실망하는 표정이 되었다.

이어 석목은 시체를 한곳에 모으더니 품속에서 회색 괴수의 가죽을 꺼냈다. 그 가죽은 화속성 부문이 새겨진 화염구 부적이었다.

이 가죽 부적지는 괴수의 가죽을 무두질해 만든 것으로, 야만족이 무적(巫符)을 제작할 때 사용하는 재료였다. 석목은 이것을 우연히 보름 전 야만족의 부락에서 구매했다.

혹시나 하고 부적을 만들어본 석목은 괴수의 가죽으로 만든 부적지로도 부적을 제작할 수 있으며, 오히려 일반 부적지보다 더욱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석목의 손에서 붉은 빛이 반짝이더니 거대한 화염구가 생겨나 시체더미 위로 떨어졌다.

화염구에 맞은 시체들은 곧 전부 재로 변했다.

* * *

다음날 아침, 오아시스에서 멀지 않은 곳.

석목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서 평온하게 호흡을 하고 있었다.

석목은 화무공주가 부르는 소리에 눈을 떴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한 낯선 야만족 사내가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사내는 회색 가죽옷을 입고 노란 수염을 길렀으며, 피부는 붉었다.

목소리가 아니었다면 석목은 그가 화무공주라는 것을 전혀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화무공주님…입니까?”

석목이 묻자 화무공주가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아니면 누구겠어요? 이전의 모습은 발각되었으니, 종문에서 배운 역용술로 다시 한 번 모습을 바꿔봤습니다. 그쪽도 모습을 바꿔보는 것이 어때요?”

석목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알아볼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외모가 인족과 상당히 닮아 있었기 때문에, 모습을 바꾼다면 정체를 들킬 걱정을 더 덜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화무공주의 역용술은 정말 대단했다. 반 시진 후 석목은 까만 피부의 사십 대 야만족 사내의 모습으로 변했다.

작은 연못에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본 석목은 화무공주의 역용술을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 * *

음산한 바람이 불어오는 사령계의 하늘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어두웠다.

캄캄한 하늘에는 여전히 핏빛 달들이 걸려 있었지만, 그 숫자는 이전보다 하나가 줄어서 열한 개 밖에 남지 않았다. 그 대신 다른 달들은 전보다 살짝 커진 것 같았다.

그러나 사령생물들은 핏빛달의 변화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이전과 같이 각자의 길을 갈 뿐이었다.

어느 산 아래, 큰 전쟁이 있었던 듯 바닥에 부서진 뼈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그곳에는 흔한 해골의 잔해 외에도 강시와 해골기사 등의 시체와 뼈가 있었다.

쌓여 있는 해골더미 사이에서 몸이 처참하게 부서진 어느 해골의 두개골이 갑자기 반짝이더니, 눈가에 녹색 영혼의 화염이 타올랐다.

그 해골의 두 다리와 왼쪽 팔은 이미 멀리 날아갔고, 절반이 남은 몸통에는 머리와 오른쪽 팔만 붙어있었다.

해골은 한 손으로 바닥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파괴된 자신의 몸을 내려다보며 괴로운 듯 눈가의 녹색 화염을 살짝 떨었다.

그 부서진 해골은 연나였다.

남은 한 팔을 사용해 앞으로 기어가는 연나의 늑골에는 여러 군데 금이 가 있었다. 그것으로 보아 상당히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머리와 오른팔이 연결된 견갑골에는 조금의 균열도 없었다.

연나는 잔해 사이를 이곳저곳을 기어 다니며 자신의 뼈를 찾아 헤맸다. 금세 뼈를 전부 모아서 붙이는 것을 보니, 한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닌 것 같았다.

연나는 팔다리를 한 번 움직여본 뒤 전장의 이곳저곳을 오가다가, 두 동강이 난 회색 해골 옆에 멈춰 섰다.

회색 해골의 눈가에는 아직 옅은 영혼의 화염이 남아 있었다.

연나는 다리를 들어 회색 해골의 두개골을 강하게 밟았다.

빠각!

부서진 회색 해골의 두개골에서 녹색 빛이 떠오르더니 연나의 입 속으로 흡수되었다.

전장에는 아직 영혼의 화염이 꺼지지 않은 해골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연나는 사방을 뒤져서 열 개가 넘는 영혼의 화염을 흡수했다. 그러자 연나의 녹색 화염은 옅은 푸른색으로 변하며 크기가 커졌다. 마치 눈가에 푸른색 횃불들이 타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영혼의 화염이 강해지면서 연나의 몸에 있던 균열도 서서히 작아지더니, 결국에는 완전히 사라졌다.

잠시 후, 연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서서 눈가의 푸른색 화염을 들썩였다.

몸을 홱 돌린 연나는 아직 죽지 않은 어느 은백색 해골의 곁으로 다가갔다. 연나는 무언가 생각하는 듯 그 해골을 조용히 바라보면서 푸른 불꽃을 반짝였다.

바닥에 쓰러져 있던 은백색 해골은 자신에게 다가온 연나를 보고 겁은 집어먹은 듯, 눈가의 녹색 화염을 살짝 떨었다.

연나는 몸을 숙여 은백색 해골의 두개골을 몸에서 뜯어낸 후 입을 벌렸다.

은백색 해골의 두개골에서 녹색 빛이 빠져나와 연나의 입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녹색 빛을 흡수한 연나의 영혼의 화염이 갑자기 분수처럼 솟구치기 시작했다.

잠시 후, 연나는 입을 벌려 녹색 화염을 뱉어내더니 은백색 해골의 두개골에 도로 집어넣었다. 은백색 해골의 두개골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눈가에 녹색 화염이 다시 나타났다.

연나는 마지막으로 그 두개골을 바닥에 놓여 있는 해골의 몸통에 끼워 넣었다.

끼이익!

은백색 해골은 몸을 비틀거리며 일어났다. 그러더니 연나보다도 덩치가 더 큰 몸으로 땅에 엎드려 절을 했다.

연나는 고개를 들고 몸을 돌려 전장의 다른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몸을 일으킨 은백색 해골은 연나의 뒤를 바짝 쫓았다.

반나절 후, 전장을 떠나는 연나의 뒤에는 그보다 덩치가 더 큰 두 구의 해골이 비틀거리며 따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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