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97화 (97/916)

97화. 백마산(白马山)

한 달 후, 야만족 황무지의 서북쪽.

이곳에는 척박하고 황량한 다른 황무지와는 달리 꽃과 풀이 무성했다. 우거진 수풀 사이로는 구불구불한 강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바닥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물이 맑은 그 강줄기의 끝에는 하늘에 닿을 것처럼 높고 거대한 산봉우리가 서 있었다.

산봉우리는 전체가 흰색이고 바위가 특이한 모양으로 서 있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흰색 말이 앞발을 높이 들고 선 자세 같다고 해서 백마산(白馬山)이라 불렸다.

백마산은 야만족에게는 남다른 의미를 가진 곳이었다. 이 산 주위의 백 리는 고대 거인의 기원지로 전해져 내려오는 성지였으며, 백마산 역시 성산으로 불렀다.

백마산의 가장 높은 곳에는 엄청나게 큰 백색 궁전이 있었다. 이곳은 야만족들의 순례지인 동시에 대제사장이 거주하는 성설궁(圣雪宫)이었다.

이 산봉우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작은 산에는 두 남녀가 나란히 서 있었다.

회색 늑대의 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은 남자는 사불상에 타고 있었으며, 여우 가죽으로 만든 노란 망토를 걸친 여인은 갈색 말을 타고 있었다.

백마산을 바라보고 있는 이들은 먼 곳에서 산을 넘고 물을 건너온 석목과 화무공주였다.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외모를 바꾸며 흉만 부락을 피하는 수고를 한 끝에 목적지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성산 근처에 도착한 이들은 전날 본래의 외모로 되돌아왔으나, 복장은 여전히 야만족의 그것을 입은 채였다.

석목은 산꼭대기의 성설궁에서 시선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백마산의 산자락에 위치한 수백 평 넓이의 야만족 군영을 바라보았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흰색이었다. 군영의 모든 건물은 전부 흰색 바위를 이용해 세워졌기 때문이다. 크지 않은 군영에는 이삼백 명 정도가 머물며 산의 유일한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출발하죠!”

흥분한 듯 눈을 반짝이며 성설궁을 바라보던 화무공주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말했다.

그녀는 말을 몰고 산자락의 야만족 군영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석목도 사불상을 타고 그녀를 쫓았다.

“멈춰라!”

석목과 화무공주가 군영 앞에 도착하자 문을 지키고 있던 야만족 병사들이 소리쳤다.

“아직 순례의 시기가 다가오지 않았다. 성산에 난입하면 즉시 사살하겠다!”

병사들은 병기를 들이밀며 두 사람을 막아섰다.

“저는 대제국의 화무공주입니다. 인족의 7대 종문을 대표해 대제사장을 뵙고자 합니다.”

화무공주가 자신의 신분을 밝혔다.

그러자 병사들 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머리에 붉은 헝겊을 두른 야만족이 잠시 머뭇거리다가 수하에게 몇 마디를 건넸다. 다시 고개를 든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앞의 두 인족을 계속 경계했다.

그의 지시를 받은 야만족 병사가 즉시 군영으로 달려간 지 이각 후, 머리에 세 개의 붉은 깃털을 꽂고 눈빛이 음험한 중년의 야만족이 말을 타고 나왔다.

입구의 야만족 사병들을 중년의 야만족이 다가오자 급하게 길을 열면서도 두 인족을 경계하는 눈빛은 거두지 않았다.

중년의 야만족이 두 사람을 의심하는 듯한 시선으로 보며 차갑게 말했다.

“내가 이 군영의 통솔자인 아고나다. 두 사람이 7대 종문의 사자라는 것을 무엇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그러자 화무공주가 품속에서 흰색 영패를 꺼내며 말했다.

“사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영패입니다. 7대 종문이 공동으로 제작했기 때문에 모조품을 만들 수 없는 물건입니다. 대제사장님이라면 알아볼 것입니다.”

화무공주가 보인 흰색 영패는 생김새는 옥간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표면에 새겨진 심오해 보이는 부문만 보더라도 평범한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하, 대제사장님이 너희가 만나겠다고 하면 만날 수 있는 존재인줄 아느냐? 내가 먼저 영패를 확인하고, 가짜가 아니라면 그때 가서 대제사장님께 보고하겠다.”

아고나가 웃으며 말했다.

화무공주는 난감한 표정으로 옆에 있는 석목을 바라봤다. 석목은 그녀에게 몇 마디를 건넸다.

화무공주는 잠시 생각한 다음 아고나에게 영패를 던졌다.

그러나 아고나는 받아 든 영패를 확인하지도 않고 바로 품속에 집어넣더니, 갑자기 표정을 바꾸며 소리쳤다.

“어디서 온 첩자들이냐! 여봐라, 저 인족의 첩자들을 잡아와라!”

그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군영에서 백여 명의 야만족이 뛰쳐나왔다. 그중에는 토템용사만 열 명 가까이 되었다.

그들은 미리 준비라도 한 듯 석목과 화무공주를 빠르게 둘러쌌다. 앞줄의 병사들은 장창을 가로로 들이밀고 있었고, 뒤쪽의 병사들은 창을 던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토템용사들은 토템의 힘을 발동해 신체를 변화시키기 시작했다.

화무공주는 허리춤의 흰색 검을 뽑아들고 적들의 공격에 대비했다.

석목도 운철흑도를 뽑아들고 차가운 눈으로 아고나를 보았다. 운철흑도의 표면에 새겨진 부문이 환하게 빛났다.

석목의 눈빛을 본 아고나는 자신도 모르게 두려움을 느꼈다. 그러나 가까스로 차분함을 유지하며 말했다.

“저항할 생각이냐? 여기가 어떤 곳인지 모르는 것이냐!”

그가 손을 들어 수하들에게 명령을 내리려는 순간, 뒤에서 위엄이 넘치는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곳은 대제사장이 머물며 수련하는 곳이다. 아고나, 너는 이곳이 너희 열사부족의 부락인 줄 아는 것이냐?”

목소리의 주인공이 군영의 깊은 곳에서 걸어 나왔다. 푸른색 가죽옷을 입은 야만족 사내였다.

그 야만족은 키가 일 장 가까이 되었으며, 목에 푸른색 송곳니를 꿴 목걸이를 걸고 있었다. 어깨에 지고 있는 커다란 망치는 무게가 천근은 족히 되어보였다.

석목은 열사부족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는 아고나를 향해 있는 시선을 살짝 돌려서 토템이 새겨져 있을 법한 가슴 쪽을 보았다.

아고나는 들어 올린 팔을 내려놓지 않으며 말했다.

“오란 대인, 이 두 사람은 제가 방금 발견한 인족의 첩자입니다. 저들을 처치하는데 무슨 문제라도 있는 겁니까?”

그때 푸른색 가죽옷을 입은 야만족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본 화무공주가 기쁜 표정을 지으며 급히 신분을 밝혔다.

“오란 대인, 저는 대제국의 화무공주입니다. 인족의 7대 종문을 대표해 대제사장을 뵙고자 합니다. 사자의 신분을 증명하는 영패는 아고나의 품속에 있으니 확인해주기 바랍니다.”

그러자 오란이라고 불린 그 야만족 사내는 아고나에게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고나, 그녀의 영패를 내게 보여라.”

아고나의 안색이 시시각각 변하더니, 결국 품속에서 영패를 꺼내 그에게 건넸다.

오란은 무표정하게 영패를 받아들고는 자신의 이마에 가져다 댔다.

잠시 뒤 옥패를 내려놓은 오란이 웃음을 지었다.

“두 분은 확실히 인족의 사자로군요. 모두 물러나라!”

그는 석목과 화무공주를 포위하고 있는 야만족 병사들을 향해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오란의 명령에 병사들이 신속히 대열을 해체하고 군영으로 돌아갔다.

“아고나, 너도 한 번 확인해보겠느냐?”

오란이 손에 든 영패를 만지작거리며 옆에 있는 아고나에게 물었다.

“당연하죠!”

아고나가 손을 뻗어 영패를 받아들며 성난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곧 영패를 이마에서 뗀 그는 입을 다물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오란은 아고나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그는 선천 강자만이 뿜어낼 수 있는 횡포한 기운을 뿜어내며 말했다.

“아고나, 너는 지금 성설궁을 지키는 통솔자다. 자신의 직책을 망각하지 마라!”

강대한 무형의 기를 마주한 아고나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가 가까스로 멈춰 섰다. 얼굴이 빨개진 그는 급하게 사죄하고 물러났다.

오란이 고개를 돌려 화무공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공주마마, 대제사장님이 일이 바빠 한동안은 접견을 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우선 청아전(青牙殿)에서 며칠 머무는 것이 어떠신지요?”

“감사합니다, 오란 대인. 그럼 염치 불구하고 그렇게 하겠습니다.”

화무공주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영패를 챙긴 오란이 몸을 돌려 앞쪽에서 길을 안내했다. 석목과 화무공주는 그의 뒤를 따라서 군영의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세 사람은 흰색 암석을 잘라서 만든, 넓이가 일 장 가까이 되는 길을 걷고 있었다. 화무공주는 말 위에 타고 있었는데도 여전히 오란보다 작았다.

사불상을 탄 석목은 적당한 거리를 두고 화무공주의 뒤를 따르며 주위의 환경을 관찰했다.

“제때 도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란 대인이 없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상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화무공주가 오란을 향해 감사의 말을 건넸다.

“그저 명령을 받고 움직인 것이니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오란이 손을 저으며 말했다.

“외람되지만 누구의 명령을 받은 것인지 알 수 있을까요?”

화무공주의 물음에 오란은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우리 청아부족의 제사장인 염아 대인의 명을 받았습니다.”

화무공주는 그의 말이 조금도 의외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흉만과 평만은 줄곧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금 전 그녀는 오란의 목에 걸린 목걸이를 보고 그가 평만에 속하는 청아부족의 야만족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일각 후, 석목과 화무공주는 오란의 안내에 따라 산의 중턱에 세워진 푸른색 전당에 도착했다.

그들은 전당의 깊숙한 곳으로 걸어 들어갔고, 대전 밖에 남겨둔 탈것들은 야만족 하인이 돌봤다.

전당 안의 푸른 방에는 푸른색의 제사장 옷을 입은 마른 노인이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석목과 화무공주는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다처럼 깊은 노인의 기운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화무공주가 먼저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대고 허리를 숙여 야만족의 방식으로 예를 표했다.

“대제국의 화무가 염아 제사장님을 뵙습니다. 사람을 보내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석목 역시 화무를 따라 인사를 했다.

오란이 앞으로 나서서 화무공주의 영패를 제사장에게 건넨 후, 그의 뒤쪽에 섰다.

염아 제사장은 영패는 거들떠도 보지 않고 두 사람에게 손짓하며 말했다.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두 분은 자리에 앉으시지요. 이 노부가 이런 행동을 한 것은 흉만과 해족의 음모가 실현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을 들은 화무공주는 깜짝 놀라 물었다.

“해족이요?”

“공주는 모를 수도 있겠군요. 명성이 자자한 해족의 성녀 향주가 일주일 전에 백마산에 도착했습니다. 해족을 대표해서 온 그녀는 야만족에게 자신들과 연합해 인족에 맞서자는 요청을 했지요. 그 때문에 우리 8대 부족의 제사장들이 대제사장의 부름을 받아 성산에 집결한 것입니다.”

염아 제사장이 전한 소식은 놀라웠다. 화무공주의 표정이 순간 어두워졌다.

만약 해족이 야만족과 연합한다면 인족은 앞뒤로 적의 공격을 받는 극도로 불리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화무공주는 급히 마음을 진정시킨 뒤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염아 제사장님, 청아부족은 해족과의 관계가 나쁘니 찬성하지 않으시겠죠?”

“하하, 공주가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아시는군요. 맞습니다. 4대 평만 부족 중 하나인 우리 청아부족은 다른 세 평만 부족과 같이 동해에 인접한 곳에 모여 살고 있지요. 그 때문에 해족과의 원한이 상당히 깊습니다. 당연히 해족과의 연합을 원치 않지요.”

염아 제사장이 화무공주를 보며 천천히 설명했다.

“그렇다면 해족과의 연합에 대한 대제사장님의 생각은 어떤가요?”

화무공주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다시 물었다.

염아 제사장이 웃으며 말했다.

“흉만의 네 부족은 해족과의 연합을 주장하지만, 우리 평만의 네 부족은 반대 의견을 고수하고 있어서 대제사장이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하, 공주가 제때 찾아온 것이지요.”

화무공주가 기뻐하며 말했다.

“이야기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때 염아 제사장은 석목을 보더니 무언가 생각난 듯 물었다.

“공주, 인족의 사절단은 둘 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희는 대제국에서….”

화무공주는 석목에 관한 것은 제외하고 사절단이 겪은 일을 숨김없이 말했다. 특히 사절단이 전멸하게 된 원흉인 해족의 지계강자에 대해서 자세히 밝혔다.

그녀의 이야기를 다 들은 염아 제사장은 눈썹을 찌푸리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염아 제사장은 자신이 추측한 바를 이야기했다.

“공주가 말한 해족의 지계강자는 아무래도 열사부족에서 가장 강한 용사인 찰고 같군요. 그는 명사편(冥蛇鞭)이라 불리는 채찍과 청명해사(青冥海蛇)라는 기술을 사용합니다.”

그의 말에 석목과 화무공주는 크게 놀라 서로를 한 번 바라보았다.

염아 제사장이 말을 이었다.

“공주의 체내에 청명(青冥) 진기가 남아있더군요. 잠시 억제하고 있는 것 같지만 방치한다면 위험할 수 있으니, 이 노부가 청명 진기를 말끔히 제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겁은단(怯阴丹)을 하나 주겠습니다.”

이에 염아 제사장은 나무상자를 하나 꺼내 화무공주에게 건넸다. 화무공주가 기뻐하며 얼른 받아들었다.

“감사합니다, 제사장님.”

화무공주는 염아 제사장과 몇 마디를 더 나눈 후 방을 나섰고, 하인이 그들을 거처로 안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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