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98화 (98/916)

98화. 다수흉망(多首凶蟒)

화무공주와 석목이 안내된 곳에는 총 세 개의 방이 있었다. 상당히 넓은 데다 잘 꾸며져 있는 걸 보니, 아마도 귀빈을 위한 숙소인 것 같았다.

똑똑!

석목은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었다.

그가 방문을 열자 화무공주가 서 있었다.

“들어오세요, 공주님”

석목은 살짝 웃으며 그녀를 방으로 들였다.

“화무라고 부르면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공주라고 부를 필요 없어요.”

화무는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러나 석목은 문을 닫으며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응접실에 마주앉은 두 사람은 웃음기를 거둔 채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뒤 화무공주가 낙담한 표정으로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해족도 백마산에 왔다니, 휴전 협정을 맺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을 것 같아요.”

해족은 일주일 전에 성산에 도착해 선수를 빼앗았을 뿐 아니라, 많은 수의 뛰어난 실력자들이 성녀를 모시고 있었다.

그러나 인족의 사절 일행은 화무와 석목 두 사람 뿐이었다. 상대적으로 세력이 미약하게 보일 수밖에 없었다. 화무가 낙담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염아 제사장의 말에 따르면, 야만족 내부에서 이 일에 대해서 아직 논쟁 중이니 우리에게 기회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석목이 낙담한 화무공주를 격려하며 말했다.

그의 말에 화무공주가 고개를 끄덕이며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랬으면 좋겠어요.”

이어 화무공주는 잠시 미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곧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

“상황이 복잡하니, 대제사장에게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요구하겠다던 약속은 잠시 보류해야할 것 같아요. 하지만 적당한 시기에 반드시 언급할게요.”

석목이 살짝 웃으며 말했다.

“그 일을 기억하고만 있으면 됩니다. 협정을 맺은 뒤에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아요.”

“안심하세요. 전 약속한 것은 반드시 지켜요.”

“감사합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화무공주는 석목의 방에서 오래 머물지 않고 급히 자리를 떴고, 석목은 그녀를 배웅한 뒤 침실로 돌아와서 앉았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화무공주의 호위였기 때문에 회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성산에는 열사부족이 있었기 때문에 경거망동을 할 수 없었다.

석목은 상의를 벗었다. 푸른빛으로 덮여 있는 구렁이 토템은 어떤 이상 징후도 보이지 않았다.

그 모습에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산자락에서 만난 열사부족의 야만족은 그의 몸에 토템저주가 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걸 보면 외뿔 살무사 정혈의 효과가 상당한 것 같았다.

그럼에도 석목은 긴장을 완전히 풀지는 않았다.

이후 며칠 동안 화무공주는 거처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물론 평만의 몇몇 주요 인물과는 빈번하게 접촉했지만, 석목의 앞에 나타나는 일은 매우 드물었다.

석목 역시 거처에서 거의 나가지 않았고, 일상생활을 돕는 몇몇 야만족 하인 외에 다른 사람은 전혀 만나지 않았다.

그렇게 사흘이 순식간에 지나갔다.

성산은 매우 평온했으며, 어떤 문제도 발생하지 않았다. 점차 안심하게 된 석목은 거처에서 나왔다.

그와 화무공주가 머물고 있는 방 주변에는 호위가 없는 듯했다. 주위에서 사람의 그림자를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전당의 출구에 다다른 석목이 밖으로 나가려 했을 때, 누군가의 젊은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인족 사절단의 석 용사님입니까?”

석목이 고개를 돌려보니 전당의 한쪽에서 푸른색 제사복을 입은 야만족 청년이 웃는 얼굴로 다가오고 있었다.

석목이 물었다.

“맞습니다. 그쪽은 누구시죠?”

“하하, 저는 청아부족의 하급 주술사 민도입니다. 성산에서는 많은 곳이 외부인 출입이 금지되어 있으며, 어떤 곳에는 진법이 설치되어 있어서 난입할 경우 위험할 수 있습니다. 염아 제사장님께서 석 용사님이 나가는 것을 알고 저에게 안내를 지시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석목은 깜짝 놀랐다. 자신의 움직임이 전부 감시받고 있었는데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나 석목은 감정을 전혀 얼굴에 드러내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그렇군요. 그렇다면 민도 제사장님에게 신세지겠습니다. 성산의 풍경이 멋지다고 들어서 한번 돌아보려는 중이었습니다.”

“신세라니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석목은 금빛으로 변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봤다. 그리고 머리 위를 힐끔 보고 몸을 흠칫 떨었다.

위쪽 벽면에는 주먹 만 한 크기의 검은색 광석이 끼워져 있었다.

그 광석은 아주 옅은 빛과 은은한 법력의 파동을 뿜어내고 있었는데, 석목이 뛰어난 시력을 가지지 않았다면 찾아내지 못했을 것이다.

‘저것으로 감시하고 있었군….’

광석을 발견한 석목은 오히려 안심했다.

민도는 앞장서서 석목을 안내하기 시작했다. 그는 석목에게 관심이 있는 듯 이곳저곳으로 열정적으로 이끌며 구경을 시켜줬다.

성산의 건축물은 인족의 그것과는 많이 달랐다. 야만족 특유의 호방한 느낌이 가득했다.

민도는 석목에게 전당과 건축물에 대해, 심지어 벽화 하나에 대해서도 전부 상세히 설명해주었다.

또 민도는 안내를 하면서 때때로 석목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하기도 했다. 그는 인족에 대해 상당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는 듯했다.

무언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 석목은 그의 질문에 하나하나 대답해주었다 그러면서 민도가 자신에 대해 점점 호감을 갖도록 했다.

“민 형은 인족에 대해서 아는 게 굉장히 많군요. 정말 박학다식하십니다.”

석목이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칭찬을 했다.

그러자 민도는 겸손하게 웃었다.

“과찬입니다. 성지를 수호하는 주술사인 저는 일 년 내내 성설궁에 머물기 때문에 바깥세상에 나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저 야사가 기록된 서적을 많이 읽어봤을 뿐이죠.”

그 말을 들은 석목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아, 성설궁에 서적을 보관하는 곳이 있나보죠? 저도 한 번 그곳에 가볼 수 있을까요?”

석목의 말에 민도는 주저했다.

“그것은 안 될 것 같습니다. 성설궁에 보관된 책은 8대 부족에 속해 있는 이들이라 해도 허가 없이는 볼 수 없습니다. 이것은 역대 대제사장들이 정한 규칙이라, 비록 석 용사님이 성산의 귀빈이라 할지라도 예외를 적용할 수는 없습니다.”

석목은 실망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민도는 석목이 더 이상 고집을 부리지 않는 걸 보고 한숨을 돌렸지만, 이내 미안한 듯 덧붙였다.

“그렇지만 무언가 궁금한 것이 있다면 저에게 물어보세요. 저는 성설궁에 보관된 책을 거의 다 읽어보았습니다.”

“사실 별 건 없습니다. 그저 황무지에 들어온 뒤에 보고들은 것들에 매우 호기심을 느껴서요.”

석목은 계속 걸으며 야만족의 각종 풍습 등에 대해서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민도는 그의 궁금증을 하나씩 풀어주었다.

대화를 하는 도중 석목은 야만족의 토템비술에 대해서 은근슬쩍 묻기 시작했다.

그러자 민도는 대답에 좀 더 신중을 기하는 눈치였다. 토템비술은 야만족의 근본이기 때문이다.

또 민도 역시 석목에게 인족의 무공과 술법 등에 관해서 질문했다. 그러나 석목은 전혀 경계하지 않고 모든 질문에 대답해주었다.

민도는 이상하게 생각했지만, 그런 석목의 태도 때문에 그 역시 야만족의 토템비술에 대해 묻는 석목의 질문에 대답해주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일단 말을 하기 시작하니 민도 역시 망설임이 사라진 듯, 막힘없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이야기가 계속되면서 두 사람의 걸음은 점차 느려졌다. 나중에는 아예 은밀한 곳에 멈춰 서서 야만족의 토템비술과 인족의 술법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한참 동안 대화를 나눈 뒤, 두 사람은 각자 큰 수확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민도는 인족의 술법과 부적에 흥미가 있는 듯 많은 질문을 했고, 석목의 대답은 거침이 없었다. 심지어 그 자리에서 하급 술법을 시전해보였을 뿐만 아니라, 하급 부적을 두 장 꺼내 민도가 자세히 관찰할 수 있도록 했다.

야만족의 하급 제사장인 민도는 인족의 술사학도에 해당하는 실력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석목의 대답은 사실 그에게 있어서 상식적인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무슨 비술이라고 할 만한 것도 없었다.

석목에게 받은 부적을 보며 잠시 침묵하던 민도가 부적을 돌려주며 시원시원하게 물었다.

“부적술에 대한 비밀까지 이토록 시원하게 대답해주는 것을 보니, 저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나 보군요.”

석목은 돌려받은 부적을 챙겨 넣으면서 살짝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물어보세요. 제가 대답할 수 있는 것이라면 숨기지 않겠습니다.”

민도의 말에 석목은 돌려 말하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질문했다.

“혹시 만겁시혼주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그의 말에 민도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표정을 보아하니 이 토템저주에 대해서 상당히 잘 아는 것 같습니다.”

석목은 매우 기뻤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민도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저주는 8대 부족 중 열사부족의 것입니다. 야만족의 8대 부족에는 모두 이와 비슷한 저주 무술(巫术)이 존재하지만, 우리 청아부족은 저주술에 대한 수련을 엄격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 역시 성설궁에서 이론으로만 접했을 뿐이지요. 석 형이 궁금한 것이 무엇이죠?”

민도의 물음에 석목은 정중하게 대꾸했다.

“저주를 해제하는 방법에 대해서 묻고 싶습니다.”

“설마… 석 형이 그 저주에 걸린 겁니까?”

석목은 씁쓸하게 웃으며 자신이 저주에 걸리게 된 과정을 대략 설명했다.

지금까지의 대화를 통해 석목은 이미 민도의 속내를 자세하게 파악한 뒤였다. 민도는 어려서부터 성설궁에서 지내서 바깥세상을 접할 기회가 많지 않으며, 성격이 상당히 단순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석목 역시 이런 일을 감히 입 밖으로 꺼내지 못했을 것이다.

민도가 무거운 표정으로 잠시 머뭇거리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알기로는 만겁시혼주를 해제하는 방법은 두 가지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지계의 강자가 저주를 봉인하는 것이고….”

석목은 한숨을 쉬고 말했다.

“민 형이 말한 두 가지 방법은 사실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첫 번째 방법은 저로서는 할 수 없는 일입니다. 제가 이 성산에 온 것은 화무공주를 호위하기 위한 이유도 있지만, 두 번째 방법을 이용해 저주를 파훼하기 위해서이기도 합니다.”

석목의 말을 들은 민도는 잠시 침묵했다가 말을 이었다.

“그것은…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수련하는 것 말고도, 강력한 뱀 계열의 괴수를 사냥해야만 합니다.”

석목이 또 다시 한숨을 쉬며 말했다.

“저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목숨과 관련된 일이니 전력을 다해보는 수밖에 없습니다.”

“이 일에 관해서 제가 도울 수 있는 것은 많지 않습니다. 토템의 문양을 보여준다면 어떤 괴수의 혼이 봉인되어 있는지 정도는 판단할 수 있을 겁니다.”

민도가 말한 것은 석목이 바라던 바였다.

두 사람은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왔다. 거처에 도착한 석목은 상의를 벗어서 민도에게 가슴의 구렁이 토템을 보여주었다.

그의 가슴에 새겨진 붉은색 토템을 본 민도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민도는 토템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표정이 더더욱 심각해지더니, 석목을 가엽다는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석목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듯했다.

“주저하지 말고 말해주셔도 됩니다.”

민도가 가볍게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으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이 저주에 봉인된 괴수는 야만족 황무지에서 굉장히 유명한 괴수입니다. 머리가 여러 개인 구렁이 괴수 다수흉망(多首凶蟒)이지요. 가장 하급에 속하는, 머리가 하나뿐인 구렁이 괴수인 단수망(单首蟒)조차 그 강함이 후천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무인에 뒤쳐지지 않습니다.

머리가 두 개 뿐인 이수흉망(二首凶蟒)이라 할지라도 선천초기의 강자보다 절대 약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저주를 억누르기 위해서는 더 강한 다수흉망을 사냥해야 합니다.”

석목이 천천히 물었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저는 시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 괴수를 어디서 찾을 수 있는지 가르쳐줄 수 있을까요?”

민도가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다수흉망은 수백 년 전에 이미 황무지에서 종적을 감췄습니다. 석 형이 선천강자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해도 그 괴수는 사냥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의 말에 석목의 표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민도는 한참 후에 머뭇거리는 표정으로 덧붙였다.

“사실 그 괴수가 있을만한 곳이 한 곳 있기는 합니다. 바로 용사의 문이지요. 석 형이 살해한 그 열사부족의 야만족도 아마 그곳에서 괴수의 혼을 얻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곳은 우리 야만족의 금지(禁地)입니다. 아직 개방을 할 때가 다가오지도 않았을뿐더러, 설령 개방을 한다고 해도 절대 그 안에 인족을 들이지 않을 것입니다.”

석목의 표정이 결국 어두워졌다.

민도는 괴로워하는 석목을 보기 힘들었는지, 몇 마디 이야기를 더 주고받은 뒤 인사를 하고 방을 나섰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