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99화 (99/916)

99화. 대제사장

하늘의 회색 구름이 끊임없이 용솟음치고, 음산한 검은 바람이 거세지면서 천지가 점점 어둑어둑해졌다.

어두컴컴한 하늘 아래, 여러 개의 회색 산에 둘러싸인 분지에 흙먼지가 흩날리고 있었다. 흙먼지 안에서는 도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분지의 곳곳에는 부서진 해골의 뼈가 흩어져 있었고, 아직 서 있는 십여 구의 해골이 난투를 벌이고 있었다.

어떤 해골은 뼈검이나 뼈도끼를 들고 있었고 또 다른 해골은 뼈창, 뼈망치 등을 들고 있었으며, 아무것도 쥐고 있지 않은 해골도 있었다. 눈에서 녹색 영혼의 화염이 반짝이고 있는 것이 그들의 유일한 공통점이었다.

해골들은 광분한 듯 자신들의 몸이 부서지는 것도 신경 쓰지 않았고,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는 한은 상대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퍼부었다.

덩치가 커다란 한 해골이 창을 든 해골의 공격을 피하더니, 한 걸음 전진하면서 도를 휘둘러 상대의 허리를 두 동강 냈다.

그런데 바로 다음 순간,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물의 다리뼈가 옆에서 그의 왼팔을 매섭게 걷어찼다.

퍽!

커다란 해골의 왼팔은 박살이 났다.

커다란 해골은 즉시 몸을 돌리며 반격했으나 상대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커다란 해골을 공격한 상대는 자신의 갈비뼈를 뽑아 들고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이 같은 장면이 십여 개의 해골 사이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졌고, 그중에서 대여섯 구의 해골이 금새 파괴되었다.

혼전을 벌이는 해골들과 멀지 않은 곳에서는 도를 든 해골과 창을 든 거대한 해골이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도를 든 해골 전사는 연나였다.

상황은 거대한 해골이 확연히 유리해보였다.

거대한 해골의 뼈창이 번개처럼 연나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왔다.

창의 속도는 일반적인 해골의 반응속도를 훨씬 뛰어넘을 뿐더러, 상당히 까다로운 각도로 날아왔다.

바로 그때, 연나의 몸이 흐릿해졌다. 연나는 잔영을 남기며 가까스로 공격을 피했다.

연나는 거대한 해골의 옆에서 움직임을 멈추고 도를 휘둘렀다. 거대한 해골은 빠른 움직임으로 맞섰고, 창과 칼이 충돌하는 강한 힘에 밀린 연나가 뒤로 서너 걸음 밀려났다.

연나가 자세를 바로 잡기도 전에 거대한 해골의 창이 흰색 빛의 잔상을 그리며 순식간에 날아들었다.

연나는 창이 몸에 닿기 직전에 다시 한 번 가속해서 공격을 피해냈다.

이런 광경은 몇 차례 연달아 반복됐다. 연나가 가속을 하는 시간은 아주 짧았지만, 아주 교묘하게 상대의 공격을 매번 피해냈다.

결국 화가 난 거대한 해골은 창을 왼손으로 쥐고 오른손으로 꼬리뼈를 엮어 만든 채찍을 꺼내 휘둘렀다. 흰 채찍의 잔영들이 연나를 향해 휘몰아쳤다.

연나는 지금까지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잔상을 만들어 옆으로 피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채찍이 도중에 갑자기 방향을 틀더니 연나를 쫓았다.

움직임을 멈춘 연나가 다른 동작을 취하기도 전에, 바짝 쫓아온 채찍이 연나의 두 팔과 두 다리를 강하게 휘감아 묶었다. 연나가 몸부림을 쳤지만 조금도 벗어날 수 없었다.

연나는 두려운 듯 눈가의 화염을 떨었다.

거대한 해골은 기분이 좋아진 듯 입을 벌려 소리 없이 웃었고, 거대한 해골은 채찍을 잡아당기는 동시에 연나의 머리를 향해 장창을 매섭게 찔러 넣었다.

그 순간 연나는 발버둥 치는 것을 멈추더니 기이한 행동을 했다. 갑자기 고개를 홱 꺾어서 거대한 해골의 창을 머리로 들이받은 것이다.

퍽!

그런데 연나의 두개골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고, 오히려 뼈창이 부서져서 흩어졌다.

이를 본 거대한 해골이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에, 연나는 채찍으로 끌어당겨지는 힘을 이용해 거대한 해골의 머리를 그대로 자신의 머리로 들이받았다.

빠각!

거대한 해골의 두개골이 조각나며 그 안에서 푸른색 빛이 떠올랐다.

아직 허공에 떠 있는 연나는 입을 벌려 푸른빛을 흡입했다. 그러자 눈가의 녹색 영혼의 화염이 더욱 짙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연나는 입을 몇 번 위아래로 움직이더니 몸에 힘을 주어 채찍의 구속에서 벗어났다.

그대로 몸을 돌린 연나는 아직도 난전을 벌이고 있는 해골 무리 쪽으로 걸어갔다.

* * *

청아전 내에 있는 석목의 거처.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는 석목의 눈은 살짝 풀린 채였다.

한참 후, 정신을 겨우 다잡은 그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석목은 자신의 몸에 있는 저주를 푸는 것이 이토록 어려울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천신만고 끝에 성산까지 찾아온 것이 전부 헛수고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해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머릿속을 꽉 채운 걱정을 잠시 제쳐두려 했다. 그리고 쉬골단을 삼킨 후 두 눈을 감고 천상공을 수련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석목은 갑자기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얼굴은 영혼 깊은 곳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고통으로 창백해졌고, 전신에는 경련이 일어났다.

이를 꽉 물고 가까스로 몸을 일으킨 석목의 전신은 이미 땀에 젖어 있었다. 그는 급하게 옷을 찢어버린 뒤 침대머리에서 호리병을 꺼내 외뿔 살무사의 정혈을 가슴에 발랐다.

곧바로 시원한 느낌이 뼛속까지 스며들었고, 일각 정도 흐르자 가슴의 붉은 빛이 점점 사라졌다.

그러나 흐릿한 빛에 덮인 거대한 구렁이 토템은 여전히 살아 있는 것처럼 천천히 몸을 꿈틀거리고 있었다.

석목의 안색이 무척 어두워졌다. 정혈의 약효는 거의 없어진 상태였고, 이제는 며칠에 한 번씩 발작이 일어나기 시작했으며, 그 간격도 점차 짧아지고 있었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이제 그 외뿔 살무사의 정혈마저 거의 바닥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문제에 생각이 미치자 석목의 낯빛이 다시 흐려졌다.

* * *

같은 시간, 성설궁의 회의실.

흰 암석을 깎아 만든 회의실은 굉장히 넓었다. 벽에는 다양한 괴수의 두개골이 가득 걸려서 야만족 황무지다운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회의실의 가장 안쪽에는 몇 장 길이의 검은색 돌 탁자가 있어 시선을 끌었다. 탁자 뒤에는 늙은 야만족 노인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노인의 피부는 주름으로 깊게 갈라져 있었으며, 두 눈은 마치 잠에서 완전히 깨지 않은 것처럼 흐리멍덩했다. 바짝 마른 오른손에는 고목의 가지 같은 지팡이를 쥐고 있었다.

돌 탁자에는 각자 다른 차림의 야만족 여덟 명이 양쪽으로 나뉘어 앉아서 치열하게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백 년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기회입니다. 하늘이 우리 야만족을 돕는 것이나 마찬가지란 말입니다. 우리가 해족과 동맹을 맺는다면 비열한 인족이 다시는 성전의 발걸음을 막을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인족의 비옥한 토지는 우리 야만족의 낙원이 될 것입니다. 대제사장께서 허락해주시길 희망합니다!”

탁자의 좌측에 앉은, 악귀처럼 생긴 야만족이 탁자 뒤의 노인을 향해 가슴에 손을 가져다 대며 예를 표한 뒤, 침까지 튀기며 큰 소리로 말했다.

“흥, 망우(莽牛)부족은 살인만 좋아할 뿐 시야가 정말 좁군요. 해족은 우리 야만족과 인족보다도 강합니다. 우리가 해족과 연합해서 정말로 인족을 궤멸시킨다면 해족의 그 다음 목표는 바로 우리일 것입니다! 우리 금우(金羽)부족은 해족과의 연맹을 반대합니다.”

탁자 뒤의 대제사장이 입을 열기도 전에, 머리에 세 개의 금색 깃털을 꽂은 우측의 야만족 노인이 즉시 반대 발언을 했다.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가늘고 긴 눈 때문에 마치 독사처럼 보이는 노인이 반박에 나섰다.

“하하, 금 제사장은 걱정 마시오, 우리 야만족 황무지는 척박하고 메말랐으니 해족이 구태여 그런 행동을 할 이유가 없지 않소?”

“해족이 그런 행동을 할지 안 할지, 열사부족이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금우부족의 제사장이 가는 눈의 노인을 보며 물었다.

눈이 가는 노인이 대답하기도 전에, 옆에 있는 머리가 헝클어진 중년의 야만족이 소리쳤다.

“이번 성전에서 무수히 많은 용사를 잃는 희생을 치르면서 대제국에서 가장 척박한 3주를 겨우 빼앗았습니다. 비옥한 토지를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눈앞에 놓여 있는데 여기서 포기한다면 무슨 낯으로 희생된 용사들의 영령앞에 선단 말입니까!”

평만으로 보이는 쪽에 앉아 있는 녹색 옷차림의 노인이 이에 반박하려 했다. 그러나 가는 눈을 가진 열사부족의 노인이 재빨리 선수를 쳤다.

“모두 우선 제 말을 들어보십시오. 해족과 맹약을 맺되, 점령지는 공격을 한 종족이 차지한다는 조항을 넣으면 어떨까요? 그러면 해족은 인족을 향해 대대적으로 진격을 거행할 것입니다. 그때 우리 야만족은 병력을 전선에 배치하는 동시에 사자를 파견해 인족에게 몰래 휴전을 제안하는 것이지요.”

가는 눈의 노인은 일부러 잠시 말을 멈추더니, 곧 음산하게 웃으며 이야기를 계속했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병력의 피해 없이 양식과 무기 등 자원을 뜯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는 잠시 동안 병력을 움직이지 않다가, 인족의 주력이 이동해서 해족과 싸우는 사이에 빈틈을 노리는 것이지요. 그렇게 하면 인족을 일망타진하고 드넓은 토지를 전부 차지할 수 있을 겁니다. 또한 해족이 토지에 대한 주장을 하지 못하게 되겠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 흉만의 다른 세 제사장이 흥분한 표정으로 연거푸 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여전히 흐리멍덩한 눈을 가늘게 뜨며 하품을 할 뿐이었다.

푸른 옷을 입은 염아 제사장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그 계획은 너무 위험합니다. 인족의 3국 7종이 오랜 세월 쌓아온 학문적 자산은 분명히 적지 않을 겁니다. 설령 대량의 토지를 빼앗는다 해도 그것은 단순히 그들을 한쪽 귀퉁이로 몰아넣는 꼴 밖에 되지 않겠지요. 우리는 해족의 미움을 사는 동시에, 인족에게는 우리에 대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안겨주게 될 겁니다. 우리가 두 종족의 침공을 동시에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염아 제사장 옆의 녹색 옷을 입은 제사장도 천천히 덧붙였다.

“바다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당신들 흉만 부족은 아직 해족의 강함을 모르겠지요. 하지만 바다와 인접한 곳에서 거주하는 우리 평만 부족은 그들에게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나라(那罗)부족은 동의할 수 없습니다.”

우측 끝에 앉아 있는, 해골 목걸이를 목에 걸고 검은 옷을 입은 제사장 역시 동의했다.

“맞습니다. 해족은 과거 인족과 정전 협정을 맺었음에도 약속을 어기고 제멋대로 전쟁을 벌였습니다. 그런 종족의 말은 믿을 수 없습니다.”

그러자 망우부족의 제사장이 눈을 크게 뜨며 즉시 반박했다.

“그 일에 대해서 어떻게 해족을 탓할 수 있겠습니까? 비겁한 인족이 먼저 바다에 나가 해수(海兽)를 잡아 죽인 것이 그 이유입니다.”

곧 회의실은 해족과의 연합에 반대하는 평만과 찬성하는 흉만의 다툼으로 소란스러워졌다.

염아 제사장은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옆의 세 제사장에게 가볍게 손짓했다. 그러자 평만의 제사장들은 모두 발언을 멈추었다.

몸을 일으킨 염아 제사장이 대제사장을 향해 예를 표한 후 말했다.

“인족과 협정을 맺을 것인지 대제사장님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그러자 악귀 같이 생긴 망우부족의 제사장 역시 뒤따라 일어나며 말했다.

“해족과 협정을 맺을 것인지 대제사장님께서 결정을 내려 주십시오!”

다른 제사장들이 즉시 정숙하며 노쇠한 대제사장을 바라봤다. 그러나 대제사장은 여전히 잠에 빠진 것처럼 두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자 모두는 서로 얼굴을 바라보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침묵했다. 다시 자리에 앉은 염아 제사장과 망우부족 제사장의 얼굴에서는 짜증이 난 기색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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