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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100화 (100/916)

100화. 해족의 성녀

일각 후, 대제사장이 지팡이를 쥔 손을 살짝 떨더니 흐리멍덩한 두 눈을 떴다.

그 모습을 본 염아 제사장과 망우부족의 제사장이 대제사장을 향해 급하게 다시 물으려 했다.

그때 대제사장이 입을 열었다.

“논쟁을 벌일 필요는 없다.”

대제사장은 말을 이었다.

“흉만의 네 부족과 평만의 네 부족에서 각각 오십 명의 후천 토템용사를 뽑아서 용사의 문을 통과하게 할 것이다. 그들이 금지에 진입해 괴수를 사냥한 후, 획득한 괴수의 혼, 즉 수혼(兽魂)의 등급과 개수에 따라 승패를 결정한다. 시간은 열흘 이내로 제한한다.”

대제사장의 말에 제사장들이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들은 대제사장이 무슨 이유로 용사의 문을 앞당겨 개방하겠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용사의 문은 무척 거대한 공간과 이어지는 문이었다. 봉인되어 있는 그 공간은 고대의 풍경이 보존되어 자연의 기가 충만하였으며, 바깥세상에서는 이미 자취를 감춘 다양한 괴수가 남아 있었다.

척박한 황무지에서 생활하는 야만족의 각 부족에게 용사의 문 너머는 거대한 보물창고라고 할 수 있었다. 그곳을 앞당겨 개방한다면 모든 부족에게 손실이 따를 것이기에, 제사장들 모두 문을 개방하는 것을 꺼려했다.

그러나 대제사장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부족의 제사장들은 대제사장이 명령을 물릴 뜻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이번 대결이 가져올 득실을 각자 조용히 계산하기 시작했다.

곧 흉만 부족 제사장들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반면 평만 부족 제사장들의 얼굴은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평만은 거인의 혈맥을 상대적으로 적게 계승받은 덕분에 무력 측면에서 흉만보다 약세였다. 아무리 흉만이 인족과 전쟁을 치르는 중이라고 해도 여전히 평만의 승산은 훨씬 적었다.

좌중이 잠잠해지자 대제사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해족과 인족에서도 마찬가지로 각각 두 사람씩 용사의 문에 들여보내 도움을 줄 수 있도록 하겠다.”

대제사장 필력격의 말에 장내의 여덟 제사장 사이에서는 야단법석이 일어났다.

“대제사장님, 그것은 절대 안 됩니다!”

“용사의 문은 우리의 선조가 봉인한 금지입니다. 인족과 해족은 무슨 일이 있어도 들어가서는 안 됩니다. 그건 선조의 영령을 모욕하는 행위입니다!”

대제사장은 입술을 가볍게 움직이며 평온한 말투로 말했다.

“물론 그들을 그냥 참가시켜 주겠다는 것은 아니다. 최대 두 명까지 참가할 수 있으며, 한 사람당 십만 근의 정철 혹은 이십만 근의 식량을 제공해야 진입을 허락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이르라.”

크지 않았지만 위엄이 가득 담겨 있는 대제사장의 목소리에 모두 입을 다물고 조용해졌다.

한 사람이 늘어나면 당연히 한 사람분의 힘이 더해진다. 인족과 해족 두 종족이 야만족과의 동맹을 주도적으로 원한 만큼, 참가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이다.

제사장들은 여전히 망설이는 기색이었으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정철과 식량은 야만족 황무지에서 가장 부족한 물자였기 때문이다. 또 고작 네 명의 인원이라면 백 명의 야만족 용사에 비해 얼마 되지 않았다.

열사부족의 가는 눈을 가진 노인이 물었다.

“외람되오나 대제사장님, 괴수의 등급에 따라서 수혼의 품질 역시 천차만별인데, 어떤 방식으로 계산할 것인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대제사장이 천천히 말했다.

“간단하다. 후천초기에 해당하는 괴수의 혼을 보통 수혼이라고 볼 때, 중기는 보통 수혼의 열 배, 후기는 백 배, 대원만은 천 배, 선천초기는 만 배로 가늠한다.”

말을 마친 대제사장의 눈꺼풀이 다시 잠에 들려는 듯 처졌다.

그 모습을 본 제사장들은 모두 몸을 일으켜 자리에서 물러났다. 회의실에는 곧 잠에 들려는 대제사장만 남았다.

잠시 후, 성산의 중턱에 위치한 청아전.

염아 제사장은 다른 세 부족의 평만 제사장과 함께 긴급하게 대책을 상의하기 시작했다.

본래 흉만에 비해 무력이 뒤쳐진 평만 입장에서 이번 시합은 어떻게 봐도 불공평했다. 그들은 인족인 화무공주와 석목에 대해서는 아예 고려하지 않는 듯 했다.

두 시진 후, 잇따라 자리를 뜨는 제사장들의 얼굴에는 여전히 근심이 가득했다.

* * *

“대제사장님의 뜻은 용사의 문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식량이나 정철을 지불하라는 것인가요?”

염아 제사장을 바라보는 화무공주의 표정은 그리 좋지 않았다.

“맞습니다. 대제사장께서 결정을 내린 것이니 바뀌지 않을 겁니다. 그 대신 그곳에서 얻는 모든 것은 마음껏 가져도 됩니다.”

염아 제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화무공주는 눈살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옆에 있던 석목은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속으로 매우 기뻐하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정말 막다른 길에 몰렸다고 생각했는데 다시 한 번 기회가 생긴 것이다.

잠시 후, 화무공주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좋습니다. 십만 근의 정철과 이십만 근의 식량을 내고 두 사람이 참가하겠습니다.”

재물을 갈취해가려는 수작이라는 게 뻔히 보였으나, 지금의 상황에서는 따르는 수밖에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금 각 부족이 준비를 하고 있으니 용사의 문이 정식으로 개방될 때 사람을 보내 알리도록 하겠습니다.”

염아 제사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이어서 화무공주는 염아 제사장에게 용사의 문에 대해 물었다. 염아 제사장은 숨길 생각이 없는 듯 두 사람에게 흥미진진하게 설명해줬다.

용사의 문은 고대 야만족의 여러 제사장이 힘을 합쳐 봉인한 지역이었다.

문 너머의 공간은 매우 광활했으며, 고대의 풍경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외부에서는 일찍이 자취를 감춘 괴수가 여전히 남아 있으며, 그 중에는 고대의 괴수도 상당수 존재한다고 했다.

용사의 문은 십 년에 한 번씩 열린다. 성지에서 제사가 거행될 때마다 대제사장이 기도를 드린 후 문을 개방한다. 그러면 각 부족은 군대를 이끌고 가서 괴수를 사냥하고 수혼을 얻는다.

이것은 각 부족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의식이었다. 용사의 문에 들어가서 얻은 괴수의 혼은 외부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그 품질이 훨씬 좋기 때문이었다.

* * *

그 이후 석목은 성지 근처의 야만족 시장을 한 번 찾은 것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수련에 매진했다.

석목은 시장에 가서 민도에게 받은 고대의 처방전에 따라 다수흉망을 억제할 수 있는 가루약의 재료를 샀다. 또 하급 부적을 제작하기 위한 가죽 부적지도 구입했다.

예전에 그가 시험해본 결과, 가죽 부적지로 만든 경신부의 속도는 일반적인 부적지로 만든 부적보다 삼 할 가량 빨랐다.

그 외에도 석목은 중급 부적인 한음부(寒阴符)를 몸을 지키는데 사용하라며 화무공주로부터 특별히 선물받기도 했다.

비록 한음부는 중급 부적 중에서는 상당히 흔한 부적이었지만, 지금의 석목으로서는 제작할 수 없는 것이었다.

이렇게 철저한 준비를 하면서 석목은 이번 여정에 어느 정도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 * *

며칠 후, 백마산의 뒤의 산골짜기.

족히 만 평은 되어 보이는 광활한 산골짜기 바닥에는 몇 장 크기의 직사각형 흰색 바위가 상당수 세워져 있었다.

직경이 백 장 정도 되어 보이는 거대한 원형 진을 이루며 줄지어 서 있는 이 거대한 바위들의 표면에는 핏빛 무문(巫文)이 새겨져 있었다.

특이한 점이라면 몇몇 바위의 위에 직사각형의 흰 바위가 하나 더 눕혀져 있거나 세워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는 언뜻 보기에는 무질서해 보이면서도 무언가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거대한 원형 진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크기가 일 장 가량 되는 검은 제단이 있었다.

그 제단 앞에서 여덟 명의 야만족 제사장이 말없이 경건하게 서서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단 앞의 공터에는 복장이 각기 다른 야만족 백여 명이 두 무리로 나뉘어 서 있었다.

그중 한쪽의 야만족들은 다른 쪽보다 대부분 덩치가 컸으며, 확연히 강한 기세를 지니고 있었다. 기세가 강하고 덩치가 큰 쪽이 바로 흉만 부족의 토템용사들이었으며, 다른 한 쪽은 평만 부족의 용사들이었다.

석목은 화무공주와 나란히 서서 평만 부족의 옆에 서 있었다.

또 흉만 부족의 곁에는 괴상한 생김새를 한 사람 일고여덟 명이 우두머리로 보이는 파란 옷의 소녀를 둘러싸고 있었다. 소녀는 열서너 살 정도의 나이로 보였는데, 피부가 눈처럼 하얗고 용모가 아름다웠다.

그녀는 거대한 바위들이 세워져 있는 것이 무척이나 흥미로운 듯, 커다란 두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쪽을 자세히 관찰하고 있었다.

그녀의 주위에 있는 이들은 생김새는 인족과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전신이 물고기 비늘로 덮여 있었으며 귀 근처에는 아가미로 보이는 것이 자라나 있었다. 한 명은 하반신이 물고기의 꼬리 모양이었는데, 전신의 근육이 발달하고 한 손에 삼지창을 들고 있었다.

이 괴인들은 화무공주를 향해 노골적으로 도발적인 의미가 가득 담긴 차가운 눈빛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화무공주는 전혀 개의치 않는 듯 미소 지으며 그들과 눈을 맞추었다.

석목은 그 기회를 틈타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기 시작했다. 괴인들은 전부 해족이었고, 파란 옷을 입은 소녀는 바로 해족의 성녀인 것 같았다.

하루 전 석목은 해족 측에서 참가하는 두 명 중 성녀가 포함되어 있다는 이야기를 민도로부터 전해 들었다.

그런데 석목은 그녀가 왠지 낯익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듯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석목은 문득 누군가의 적대적인 시선에 경계심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살짝 돌려 시선이 쏘아져오는 쪽을 바라보았다.

석목을 바라보던 이는 제사장의 옷을 입고 붉은 뼈로 만든 석장을 든 야만족 노인이었다. 가늘고 긴 눈은 독사의 그것처럼 보였으며, 주름이 가득한 피부는 푸른색을 띠고 있었다.

야만족 노인은 석목과 눈이 마주치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차가운 시선을 거두었다.

바로 그때, 백여 명의 야만족이 산골짜기의 입구를 바라보며 소란스럽게 떠들기 시작했다.

석목도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한 야만족 노인이 고목의 가지처럼 보이는 평범한 지팡이를 쥐고 산골짜기 입구 쪽에서 천천히 다가오고 있었다. 노인은 바람도 견디지 못할 만큼 마르고 약해 보였다.

그러나 8대 부족의 제사장과 백여 명의 야만족 토템용사는 노인을 본 순간 자세를 바로잡았다. 서로를 도발적으로 바라보던 눈빛도 순식간에 감추었다.

그 순간 석목은 크게 놀랐다.

야만족들의 태도를 보고, 그 여위고 작은 그 노인이 바로 야만족의 대제사장인 필력격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아챈 것이다.

노인의 모습은 자연을 지배한다는 소문 속의 인물과는 전혀 연상 짓기 힘들었다. 몸에서는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그저 평범한 야만족 노인과 전혀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필력격은 매우 느린 속도로 걸어오고 있었다. 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온힘을 쥐어짜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럼에도 야만족들은 평온한 표정으로 조용히 노인을 주시하고 있었다.

순간 공간이 적막에 휩싸였다.

일각 후, 대제사장이 검은색 제단에 올라서자, 여덟 부족의 제사장이 곧바로 흩어지며 제단을 동그랗게 둘러쌌다.

“만신(蛮神)의 용사들이여. 용사의 문이 곧 개방될 것이다. 모두 준비가 되었느냐?”

커다란 제단 위에 선 필력격은 흐리멍덩해 보이는 두 눈으로 좌중을 훑어보며 천천히 말했다.

“네!”

토템용사 백여 명의 목소리가 뒷산의 산골짜기를 뒤흔들며 하늘 높은 곳 까지 울려 퍼졌다.

이어서 그들은 고함을 지르며 바위가 세워져 있는 곳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석목과 화무는 서로를 한 번 바라보고 평만의 토템용사들 뒤를 따랐다. 해족의 성녀도 주위의 동료들에게 작은 소리로 몇 마디 건네고 반인반어와 함께 흉만을 쫓았다.

직경이 백 장이나 되는 거대한 원형의 진은 백여 명이 들어갔는데도 조금도 좁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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