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1화. 청마랑(青魔狼)
평만과 흉만, 두 무리의 토템용사가 순식간에 진법의 중앙에 섰다.
그들은 확연하게 경계를 나누어 선 채 적의가 넘치는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모두 진법 안으로 들어가자 제단 쪽에서 무언가 읊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이 고개를 돌려보니 검은 제단 위에서 대제사장 필력격이 독특한 박자에 맞추어 괴상한 춤을 추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여전히 흐리멍덩했지만, 비틀거리던 양팔과 양다리는 놀랍도록 민첩해져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걷는 것조차 힘들어보이던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처럼 보일 정도였다.
여덟 제사장은 장엄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주위의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두 팔을 들어 올리고 무언가를 읊조리고 있었다.
곧 제단을 중심으로 한 수백 장 내에서 돌연 자연의 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러자 허공에서 빼곡한 빛의 점들이 어렴풋이 나타났다. 그것들은 마치 파도처럼 대제사장을 향해 세차게 쏟아졌다.
대제사장을 중심으로 모인 빛의 점들은 끊임없이 회전하며 빛의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동시에 법력의 파동이 사납게 주위로 뻗어나가며 바람기둥을 일으켰다.
공중에는 바람과 구름이 일며 먹구름이 짙게 깔렸고, 눈부시게 작열하던 태양은 그 먹구름에 가려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산골짜기가 순식간에 어둠에 덮이자 필력격이 갑자기 춤을 멈추고 괴이한 자세를 취했다. 그와 동시에 주위의 여덟 제사장이 주문을 읊조리는 소리도 뚝 끊겼다.
바로 그때, 필력격의 손에 들린 지팡이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평범해 보이는 그 지팡이에서 천지라도 멸할 수 있을 것 같은 엄청난 기운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필력격의 몸에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마치 신성과 같은 기운이 느껴졌다.
그 순간, 진법을 구성하고 있는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무문이 몽롱한 붉은 빛을 발산하기 시작했다.
이 놀라운 광경을 바라보던 석목은 문득 대제사장이 어느 정도의 실력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때 석목은 갑자기 품속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놀라서 손을 품속에 집어넣으려 했다.
그와 동시에 해족의 성녀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아름다운 눈을 돌려 사람들 사이로 석목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놀라움과 기쁨이 섞인 표정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벌려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붉은 빛이 갑자기 하늘에서 쏟아지더니 진법 안에 있는 모두를 덮었다.
붉은 빛이 완전히 사라진 뒤, 거대한 진법 안에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석목은 어둠에 뒤덮인 공간에서 의지할 곳 없는 낙엽처럼 나부끼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상태는 오래가지 않았다.
거대한 힘이 갑자기 그의 몸을 아래로 강하게 끌어당겼다. 석목이 눈앞에 무수한 별빛이 반짝이는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그의 몸이 무언가 단단한 곳에 부딪혔다.
석목은 어깨에 얼얼한 고통을 느끼며, 차가운 공기를 마시고 몸을 일으켰다.
그가 있는 곳은 울창한 수풀 속이었다.
곳곳에는 가지와 잎이 무성한 거대한 나무가 자라 있었고, 바닥에도 잡초들이 무성해서 도처에서 생기가 느껴졌다.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신 석목은 이곳에 자연의 기가 상당히 충만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용사의 문에 대한 설명은 일찍이 염아 제사장과 민도에게 들었다. 그러나 직접 와서 보니 말로 들은 것과는 또 다르게 느껴졌다.
석목은 운철흑도에 손을 가져다대며 경계하는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주위는 평온했으며, 수상한 움직임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제야 안심한 석목은 품속에서 노란 괴수의 가죽을 꺼냈다. 그것은 민도에게 받은 이 일대의 대략적인 지도였다.
석목은 주위를 한 번 훑어본 뒤, 근처에서 가장 커다란 고목을 골라서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원숭이처럼 순식간에 고목의 가장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석목이 오른 나무는 주위의 나무들보다 훨씬 키가 커서, 사방 몇 리의 광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석목은 자신이 있는 곳이 두 산봉우리의 중간에 위치한 산림이며, 우측에는 더욱 무성한 삼림이, 좌측으로 멀지 않은 곳에는 면적이 상당히 넓은 해수가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또 지도와 주위 풍경을 대조해보며, 자신이 지도의 동남쪽 구역에 위치하고 있다는 것을 금새 파악했다.
그런데 지도를 들여다보던 석목의 눈빛에 무언가 살짝 주저하는 기색이 떠올랐다.
그의 손에 쥐어진 지도에는 금지(禁地)의 외곽구역이라 불리는, 기존에 탐색된 일부 구역만 표시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도의 가장 북쪽 끝단에는 동쪽에서 서쪽을 향해 가로지르는 거대한 강이 있었는데, 그 강의 북쪽은 중부구역이라 했다.
중부구역은 외곽구역보다 위험한 환경이었고, 선천고수와 맞먹는 힘을 가진 괴수들이 상당수 있었다. 그래서 금지가 개방된 이래 그곳에는 각 부족의 선천용사들만이 진입해봤다고 했다.
그래서 중부구역의 지도는 외곽구역보다 상세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미지의 구역도 아니었다.
중부구역보다 더 깊은 곳은 중심구역이라 불렸다. 그곳은 이제껏 몇몇 지계의 강자만이 가본 적이 있었다. 소문에 따르면 지계의 강자와 필적하는 무력을 가진 괴수가 상당수 존재하는, 진정한 고대의 모습이 갖춰진 구역이라 했다.
이 금지가 얼마나 넓은가는 야만족들 역시 정확히 알지 못했다. 단지 끝도 없이 넓으며, 끝까지 가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만 알려져 있었다.
석목은 북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금지에 온 주 목적은 다수흉망의 사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중부구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다.
시선을 거둔 석목은 나무에서 뛰어내렸다. 그리고 북쪽을 향해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이곳에는 자연의 기가 짙어서 각종 귀한 영약이 많았다. 석목은 이동을 시작한지 얼마 안 되어 바깥에서는 보기 드문 영약을 이미 여러 개 발견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와 상응하듯 각종 괴수 역시 매우 많았다. 그래서 석목은 손만 뻗으면 얻을 수 있는 영약들을 전부 포기하고 최대한 빨리 걸음을 재촉했다.
이 각 후, 석목은 어느 돌다리의 한쪽 끝단에 서 있었다.
그리고 반대쪽 끝단에는 크기가 일 장 가까이 되는 거대한 푸른 늑대 한 마리가 서서 길을 막고 있었다.
늑대는 핏빛이 감도는 눈으로 먹잇감을 보듯 석목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 돌다리의 길이는 고작 칠팔 장 정도였지만, 양쪽 절벽을 연결하고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돌아서 간다면 최소 반나절은 낭비하게 될 게 분명했다.
“청마랑(青魔狼)!”
석목은 눈앞의 거대한 늑대를 관찰한 뒤 혼잣말을 했다.
이 푸른 늑대는 덩치가 매우 컸고, 몸에는 푸른 털이 빼곡하게 자라 있었다. 또 머리에는 푸른 뿔이 하나 있었다.
겁먹은 기색이 없는 석목의 눈빛에 자극받았는지, 청마랑이 갑자기 포효하며 그를 덮쳤다.
순식간에 석목의 앞까지 다가온 늑대가 비린내를 풍기는 입을 벌려 그의 목을 노렸다. 거대한 늑대의 이빨은 마치 비수와 같이 날카로웠다.
그러나 석목의 신영이 갑자기 흐릿해지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푸른 늑대는 목표를 잃고 당황했다.
그때 석목이 늑대의 뒤에서 나타났다.
석목은 늑대의 머리를 향해 주먹을 날렸다. 옥석처럼 하얗고 금속처럼 광택이 흐르는 그의 주먹이 청마랑의 두개골에 명중했다.
거대한 돌에 강하게 찍힌 듯한 힘이 청마랑의 머리에 전해지며, 무언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청마랑의 거대한 몸이 날아가더니 바닥에 굴렀다.
잠시 뒤 석목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떠올랐다.
이 거대한 늑대는 후천중기의 수준에 불과했다. 그런데 그가 전력으로 시전한 쇄석권을 맞고도 두개골이 조금 골절되기만 했을 뿐 죽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다른 야만족이 이 광경을 봤다면 놀랐을 게 분명했다.
청마랑은 몸이 단단하기로 유명한 괴수였다. 특히 두개골의 강도는 철보다도 높았기 때문에, 어느 야만족도 청마랑의 머리를 깨부수고자 하는 시도를 하지 않았다.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내뱉던 청마랑이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청마랑의 뿔이 갑자기 푸른빛으로 반짝이더니, 커다란 바람의 칼날이 석목을 향해 날아왔다.
석목 역시 입을 열어 흰색 빛을 뿜어냈다.
쾅!
석목의 기폭술과 청마랑의 바람의 칼날이 충돌하며 폭발했다.
그 순간 석목이 던진 운철흑도가 폭발을 뚫고 청마랑의 가슴을 향해 날아갔고, 이어 피가 사방으로 흩날렸다.
청마랑은 옆으로 몸을 날렸으나, 완전히 피하지 못하면서 한쪽 앞발이 운철흑도에 꿰뚫렸다.
그 틈을 타서 재빨리 달려간 석목이 다리를 휘둘러 청마랑의 허리를 걷어찼다.
뚝!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허공에 울려 퍼졌다.
청마랑은 발에 차여 한참을 날아가 바닥에 처박혔다. 허리가 골절된 듯 이상하게 비틀린 청마랑이 고통을 참지 못하고 비명을 질렀다.
석목은 쓰러진 청마랑에게 다가가 다시 한 번 청마랑의 머리에 주먹을 휘둘렀다.
빠각!
청마랑의 머리가 마치 수박처럼 쪼개지며 빨간 피와 하얀 뇌수가 뒤섞여 나왔다. 청마랑의 거대한 몸은 몇 차례 경련을 일으키더니 움직이지 않았다.
곧 주먹 크기의 푸른빛이 청마랑의 머리에서 나오더니 시체의 상공에 떠올랐고, 푸른빛 사이로 어렴풋이 작은 늑대의 모습이 보였다.
석목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푸른빛의 구슬을 관찰하다가 붉은 가죽 주머니를 꺼냈다.
붉은 주머니의 표면에는 무문이 새겨져 있었다. 금지에 들어오기 전 성설궁에서 나눠준, 수혼을 담기 위한 주머니였다.
석목은 주머니에 법력을 주입했다. 쪼글쪼글하던 주머니가 반짝이더니 빛의 구슬을 끌어당겼다.
푸른빛이 주머니 속에 들어가자 석목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운철흑도를 챙겨 청마랑의 뿔을 잘라냈다. 청마랑의 뿔은 법기를 연마할 때 사용되는 재료로 상당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석목은 늑대의 시체를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피비린내를 맡은 다른 괴수들이 몰려들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청마랑의 시체를 처리한 석목은 다리를 건너 계속 북쪽으로 이동했다.
푸른 초원의 바위 위에 한 아름다운 소녀가 홀로 서 있었다.
소녀의 파란 옷이 바람에 따라 펄럭이는 모습은, 마치 아름다운 선녀가 인적이 드문 산골짜기에 현신한 것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그녀는 넋을 놓은 채 어느 먼 곳을 줄곧 바라보고 있었다.
한참 후, 소녀는 붉은 입술을 움직이며 중얼거렸다.
“그 였어….”
바로 그때, 멀리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나더니 소녀를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소녀는 고개를 가볍게 저으며 정신을 다잡은 뒤, 검은 그림자를 향해 몸을 돌렸다. 그 검은 그림자는 가까워질수록 점점 크고 뚜렷하게 보였다.
그림자의 정체는 해족의 반인반어 사내였다. 그는 어느새 검은색 갑옷을 갖춰 입고 있었다.
반인반어 사내는 물고기의 꼬리를 뱀처럼 좌우로 흔들며 소녀의 곁으로 빠르게 다가왔다.
“성녀님!”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입을 열자 마치 두 개의 나무가 마찰하는 소리처럼 낮고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출발하죠.”
소녀는 담담하게 내뱉은 뒤 바위에서 뛰어내려 북쪽으로 향했다.
반인반어 사내는 소녀에게 대답하며 급히 그녀의 뒤를 쫓았다.
* * *
두 언덕 사이의 움푹 파인 땅에서 역한 피비린내가 풍겨왔다.
그곳에는 열 마리가 넘는 다양한 크기의 도마뱀 시체가 널려 있었다. 두 동강난 시체들에서 흘러나온 피가 바닥에서 물길을 이루었다.
시체들의 옆에는 여우가죽 망토를 두른 화무공주가 서 있었다. 그녀는 물주머니를 한 손에 들고 은색 장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고 있었다.
칼날에 묻은 피를 다 닦아낸 그녀는 언덕 꼭대기로 뛰어올라갔다.
그리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내 어느 방향을 향해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