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부서진 조각상
어두운 협곡에서 다섯 명의 야만족이 수백 마리의 핏빛 박쥐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박쥐 하나하나는 몸집이 사람의 머리만큼이나 컸으며,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 수가 엄청나게 많아서,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핏빛 안개처럼 보였다.
박쥐들이 급강하 하며 야만족들을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다섯 야만족은 전혀 당황하지 않았다. 그들은 서로 등을 지고 원을 만든 채 무기를 휘둘러 몸을 보호했다.
그들에게 접근을 시도한 박쥐는 하나같이 몸이 토막 나는 신세를 면하지 못했다.
야만족들은 진형을 그대로 유지한 채 앞쪽의 산골짜기 방향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다섯 야만족 중 세 명은 붉은색 야만족의 옷을 입고 있었다. 그들은 열사부족의 야만족인 듯, 모두 오른쪽 팔에 구렁이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일행의 우두머리는 퀭한 두 눈을 가진 대머리 사내로, 가끔 가느다란 동공을 차갑게 반짝이곤 했다. 그는 후천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이였다.
다른 두 야만족 역시 후천후기의 경지에 오른, 결코 약하지 않은 이들이었다.
이들 셋은 모두 푸른색 채찍을 사용했다. 마치 그들의 팔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채찍이 지나간 곳에는 여지없이 터진 박쥐의 잔해가 흩날렸다.
나머지 두 야만족은 덩치가 매우 크고 피부가 검었다. 이들이 착용한 푸른색 연갑에는 망우부족의 표식인 검은 소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 두 사람의 경지 역시 결코 낮지 않았다. 그들 중 머리를 땋은 사내는 후천대원만의 토템용사였는데, 쇳덩이처럼 단단해 보이는 근육을 가지고 있었다. 얼굴이 까만 사내는 후천후기의 토템용사였다.
둘은 거대한 양날도끼를 무슨 볏짚이라도 휘두르는 것처럼 가볍게 휘두르고 있었다.
핏빛 박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덤볐으나, 다섯 사람의 연합을 당해내지 못했다. 다섯 야만족이 산골짜기에 근접했을 때 박쥐의 숫자는 백 마리도 채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박쥐들은 산골짜기에 쏟아지는 햇빛이 두려운 듯, 갑자기 날갯짓을 하더니 협곡으로 돌아갔다.
머리를 땋은 거한이 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휴, 후천의 경지도 되지 않아 수혼도 아무 쓸데없는 주제에 상당히 성가시게 하는군.”
그러자 열사부족의 대머리 사내가 푸른 채찍을 거두면서 웃으며 말했다.
“그렇긴 합니다만, 이 천협곡(天峡谷)은 북쪽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지나야만 했던 길입니다. 게다가 선천용사에 근접한 망곤 형에게 이런 박쥐들이 어디 상대나 되겠습니까. 그저 몸을 조금 풀었다고 생각하시지요.”
대머리 사내의 칭찬을 들은 망곤이 으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망곤 형은 앞으로 어쩔 계획이죠?”
대머리 사내가 산골짜기 방향을 바라보며 물었다.
“당연히 북쪽으로 가야지. 외곽의 괴수들은 너무 약해서 처치한다 해도 높은 등급의 수혼은 얻지 못해. 이번 사냥에서는 특히 보상이 풍부하니 최대한 많은 수혼을 확보해야 하네.”
머리를 땋은 거한이 대답했다.
예전에는 각 부족에서 선출되어 금지에 들어온 용사들에게 수혼의 삼 할을 보상으로 제공했다. 용사들이 최대한 많은 수혼을 구해오도록 독려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 보상이 무려 5할이나 됐다. 파격적으로 높은 수준이었다.
대머리 사내가 신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하하, 수혼을 쓸어 모으실 생각인가 보군요. 그렇다면 현재 저희 셋이 가지고 있는 모든 수혼을 대가로 망곤 형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고 싶습니다.”
망곤은 그들의 허리춤에 걸려 있는 수혼 주머니에 시선을 보내며 물었다.
“음… 무슨 부탁이지?”
대머리 사내가 천천히 말했다.
“망곤 형이 사람 하나를 처리해줬으면 좋겠습니다.”
망곤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죽여 달라? 어느 부족에 속한 사람이지?”
그러자 대머리 사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상대는 야만족이 아닙니다. 대제국의 화무공주와 함께 금지에 들어온 인족의 사내지요. 망곤 형도 분명히 본적이 있을 겁니다.”
망곤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런 자가 있었던 것도 같군. 그 자가 열사부족에 무슨 원한이라도 산 것인가?”
“그 자가 몇 달 전 우리 열사부족의 소군주를 살해했습니다. 성산에서는 손을 쓰기가 힘들었지만 금지에 들어왔으니 빚을 갚아야지요!”
대머리 남자의 목소리에는 살의가 가득했다.
“좋다. 약속하지.”
망곤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대답했다.
그러자 망곤의 옆에 있던 까만 얼굴의 남자가 물었다.
“잠깐만요. 제 기억이 맞다면 그 사람은 고작 후천중기의 실력을 가진 것 같던데요. 어째서 저희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죠?”
“소군주를 살해한 것으로 보아 그는 상당한 실력자인 것 같습니다. 만일의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두 분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그럼….”
대머리 남자의 말에 검은 얼굴의 사내가 다시 무언가 물으려 했다.
그러나 망곤은 손을 저어 그의 말을 끊으며 짜증 섞인 말투로 말했다.
“됐다. 그 자는 지금 어디에 있지? 어서 처치하고 계속 괴수를 사냥해야겠다.”
“감사합니다!”
대머리 사내가 인사를 하며 품속에서 원반을 꺼냈다.
원반의 표면에는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구렁이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고, 중앙에는 뱀의 혓바닥처럼 구불구불한 선홍색 바늘이 있었다.
대머리 사내가 주문을 외우자 바늘이 흔들거리더니 서북쪽 방향을 가리켰다.
“저쪽입니다. 가시지요.”
대머리 사내가 눈을 차갑게 반짝이며 말했다.
그리고 앞장서서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어느 연못가에서 빨간 멧돼지의 모습을 한 괴수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그 괴수는 몸길이가 삼 장 정도는 되어보였고 높이도 사람만큼 컸다.
입에는 날카로운 송곳니가 자라 있었고, 몸은 비늘에 덮여 있어 매우 사나워 보였다.
휙!
그때 검은 화살이 근처의 어느 나무 위에서 날아와 괴수에 머리에 깊게 박혔다.
괴수는 처절한 비명을 질렀고, 이리저리 날뛰며 거대한 나무를 몇 그루나 쓰러뜨린 뒤에야 땅에 쓰러졌다. 괴수의 머리에서는 선혈이 뿜어져 나왔다.
멧돼지 괴수는 쓰러진 뒤 몸을 몇 번 떨더니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화살이 날아온 연못가의 나무 위에서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뛰어내렸다. 그는 바로 석목이었다.
석목은 멧돼지 괴수 곁으로 다가가서 허리춤에서 주머니를 꺼냈다. 주머니에 진기를 살짝 주입하자 괴수의 머리에서 붉은색 수혼이 떠올라서 주머니 속으로 흡수됐다.
그의 주머니에는 벌써 스무 개가 넘는 수혼이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겨우 후천중기의 수혼이었다.
석목은 멧돼지의 머리에서 검은색 화살을 뽑아낸 뒤 계속해서 이동했다.
어느덧 석목은 높고 큰 두 산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비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그리고 산골짜기는 갈수록 좁아지는 것 같았다.
석목은 혹시 막힌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가죽 지도를 꺼내 들여다봤지만 이곳은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석목이 뒤를 돌아보았다. 산골짜기에 들어선 지 이미 상당히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만약 왔던 길로 돌아간다면 너무 많은 시간을 소모해야 할 것 같았다.
석목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대로 나아가기로 결정했다.
산골짜기는 앞으로 갈수록 점점 좁아지더니, 나중에는 양쪽에 있는 높은 산봉우리의 거대한 그림자에 완전히 덮여버렸다.
게다가 주위의 무성한 나무 때문에 지면에도 마른 나뭇잎이 두껍게 쌓여 있었다. 얼마나 오랫동안 쌓였는지, 발로 밟으니 마치 두꺼운 면 이불에 올라간 것처럼 푹신푹신했다.
석목은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지만 얼굴은 점점 찌푸려졌다.
한 시진 후, 석목은 발걸음을 멈추고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앞쪽의 협곡은 완전히 막혀서 더 이상 길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협곡의 양쪽 절벽은 매우 가파른데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상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높았다. 기어 올라간다면 얼마나 오래 걸릴지 알 수도 없을뿐더러, 설령 올라간다 하더라도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보장이 없었다.
석목은 한숨을 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그때 옆에 있는 관목 속에 무언가 검고 매끄러운 물건이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석목은 다가가서 나무를 억지로 벌리고 들여다보았다. 순간 그의 얼굴에 멍청한 표정이 떠올랐다.
그 물건은 한 척 정도 크기였는데, 세월의 흔적이 상당히 묻어 있는 듯 보였다. 아마도 어떤 조각상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분인 것 같았다.
석목의 얼굴에 이번에는 놀라움이 떠올랐다.
금지에 진입한 이후로 잡초가 우거진 원시의 세계밖에 접하지 못했는데, 이 조각상은 사람의 손이 닿은 물건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설마 야만족의 선조가 만든 것인가?”
그 물건을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던 석목이 중얼거렸다.
고개를 돌려 주위의 수풀을 둘러보던 석목의 눈빛이 갑자기 빛났다. 그는 왼쪽 전방으로 빠르게 걸어가서 가시덩굴을 뽑아냈다.
그 안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풀숲에 쓰러져 있는 더욱 커다란 석조 조각품이었다.
그것은 새나 짐승과 같은 동물의 조각상이 아닌, 반인반수 석상의 상반신이었다. 머리 위로 솟아 있는 두 귀, 입 밖으로 드러난 송곳니 등 마치 늑대인간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석상은 토템의 힘을 발동시킨 야만족의 모습과 매우 닮아 있었기에, 진짜로 야만족의 선조가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었다.
석상 앞쪽의 수풀 속에는 파손된 조각상의 조각들이 너저분하게 널려 있었다.
놀란 석목은 앞으로 걸음을 내딛었고, 걸어갈수록 파괴된 석상은 점점 많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돌기둥과 무너진 벽 등의 잔해도 보였다.
석목은 좀 더 빠른 속도로 걸었다. 그러자 갈수록 수목의 수가 점점 적어졌다.
이윽고 수풀에서 벗어난 석목은 몸을 흠칫 떨었다.
눈앞에 나타난 것은 매우 넓은 공터였다. 그 가운데에는 고대의 유적으로 보이는 파괴된 건축물들이 있었다.
유적의 중심에는 상대적으로 온전해 보이는, 절반쯤 붕괴된 반구형 건축물이 있었다. 이미 무너져서 황폐해진 건축물들이 달을 에워싼 별처럼 그 주위를 둘러싸고 있었다.
유적의 곳곳을 훑어보던 석목의 시선이 반구형 건축물에 고정됐다.
절반쯤 무너진 건축물 안에는 높이가 십 장이 넘는 거대한 조각상이 세워져 있었다. 방금 전 밖에서 본 조각상과 상당히 닮은 반인반수의 석상이었다.
석상은 흉악하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고, 분노한 듯 송곳니가 난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있었다. 머리에는 산양의 뿔처럼 둥글고 굽은 긴 뿔이 자라 있었으며, 귀는 양의 그것과 매우 흡사했다.
드러난 상반신의 근육은 무척이나 단단해 보였고, 두 팔은 인족의 것과 같았지만 발은 양의 발굽 모양이었다.
석상은 한 팔은 높이 들고 다른 한 팔은 아래로 늘어뜨린 자세였다. 높이든 손에는 피리와 비슷한 물건이 들려 있었는데, 구멍이 세 개 밖에 없어서 무엇에 사용하는 물건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석상은 주변의 무너진 유적들과는 딴판으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조각상을 이리저리 관찰하던 석목은 다시 한 번 석상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갑자기 횡포한 기운이 몰려왔고, 석목은 숨이 막혀올 정도의 압박을 느꼈다.
놀란 석목이 급하게 시선을 돌리자 그제야 몸이 천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
석목은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꼈다.
이렇게 특별한 조각상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유적은 결코 평범한 장소일 리가 없었다. 짐작컨대 고대의 야만족에게 있어서 굉장히 중요한 장소인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