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괴수의 물결
이각 후, 몸 상태가 회복된 그는 야만족들의 시체를 뒤져 전리품을 챙겼다.
야만족들이 갖고 있었던 다섯 개의 수혼 주머니에는 상당히 많은 수혼이 들어 있었다. 그러나 금지에 들어온 지 아직 하루 밖에 지나지 않은 탓에 대부분 초기와 중기의 수혼 뿐이었다.
석목은 수혼들을 모조리 자신의 수혼 주머니에 옮겨 넣은 뒤, 야만족들의 병기로 시선을 돌렸다.
다섯 명의 병기 중 대머리 사내의 푸른색 채찍과 거한의 검은색 도끼는 부문이 새겨진 무기(巫器)였고, 나머지 세 개는 평범한 무기였다.
그 외에도 석목은 대머리 사내의 몸에서 두둑한 금덩어리와 검은 가죽 부적 두 장을 찾아냈다.
두 장의 부적은 같은 무문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미루어 동일한 종류의 무문 부적인 것 같았다. 강력한 법력의 파동을 뿜어내는 것으로 볼 때 상당히 강한 위력이 있는 듯했지만, 주인인 야만족 사내는 이것을 미처 사용도 해보기 전에 살해당한 것이었다.
부적들을 챙긴 석목은 기회가 있을 때 반드시 시전해 봐야겠다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어 석목은 금덩어리를 챙기고, 무기 중에서는 휴대하기가 편한 푸른색 채찍만 챙긴 뒤 나머지는 모두 그대로 버려두었다.
잠시 휴식을 취한 석목은 협곡 밖으로 발길을 옮겼다.
* * *
몇 시진 후, 석목은 어두컴컴한 삼림 속의 어느 거대한 나무 꼭대기에 올라 있었다.
금빛으로 빛나는 눈으로 먼 곳을 바라보던 그는 잠시 뒤 나무에서 내려와 계속해서 북쪽 방향으로 빠르게 걸었다.
중부구역까지 가려면 앞으로 하루 정도는 더 걸릴 것 같았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던 석목은 순간 무언가 잘못된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발걸음을 멈췄다.
어느새 주위가 담홍색 안개에 뒤덮여 있었다. 안개는 육안으로 볼 수 있을 정도의 빠른 속도로 점점 짙어지기 시작했다.
놀란 석목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빽빽하고 어두운 나무 사이로 보이는 하늘은 이미 붉은 핏빛으로 변해 있었다.
석목은 미간을 찌푸리며, 이 붉은 안개에 대해 들었던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출발 전 청아부족의 염아 제사장이 금지에 존재하는 몇 가지 위험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있었다.
가끔 이렇게 하늘에서 갑자기 내려오는 피 안개도 그 중 하나였다.
선천의 경지까지 오르지 못한 토템용사나, 이곳에서 서식하는 괴수도 이 피 안개에 뒤덮일 경우 본성을 잃고 미쳐서 살육을 탐하게 된다고 했다.
피 안개가 영향력을 미치는 범위는 최대 반경 십 리 정도였다. 일단 그 영역을 벗어나기만 한다면 다시 정신을 차릴 수 있다고도 했다.
석목은 망설임 없이 경신부를 꺼내 몸에 가져다 댔다. 경신부는 푸른빛으로 변해 석목의 몸을 감쌌다.
이후 석목은 바닥을 박차고 피 안개가 비교적 옅은 방향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주위에 깔린 피 안개는 전혀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석목은 최대한 숨을 멈추고 있었지만, 결국 참지 못하고 피 안개를 흡입하고 말았다.
석목은 가슴속에서 점점 짜증이 치솟으면서, 살육에 대한 강렬한 충동이 일어나는 것을 느끼고 놀랐다. 그러나 억제할 방법을 알지 못했기에 마음만 조급해졌다.
바로 그때, 석목이 줄곧 품속에 지니고 있던 영롱한 구슬이 갑자기 살짝 떨렸다.
구슬에서 나온 상쾌한 기운이 석목의 몸에 들어가서 신속하게 전신을 돌았다. 그러자 마음이 평온해지면서, 붉어진 눈도 천천히 원상태로 돌아왔다.
석목은 기뻐하기도 전에 빠르게 가까워지는 검은 그림자를 포착했다.
하얗게 빛나는 석목의 손이 흰 선을 그리며 뻗어나갔다.
퍽!
늑대만한 크기의 괴수가 석목의 주먹에 맞고 날아갔다.
동시에 석목은 운철흑도를 뽑아들어 덮쳐오는 다른 그림자를 양단했다. 비린내 나는 핏물이 쏟아져 내렸다.
그 순간 커다란 울음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오면서 수많은 그림자가 다가왔다. 석목은 자신이 백여 마리가 넘는 괴수에게 포위당한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여우 모습을 한 회색 괴수들은 최소 후천초기의 실력을 가졌으며, 개중에는 후천중기의 실력을 가진 괴수도 있었다.
괴수들은 피에 굶주린 듯 두 눈이 충혈됐고 침을 흘리고 있었다.
“이런, 끝도 없이 몰려오는군.”
석목은 놀라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던 중 왼쪽으로 멀지 않은 곳에 산세가 가파른 산이 하나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몸을 돌려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괴수들이 도망가는 석목을 쉽게 놓아줄 리 없었다. 사방팔방에서 몰려들어 석목을 집요하게 쫒았다.
이삽십 마리의 여우 괴수가 동시에 석목을 덮치며 서늘한 빛이 서려 있는 날카로운 발톱을 휘둘렀다.
석목은 달리는 속도를 전혀 줄이지 않고 운철흑도를 세차게 휘둘렀다. 붉게 빛나는 화염의 도가 마치 거대한 붉은 구렁이처럼 그의 몸을 휘감으며 선회했다.
사방에서 비명이 울려 퍼지며 고기조각과 선혈이 뒤섞여 허공에서 쏟아졌다. 석목은 마치 사신처럼 지나가는 길을 전부 피로 적시며 산봉우리를 향해 질주했다.
경신부의 도움으로 움직임이 빨라진 석목은 순식간에 괴수들과의 거리를 약간 벌렸다.
그러나 오히려 여우 괴수들은 점점 몰려들었다. 석목이 산자락에 도착했을 때는 오백 마리 이상의 괴수들이 회색 물결처럼 그를 바짝 쫓고 있었다.
푸른빛에 둘러싸인 석목은 가파른 산을 좌우로 뛰어넘으며 순식간에 정상 근처까지 올라갔다.
그는 그곳에서 멀지 않은 전방에 검은 동굴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한숨을 돌렸다.
그 동굴 입구는 너비가 일 장 정도밖에 되지 않아서 두세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만큼 협소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동굴의 입구에 도착한 석목은 주저 없이 몸을 동굴 안으로 날렸다. 그는 이미 뛰어난 시력으로 멀리서부터 동굴의 내부 상황을 전부 파악한 상태였다.
좁은 입구에 비해 동굴의 내부는 상당히 넓은 편이었다. 입구 근처에 놓인 반 장 정도 크기의 돌덩이 하나를 제외하고 안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
석목은 동굴에 들어오자마자 즉시 몸을 돌려 거대한 돌을 밀었다.
쿠구궁!
바위로 동굴의 입구를 막자 입구는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다.
휙!
그 순간 회색 그림자가 입구로 뛰어들었다.
석목의 운철흑도가 공중에 떠 있는 여우 괴수를 반으로 갈랐다.
여우의 내장과 피가 아직 바닥에 떨어지기도 전에, 여우 괴수 세 마리가 쏟아지는 피를 가르며 석목에게 덤벼들었다.
석목이 진기를 끌어올려 다시 운철흑도를 휘두르자, 열세 개의 검영이 협소한 동굴의 입구를 빽빽하게 틀어막았다. 세 마리의 여우가 순식간에 고기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이어서 더 많은 여우 괴수가 눈을 붉게 빛내며 앞 다투어 달려들었다.
그러나 협소한 입구에 막혀 한 번에 서너 마리 이상은 들어오지 못했고, 그 덕분에 석목의 부담은 크게 줄었다.
석목은 천천히 진기를 회복하는 한편 운철흑도를 바람같이 빠르게 휘둘러 차근차근 여우를 베어나갔다.
염아 제사장에게 듣기로는, 괴수를 미치게 만드는 피 안개가 지속되는 시간은 몇 시진에서 하루까지 매번 달라졌다. 살기 위해서는 안개가 걷힐 때까지 체력을 안배하며 싸워야 했다.
바로 그때, 동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격렬하게 전투를 벌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온 몸이 파란 빛에 감싸인 두 사람이 괴수의 무리와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동굴 입구를 향해 조금씩 후퇴하고 있었다.
그중 한 명은 검은 갑옷을 입고 삼지창을 든 반인반수의 사내였고, 다른 한 명은 한 손에 다채로운 색깔의 산호를 든 파란 옷의 소녀였다.
그들은 바로 해족의 성녀와 그녀의 동료였다.
두 사람을 쫓는 괴수들 중에는 회색 여우 외에 수십 마리의 호저 괴수도 있었다. 무리 중 가장 강한 호저는 후천후기의 경지였다.
호저들은 달리는 도중에 때때로 멈춰 서서, 두 해족을 향해 등 뒤의 빼곡한 가시를 화살처럼 날렸다.
그러나 가시들은 두 사람에게 채 닿기도 전에 파란 창에 맞고 튕겨 나왔다.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는 파란색 삼지창을 풍차 돌리듯 휘둘러 파란 옷의 소녀를 확실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가끔 창이 막아내지 못하고 놓친 가시는 사내의 몸에 뒤덮인 파란 빛에 가로막혀 튕겨 나갔다.
사내를 감싼 빛은 공격을 방어할 때마다 조금씩 어두워졌지만, 소녀가 손을 들어 올릴 때마다 산호에서 날아온 거품을 흡수하고 금세 다시 밝아졌다.
석목은 그들의 파란 빛이 피 안개의 영향도 막아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고 무척 신기해했다.
그들이 동굴에서 오십 장 가까이까지 다가왔을 때 모든 호저 괴수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등 뒤의 가시를 비처럼 쏘아댔다.
그 모습을 본 반인반수 사내가 포효하며 삼지창을 빠르게 휘두르자, 몸 주위로 빛의 장막이 형성됐다.
깡! 깡! 깡!
호저의 가시가 파란 빛의 장막과 부딪히며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사내는 가시를 전부 막아내는데 성공했지만, 그 순간 발걸음도 멈췄다. 그 틈을 타 뒤에 있던 회색 여우들이 그를 향해 우르르 뛰어들었다.
사내는 여우 괴수들의 모든 공격을 막아냈지만, 상당히 힘에 겨운 듯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바로 그때, 파란 옷을 입은 소녀가 들고 있던 산호가 밝게 빛났다. 산호는 마치 한 폭의 비단 같은 빛을 뿜어냈고, 그것은 몸집이 가장 큰 호저의 앞까지 순식간에 날아갔다.
덩치 큰 호저는 방금 전 가시를 쏘아댄 뒤, 재차 발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산호에서 뿜어 나온 빛은 호저의 몸을 바다뱀처럼 휘감아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고, 호저가 다시 가시를 날릴 틈도 주지 않았다.
쉬익!
꼼짝달싹 못하게 된 호저는 뒤따라 날아온 얼음창에 한쪽 눈을 관통당해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파란 옷을 입은 소녀는 같은 방법으로 순식간에 열 마리가 넘는 호저 괴수를 처치했다.
동굴입구를 막으며 그 광경을 지켜본 석목은 크게 놀랐다.
해족의 성녀는 나이는 많아 보이지 않았지만 매우 뛰어난 수속성 술사였다. 얼음창을 손쉽게 시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미 영계술사의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그들이 향하는 곳은 석목이 몸을 숨긴 동굴이었다. 소녀의 합세로 부담이 줄어든 반인반수 사내도 다시 싸움에 나서면서 동굴을 향해 이동했다.
두 사람이 아무리 강하다 해도, 이렇게 많은 괴수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계속 전투를 벌이다가는 무참하게 살해당할 것이 자명했기 때문이다.
금세 동굴의 앞에 다다른 두 해족은 입구를 둘러싸고 있는 십여 마리의 여우 괴수를 순식간에 쓸어버렸다.
그때 석목을 본 소녀가 기쁜 표정으로 물었다.
“괴수들의 공격이 언제까지 더 지속될지 모르니 함께 방어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석목은 금세 결정을 내렸다. 그는 몸을 비켜 두 사람이 동굴에 들어올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었다.
소녀와 사내가 급히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소녀는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석목에게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동굴 밖에서 공기를 가르는 소리가 크게 일었다. 호저의 가시가 날아오는 소리였다.
그뿐만 아니라 수많은 여우 괴수가 앞 다투어 동굴 안으로 몰려들어오고 있었다.
동굴의 입구로 동시에 달려간 석목과 반인반수 사내는 입구의 양측에 서서 괴수들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막았다.
석목은 괴수들의 공격을 막고 있긴 했지만, 호저의 원거리 공격까지 더해지니 아까보다 확연히 힘에 부쳤다.
호저의 가시는 교묘한 각도로 빈틈을 노리고 날아왔기 때문에 대응하기가 매우 까다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