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성녀 향주
석목이 붉게 타오르는 운철흑도로 여우 세 마리를 두 동강낸 순간, 여덟 개의 가시가 흩뿌려지는 피 사이를 뚫고 날아왔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휘둘러 그중 네 개를 튕겨내고 세 개를 피했으나, 마지막 한 개는 미처 피하지 못했다.
그 순간 석목의 전신에 한기가 돌면서 파란 빛이 그의 몸을 감쌌다.
가시는 석목의 몸을 둘러싼 파란 빛을 뚫지 못하고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튕겨 나갔다.
석목은 놀라서 식은땀을 흘리며 다급하게 금색 부적을 꺼내들었다. 금갑부를 몸에 가져다 대자 금색 빛이 파란 빛 위를 다시 감쌌다.
방어수단을 단단히 갖춘 그는 다시 운철흑도를 휘두르며 사내와 동굴의 입구를 지켰다.
그러자 소녀는 석목에게 빛의 장막을 한 겹 더 둘러준 뒤, 멀리서 공격하고 있는 호저를 한 마리씩 옭아매고 얼음창으로 꿰뚫어 죽였다.
결국 세 사람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가장 위협적이었던 호저를 전부 처치했다. 호저가 없으니 동굴 입구를 지키기가 한결 수월해졌다.
석목이 한숨을 돌린 순간, 그는 다시 한 번 크게 놀랐다.
멀지 않은 곳에서 노란 여우 가죽 망토를 걸친 사람이 눈처럼 하얀 장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그 사람은 바로 화무공주였다.
화무공주는 비록 뛰어난 실력자이긴 했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괴수의 협공을 버티다보니 상당히 힘겨워보였다.
“두 분이 입구를 막아주세요. 저는 저 분을 구하겠습니다.”
석목은 낮은 목소리로 해족의 성녀와 반인반수 사내에게 말했다.
그리고 두 사람의 대답을 듣지 않고 곧바로 운철흑도를 회수한 뒤 동굴 안으로 물러났다.
반인반수 사내는 콧방귀를 뀌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러나 소녀의 차가운 눈빛을 보고는 급히 입을 다물었고, 창을 더 크게 휘둘러서 입구를 막았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거두고 파천궁을 꺼내들어 검은 화살을 활시위에 걸었다.
쉬익!
막 공중으로 뛰어올라 화무공주를 공격하려던 여우 괴수가 손가락 두께의 검은색 화살에 뇌를 관통당해 바닥에 처박혔다.
놀란 화무공주는 화살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는 동굴 입구에 서 있는 사내를 보고는 잠시 어리둥절했다. 그러나 곧 동굴 안쪽의 석목을 발견하고는 다급히 입구 쪽으로 다가갔다.
석목의 활에서 검은 화살이 발사될 때마다 화무공주 주위의 괴수가 연달아 쓰러졌다.
석목의 도움으로 괴수의 압박에서 벗어나자, 그녀는 더욱 매섭게 괴수를 베어나가며 금세 동굴의 입구에 도달했다.
해족의 사내는 화무공주를 보고 눈을 흉흉하게 빛내며 삼지창을 겨누었다.
바로 그 순간, 파란 옷을 입은 소녀가 맑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소고, 길을 열어요!”
사내는 이해할 수 없다는 눈빛으로 소녀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창을 거두고 화무공주에게 길을 터주었다.
화무공주는 동굴 안쪽의 석목을 힐끔 보더니, 달려드는 괴수의 공격을 막으며 안으로 들어왔다.
그 순간 사내가 다시 동굴의 입구를 막았다. 그는 화무공주의 뒤를 바짝 쫓아온 다섯 마리의 여우 괴수 중 세 마리의 몸을 즉시 가르고 남은 두 마리는 밖으로 날려버렸다.
석목은 파란 옷의 소녀를 향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화무공주의 몸을 유심히 살폈다. 약간의 상처는 있었지만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그녀가 피 안개에서 정신을 온전히 유지할 수 있었던 건 무언가 진기한 보물을 소지한 덕분이 분명했다.
화무공주는 세 사람을 번갈아보며 기묘한 표정을 지었고, 동굴 안쪽 구석에서 조용히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석목이 무언가 말하려는 순간, 갑자기 동굴 밖에서 귀를 찌르는 괴수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동굴 안에 있던 사람들은 다급하게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보았다.
동굴 밖에는 짙은 피비린내에 이끌려 몰려온 괴수들이 온 산을 뒤덮고 있었다. 대다수가 회색 여우 괴수였고, 호저 괴수 역시 상당수 섞여 있었다.
“공주님, 우선 휴식을 취하세요. 상황이 정리되고 나서 이야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빠르게 말을 내뱉은 석목은 화무공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다시 동굴의 입구로 돌아가 전투를 시작했다. 상황이 급박하니 다른 것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파란 옷을 입은 소녀 역시 산호를 집어 들고 가세했다.
그 광경을 본 화무공주는 단약을 하나 복용한 뒤 운기조식을 시작했다. 다만 오른손에 하얀 장검을 꼭 쥐고 있었다.
이번에 몰려든 괴수들의 공격은 방금 전보다 훨씬 거셌다. 회색 여우는 동굴의 입구로 끊임없이 돌진했고, 호저는 그야말로 쉴 틈 없이 날카로운 가시를 쏘아댔다.
다행히 세 사람은 이미 한 번 협력해서 괴수들을 물리쳐본 만큼, 두 번째 전투에서는 어느 정도 손발이 맞아서 어떻게든 견딜 수 있었다.
그렇게 몇 시진이 지나가고 하늘이 어두워질 때쯤 동굴 밖의 호저가 전부 처치됐다.
여우 괴수는 아직도 끊임없이 몰려오고 있었지만 호저의 도움이 없이는 동굴 입구를 절대 뚫을 수 없었다.
세 사람은 상당히 지쳐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 광경을 보고 안도한 표정이 되었다.
동굴 안쪽에서 운기 조식 중인 화무공주도 휴식을 취하며 체력을 상당부분 회복했다.
그 뒤 이들은 석목의 제안에 따라 반 시진마다 두 명씩 번갈아서 동굴 입구를 지키기로 했다.
파란 옷의 성녀가 먼저 휴식을 취했고, 그 동안 석목과 사내가 동굴 입구를 지켰다. 그 다음에는 화무공주와 성녀가 입구를 지키는 임무를 맡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굴 밖에는 시체가 산처럼 쌓였고 피가 강을 이루었다.
다음날 이른 새벽, 드디어 피 안개가 걷히면서 정신을 차린 괴수들이 썰물처럼 산 아래로 내려갔다.
화무공주와 해족의 성녀가 휴식을 취하는 동안 입구를 지키던 석목과 반인반수 사내는 물러나는 괴수들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석목은 인족과 해족이 연합해서 적을 막아낼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 덕분에 모두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윽고 석목과 사내는 서로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동시에 동굴 밖으로 뛰어나갔다.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거리를 유지하며 수혼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들은 초급과 중급 수혼을 서른 개 가량 모은 뒤에 수집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밤새 천 마리 이상의 괴수를 살해했지만 죽은 후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난 탓에, 대부분의 수혼이 이미 흩어져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두 사람이 동굴로 돌아와 보니 휴식을 마친 화무공주와 해족의 성녀가 서로 경계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은 씁쓸하게 웃으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 갑자기 검은 그림자가 반짝였고, 놀란 석목은 급하게 운철흑도를 휘둘러 반격했다.
깡!
석목은 거센 진기가 도신을 타고 손으로 전해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두어 걸음 물러났다.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 역시 석목의 괴력에 양팔이 저릿해지는 것을 느끼며 뒤로 두 걸음쯤 물러났다.
사내는 석목이 다른 행동을 취하기 전에 재빨리 동굴의 출구를 막아서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화무공주는 이런 상황을 이미 예상한 듯, 사내의 행동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괴수가 물러났으니 더 이상 서로 적의를 숨길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석목은 파란 옷의 소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동안 함께 싸우며 확인한 바로는 그녀는 수속성 술법을 자유자재로 다루었기 때문에, 싸움이 벌어진다면 상당히 까다로운 상대가 될 것 같았다.
게다가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 역시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강자였기 때문에, 맞붙는다면 승리를 장담하기가 어려웠다.
그때 소녀가 싸늘한 표정으로 호통을 쳤다.
“소고, 물러나세요!”
그러자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소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성녀님, 괴수는 전부 물러갔는데 어째서….”
“설마 내 뜻을 거역하겠다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소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하자, 놀란 사내는 급하게 동굴의 입구에서 비켜섰다.
소녀는 석목과 화무공주를 각각 한 번씩 바라본 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공자님, 드디어 다시 만났네요.”
해족의 성녀는 석목을 보며 매우 기쁜 듯 말을 이었다.
“이 년 전, 어촌으로 공자님을 찾으러 갔지만 이미 떠나고 안 계셔서, 이번 생에는 다시 만나지 못할 줄 알았습니다.”
그녀의 말에 석목은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당신은 누구죠?”
소녀의 입가에 웃음이 떠올랐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허공을 가볍게 찍으며 말했다.
“공자님, 이 물건을 기억하시나요?”
그때 석목의 품속에서 무언가 갑작스레 요동치기 시작했다. 놀란 그는 품속의 물건을 손으로 잡으며 말했다.
“그때 그 조개?”
소녀는 놀란 석목의 표정을 보고 아름답게 웃었다.
“깔깔깔, 아직까지 저를 기억하고 계셨군요. 그때 바다를 떠난 저는 지금의 스승님을 만나서 동해 해족의 성녀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그녀의 등 뒤에서 흰 빛이 뿜어 나오더니, 옥처럼 하얀 커다란 조개껍질 한 쌍이 날개처럼 생겨났다.
소녀의 조개껍질을 멍하니 바라보던 석목의 머릿속에 옛날 기억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지금의 성취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해족 소녀 덕분이었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검은 옷을 입은 사내와 화무공주의 눈이 놀라 휘둥그레졌다. 해족의 성녀와 석목이 깊은 인연이 있는 사이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화무공주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참, 이제 저도 이름이 있어요. 모두 저를 향주성녀라 부르니 향주라고 부르시면 돼요. 공자님의 이름은 무엇이죠? 그동안 어디에서 무엇을 하셨나요?”
소녀가 등 뒤의 조개껍질을 펼치며 미소 띤 얼굴로 물었다.
그녀는 예전에 자신의 목숨을 구해준 석목에 대한 은혜를 아직까지 마음 깊은 곳에 담아두고 있었다.
“석목입니다.”
천천히 말하는 석목의 표정은 복잡했다.
당시와는 다르게 지금 그와 소녀는 서로 적대적인 세력에 속해 있었다. 그래서 석목은 자신의 이름만 알려주고 그 이상의 말은 삼갔다.
향주도 무언가를 느낀 듯 아름다운 눈썹을 찡그리며 천천히 웃음을 거두었다. 등 뒤의 조개껍질도 하얀 빛과 함께 사라졌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 석목이 품속에서 엄지손가락 크기의 진주를 꺼내 향주에게 건넸다.
“성녀님, 이 진주는 돌려드리겠습니다.”
석목이 아직까지 진주를 지니고 있는 것을 본 향주의 얼굴에 다시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돌려줄 필요 없어요. 석 공자님이 가지고 있어요.”
그녀가 한 손을 들어 올리자 손바닥에 무수히 많은 파란색 부문이 떠오르더니, 세 갈래의 파란 빛이 뿜어 나와 진주 안으로 흡수됐다.
그 광경을 본 석목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 공자님, 나중에 또 만나요. 소고, 출발하죠.”
향주는 석목이 무언가 묻기도 전에 몸을 돌려서 동굴 밖으로 나갔다.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는 석목과 화무공주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향주의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숲속 깊은 곳으로 사라지자, 석목은 들고 있던 진주를 다시 한 번 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그것을 품속에 집어넣었다.
그때 화무공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해족의 성녀와 무슨 관계인지 말해줄 수 있겠죠?”
그러나 석목은 말을 아꼈다. 향주와 만나게 된 이야기를 하려면 그녀가 그 당시 내뿜었던 핏빛 안개에 대해서도 언급해야 했기 때문이다.
“해족 성녀와의 일은 공주님도 조금 전에 전부 들었습니다.”
“당신!”
석목의 대답에 화무공주는 화를 내려 했지만,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곧바로 평정심으로 돌아왔다.
“흥, 말하기 싫다면 하지 마세요. 저도 궁금하지 않습니다. 가죠!”
그녀는 검을 챙겨들고 동굴을 나가서 두 해족이 사라진 방향의 반대로 걸어갔다.
석목은 말없이 그녀의 뒤를 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