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청명과(青冥果)
한편 화무공주는 태연한 척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지만, 양손은 모두 소매 속에 들어가 있었다. 그녀 역시 무언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부적을 손에 쥐고 있었다.
마랑과 금황은 이전에 같은 방법으로 용사의 강을 건넌 적이 있어서인지 상대적으로 평온한 표정이었다.
다행히도 뗏목을 사용하는 방법은 확실하게 효과가 있었다. 일행은 어떤 위험도 마주치지 않고 안전하게 강을 건널 수 있었다.
뗏목이 기슭에 닿자 석목은 즉시 뭍으로 뛰어내렸다. 육지를 밟자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낀 그는 손에 쥐고 있던 무부를 다시 챙겨 넣었다.
그런 다음 석목은 강 너머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이전까지는 줄곧 강물 안쪽을 경계하느라 자세히 보지 못했는데, 이곳은 외곽구역과 상당히 큰 차이가 있었다.
각종 수목과 화초의 종류는 외곽구역과 거의 동일했으나, 크기는 두 배 가까이 차이가 났다.
“이제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을까요?”
“잠시 기다리세요. 금 형, 지도를 꺼내보시오.”
화무공주의 질문을 받은 마랑이 금황에게 말했다.
금황은 아무 말 없이 품속에서 노란 가죽 지도를 꺼냈다.
“중부구역의 지도인가요?”
화무공주가 묻자 금황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가죽 지도와 주위의 환경을 자세히 대조하며 현재의 위치를 빠르게 파악했다.
그의 지도를 한 번 본 석목은 반 보 뒤로 물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게 가죽을 꺼내들었다. 석목이 꺼내든 가죽 역시 지도였다.
석목의 지도는 몇 개의 지점만 표시되어 있어서, 금황의 것보다 훨씬 초라했다.
그 표시들은 민도가 금지에 관한 서적을 조사해서 추려낸, 머리가 여러개 달린 구렁이 괴수 다수흉망의 출몰이 예상되는 위치였다.
자신의 지도와 마랑의 지도를 살짝 대조해 본 석목은 지도를 다시 챙겨 넣었다.
한참 후 금황이 지도의 한 곳을 짚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이동할 겁니다.”
금황의 손가락은 수십 리 안쪽에 있는 중부구역의 깊숙한 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두 분, 중부구역은 외곽과는 다릅니다. 이렇게 거침없이 들어가는 것은 좋지 않은 것 같습니다.”
“먼저 강을 건너 괴수를 사냥하자고 하더니 설마 이곳까지 와서 멈추겠다는 것인가요?”
화무공주가 말에 금황이 낯빛을 흐리며 불쾌한 듯 말했다.
“제가 이곳에 오자고 한 것은 사실이지만, 우리의 실력으로는 후천 대원만의 괴수들을 사냥하는 것이 한계입니다. 만약 선천등급의 괴수와 조우하게 된다면 도주하는 것조차 어려울 거예요.”
화무공주의 목소리도 차갑게 가라앉았다.
“공주님, 우선 화를 가라앉히세요. 남은 기간 동안 힘을 합쳐 최대한 많은 괴수를 사냥해야 합니다. 무의미한 실랑이를 벌여봐야 좋을 것이 없습니다.”
화무공주와 금황 사이의 분위기가 나빠지자 마랑이 급하게 중재에 나섰다.
그때 침묵하고 있던 석목이 입을 열었다.
“두 분, 숨기지 말고 말해주세요. 중부구역에 온 목적이 괴수를 사냥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지요?”
“그게 무슨 뜻이죠?”
마랑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물었다.
석목은 마랑과 금황을 한 번씩 바라보고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솔직히 이야기하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 두 사람은 여기서부터는 따로 행동할 겁니다.”
화무공주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랑은 잠시 멈칫하더니 금황과 시선을 교환했다.
한참 후, 그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석목과 화무공주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사실은 두 분께 숨긴 것이 있습니다. 미리 얘기하지 않은 것은 그 지역이 매우 위험한데다, 타인에게 알리기도 곤란한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석목과 화무공주는 마랑의 말에 대답하지 않고 보고만 있었다.
마랑은 그런 그들을 보며 말을 계속했다.
“우리가 중부구역에 온 목적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두 분은 청명과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설마 이곳에 청명과가 있나요?”
그의 말을 들은 화무공주가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공주님은 역시 아시는 것이 많군요. 맞습니다. 이 금지에는 청명과가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가려고 하는 곳에 말이지요.”
마랑이 뜨거운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자 화무공주 역시 무언가 갈망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청명과가 도대체 무엇이죠?”
청명과에 대해 처음 들어본 석목이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청명과는 극도로 추운 환경에서 자라는 나무에 백 년에 하나씩 맺히는 진귀한 과일입니다. 그것을 복용하면 벌모세수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선천무인의 벽도 뛰어넘을 수 있다고 하지요.”
화무공주가 방금 전보다 더욱 간절해진 표정으로 설명했다.
선천등급으로 오르는 벽을 허물어주는 과일이라니, 그 가치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이 길을 따라 삼십 리 정도 걸어가면 설산이 하나 있습니다. 그 설산 아래에 감추어져 있는 동굴에 청명나무가 있죠. 상당수의 청명과가 열려 있을 것이니 우리 넷이서 나누어 가지기에 충분할 겁니다.”
마랑은 석목과 화무공주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눈치 채고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두 분은 감추어져 있는 얼음동굴을 어떻게 발견한 것이죠?”
석목은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말투로 물었다.
“저번에 용사의 금지가 개방되었을 때 괴수를 쫓다가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마랑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귀한 것이라면 분명히 강력한 괴수가 지키고 있을 텐데요. 이전에 청명과를 얻지 못한 것은 설마 그 때문입니까?”
“맞습니다. 그 얼음동굴에는 후천 대원만의 얼음전갈이 살고 있습니다. 지형의 이점까지 차지한 괴수의 힘은 선천초기의 괴수와 맞먹었죠. 당시 우리 둘은 지금보다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랑이 씁쓸하게 웃으며 설명했다.
“우리 두 사람은 얼음전갈에 대적할 수 있는 방법을 몇 년간 연구했습니다. 계획을 위해서는 최소 네 사람이 필요하죠. 두 분이 우리를 돕겠다고 약속한다면 얼음전갈을 처치한 후 청명과를 공평하게 나눌 것입니다.”
굳게 맹세하는 듯한 마랑의 말을 듣고 화무공주가 물었다.
“어째서 네 사람이 필요한 것이죠?”
“우리가 준비한 계획의 핵심은 무술곤진(巫术困阵)입니다. 무술곤진을 발동하기 위해서는 세 사람이 필요합니다. 이 진법으로 얼음전갈을 이각 정도 묶어놓을 수 있을 테니, 그 사이에 과일을 따서 도망가면 됩니다.”
금황이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러자 화무공주의 표정이 살짝 밝아졌다. 마랑과 금황은 그녀의 표정이 변하는 것을 보고 기뻐했다.
그러나 오직 석목만이 여전히 미간을 찌푸린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석목은 얼음전갈에 대해서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청명나무를 지키는 괴수가 그렇게 쉬운 상대일 리가 만무했다.
석목의 목적은 무엇보다 선천등급의 다수흉망을 처치하고 수혼을 얻는 것이었다. 청명과가 아무리 진귀하다 해도 그에게 있어서는 다수흉망의 수혼 보다 중요하지 않았다.
경지를 높이는 것보다는 먼저 목숨을 보전하는 것이 더 중요한 우선순위였다.
“어떻게 생각하죠?”
석목이 망설이는 것을 본 화무공주가 물었다.
“공주님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처음에 석목은 함께 하자는 제안을 거절하려다가 마음을 바꿨다. 얼음동굴이 지도상에 표시된 다수흉망의 동굴을 향해 가는 길목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석목은 중부구역이 처음이었다. 독단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이들의 안내에 따라 먼저 환경에 익숙해지는 것이 합리적이었다. 게다가 청명과도 덤으로 얻을 수 있다면 더 좋았다.
“그럼 출발하죠.”
화무공주가 덤덤하게 말했다.
“좋습니다. 시간을 끌어봐야 좋을 것이 없으니 바로 출발하죠.”
두 사람이 동의하자 마랑이 매우 기뻐하며 말했다.
준비를 마친 그들은 금황의 지도를 따라 설산으로 향했다.
중부구역은 매우 광활한 데다 지형의 변화가 많은 곳이었다. 이동하는 동안 그들은 서성이고 있는 몇몇 후천등급의 괴수들을 마주쳤을 뿐, 선천등급의 괴수와는 맞닥뜨리지 않았다.
선천등급의 괴수가 이 중부구역에서 가장 강한 존재는 맞지만, 그 수가 많지는 않다는 것이 마랑의 설명이었다. 게다가 모두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지고 있으니 굳이 찾아가 건드리지만 않으면 안전하다고 했다.
* * *
반나절 후, 설산의 산자락.
석목이 눈앞의 동굴을 신중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두운 동굴 안은 얼마나 깊은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햇빛이 내려쬐는데도 불구하고 동굴 입구에서부터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바로 이곳입니다. 들어가시죠.”
마랑은 주저 없이 동굴 안으로 들어갔고, 금황도 말없이 그를 바짝 쫓았다.
석목과 화무공주 역시 서로를 한 번 바라본 후 동굴 안으로 따라 들어갔다.
그러나 동굴에 들어온 순간 석목의 표정이 살짝 어두워졌다. 마치 얼음 창고에 들어온 것처럼 차갑고 뼈를 찌르는 한기가 덮쳐왔다.
석목은 몸을 덜덜 떨며 진기를 끌어올려 한기를 막아보려 했다. 그러자 단전에서 음한지력(阴寒之力)이 끓어올라 전신을 돌더니, 곧 몸 밖의 차가운 한기를 전부 밀어내서 추위가 전혀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
석목은 잠시 당황했다. 그러나 탈태결을 수련하며 체내에 쌓인 음한지력 덕분이라는 것을 곧 깨달았다.
추위에서 벗어난 석목은 마랑의 안내로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나아갔다. 일각 후 일행은 거대한 얼음궁전처럼 생긴 공간에 도착했다.
규모가 수백 장에 이르는 그곳은 완전히 얼음에 뒤덮여 있었으며, 곳곳에 수많은 얼음덩어리가 널브러져 있었다.
공간의 한가운데에는 거대한 얼음덩어리에 둘러싸인 몇 장 높이의 은색 나무가 서 있었다. 나무의 바로 앞에는 직경이 삼 장 정도 되어 보이는, 표면이 얇게 얼어붙은 연못이 있었다.
은색 나무에는 나뭇잎이 한 개도 없었으며, 나뭇가지에는 범상치 않아 보이는 주먹 만 한 크기의 청색 과일이 듬성듬성 걸려 있었다.
석목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나무 앞의 고요한 연못을 바라보며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나머지 세 사람도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멈추었다.
마랑과 금황은 나무를 뜨거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화무공주는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탐욕스러운 마음이 표정에 드러나는 것을 숨기지 못했다.
“제가 가보겠습니다.”
나무에서 시선을 거둔 마랑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청색 도끼를 뽑아들고 주위를 경계하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마랑은 덩치가 상당히 컸지만 발걸음은 무척 가벼웠다.
그는 몇 걸음을 뗄 때마다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공간에는 고요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만약 마랑과 금황에게 얼음전갈이 청명나무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듣지 않았더라면 괴수가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잠시 후, 마랑은 연못에서 삼십 장 정도까지 가까이 다가갔다.
그는 거대한 얼음덩어리 뒤에 숨어 주위를 관찰했다. 이어 연못에 시선을 두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한쪽 손을 신중하게 들었다.
마랑이 보낸 신호를 본 나머지 세 사람도 즉시 그쪽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세 사람은 마랑이 있는 거대한 얼음 뒤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리고 품속에서 검은색 가죽으로 만든 삼각형 깃발을 꺼내들었다.
깃발의 중앙에는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은, 무서운 생김새의 흰 거미가 새겨져 있었다.
“얼음전갈은 이 연못 안에 있을 겁니다. 제가 전갈을 끌어낼 테니 전력으로 그것을 가두세요. 청명과를 전부 딴 후에 즉시 왔던 길을 그대로 돌아가는 겁니다.”
마랑이 작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나머지 세 사람은 조용히 연못 주위의 얼음덩어리 뒤로 흩어져서 몸을 숨겼다.
이어 세 사람은 각자의 혀끝을 깨물어서 깃발에 피를 떨어뜨렸다. 그러자 깃발에 그려진 거미와 무문이 순식간에 붉은색으로 변하더니 살아 있는 것처럼 천천히 꿈틀거렸다.
그들이 진기를 끌어올리자, 깃발에 그려진 붉은 거미는 입에서 거미줄을 쏘아서 연못 위에 거대한 그물망을 만들었다. 잠시 반짝이던 그물망은 곧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 광경을 본 마랑은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는 은색 나무까지 순식간에 달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