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용사의 귀환
한참 후, 갑자기 일어난 원숭이가 두 손으로 가슴을 두드리며 하늘을 향해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외쳤다. 순간 천둥처럼 커다란 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더니 바람과 구름이 일며 하늘이 어두워졌다.
그 순간 석목은 거대 원숭이의 비통한 심정을 뚜렷하게 느꼈다.
한편 노인이 남기고 간 금색 서적은 석목의 큰 흥미를 끌었다. 석목은 시선을 돌려서 서적의 표지에 적힌 은색 글자를 보았다.
갑자기 그의 머릿속에 구전현공(九转玄功)이라는 네 글자가 떠올랐다.
석목은 놀라움과 기쁨을 동시에 느끼며 서적을 자세히 보려던 순간 갑자기 머리가 어지러워지더니 눈앞이 캄캄해졌다.
몸을 떨며 정신을 차린 석목은 천천히 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십 장이 넘는 거대한 삼수흉망의 시체가 맞은편 절벽에 걸려 있었다.
삼수흉망의 몸은 바짝 마른 채였고 세 개의 목 중에서 좌우의 두 개가 없었다. 곤죽이 된 가운데 머리에서는 역겨운 피비린내가 진동했다.
석목은 자신이 중상을 입고 죽기 직전에 일어난 일들을 떠올렸다.
꿈속에서 거대 원숭이로 변한 석목은 격전 끝에 삼수흉망을 쓰러트렸지만, 마지막 순간에 원숭이 역시 상당한 상처를 입었다.
석목은 급히 일어나서 몸 구석구석을 확인해보았다.
그러나 그의 전신은 상처 하나 없이 깨끗했다. 그저 큰 병을 앓다가 막 회복된 사람처럼 온 몸에 힘이 없을 뿐이었다.
단전과 전신의 경맥에는 진기가 가득해서 충만한 느낌이 들었으며, 동시에 무수한 개미가 기어 다니는 것처럼 설명하기 어려운 불편함도 느껴졌다.
또 뱃속에서 불같이 뜨거운 진기가 끊임없이 솟아나 사지의 기경팔맥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 감지됐다.
놀란 석목은 이 모든 것이 거대 원숭이로 변한 것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뱃속에서 느껴지는 열기는 거대 원숭이가 삼킨 삼수흉망의 정혈 때문인 듯했다.
석목은 꿈속의 장면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교룡과의 전투 끝에 피와 살을 날로 먹는 장면은 다시 생각해도 충격적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한눈에 봐도 평범해 보이지 않았던 구전현공의 내용은 전혀 보지 못했다.
석목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나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그가 미간을 확 찌푸리며 다시 눈을 떴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누에콩만한 결정이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설마 원숭이로 변한 것이 그동안 모아온 결정과 관련이 있나?’
그러나 그런 생각을 확인할 방도가 없었다.
어찌됐든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거대 원숭이 덕분이었다. 원숭이로 변신한 후의 엄청난 능력을 떠올리며, 석목은 기쁘면서도 한편으로 걱정이 됐다.
원숭이로 변신한 자신이 맨손으로 선천중기의 괴수를 처치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는 사실에 기뻤다. 그러나 변신한 뒤 마치 몸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움직임을 전혀 통제할 수 없었다는 점에서는 걱정이 됐다.
‘맞다. 연나는 어디 있지?’
석목은 연나가 마지막 순간에 자신을 위해 치명적인 일격을 막아내려 한 것을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었다.
자신은 연나에게 절대 그런 명령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고작 후천초기에 불과한 해골에게 희망을 걸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을 구하러 왔다는 사실에 감동한 석목은 연나의 안위가 걱정됐다. 다행스럽게도 연나와의 정신은 아직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보아, 별다른 문제없이 사령계로 돌아간 것 같았다.
석목은 연나의 자발적인 움직임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연나를 소환해 어떻게 된 것인지 알아보고 싶었으나, 전신이 저릿해서 도무지 정신이 집중되지 않았다.
그때 석목이 갑자기 이마를 탁 치더니 몸을 일으켰다.
“앗! 가장 중요한 것을 잊을 뻔했구나.”
자신이 용사의 금지에 들어와서 위험을 무릅쓰고 삼수흉망을 사냥한 이유는 결국 그것의 수혼을 얻어 토템저주를 억누르기 위함이었다.
석목은 거대한 원숭이가 산수흉망의 수혼을 끄집어내 삼켰던 것을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마음이 급해진 석목은 다시 눈을 감았다.
뱃속에서 천천히 꿈틀거리는 뜨거운 열기 속에서 삼수흉망의 기운이 새어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석목은 기뻐하며 서둘러 수혼 주머니를 꺼내서 수혼을 흡수하려 했다.
그러나 허리춤을 만진 그는 그제야 자신이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있으며, 허리춤에 있어야 할 수혼 주머니 또한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운철흑도 등 물건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그리고 풀숲 사이에 떨어져 있는 붉은색 가죽 주머니도 눈에 들어왔다.
바로 수혼 주머니였다.
수혼 주머니를 발견한 석목은 기뻐하다 말고 금세 미간을 찌푸렸다. 뭔가 좋지 않은 예감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급히 걸어가서 수혼 주머니를 들여다본 석목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수혼 주머니에 들어 있던 수혼이 전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주머니 안에는 열 개가 넘는 후천 대원만과 후천 후기의 수혼이 들어 있었으며, 초중기의 수혼도 상당수 있었다.
그러나 석목은 곧 고개를 가로저으며 미련을 떨쳐냈다. 지금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삼수흉망의 수혼이었다.
석목이 수혼 주머니를 입 주변에 가져다 대고 진기를 끌어올리자, 주머니가 살짝 빛나더니 흡입력이 생겨났다. 은색 빛에 감싸인 검은색 수혼이 그의 입에서 나왔다.
수혼이 몸부림치며 흡입력에 저항하자 석목이 진기의 주입을 늘렸다. 수혼 주머니에서 붉은 빛이 크게 일더니 흡입력이 더욱 강해졌다.
그러자 은색 빛에 뒤덮인 검은 구슬이 순간 수혼 주머니로 쏙 들어갔다.
석목은 그제야 한숨을 돌리며 기쁜 표정으로 수혼 주머니를 조심스럽게 허리춤에 걸었다.
이어 땅에 떨어진 배낭에서 옷을 꺼내 입은 석목은 운철흑도를 주워들고 자세히 살폈다. 삼수흉망이 운철흑도를 물었을 때 부러지는 소리가 난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역시나 칼등에는 두 개의 작은 금이 나 있었다. 그러나 사용하기에는 영향이 없어 보였다. 추후에 종문에 돌아가서 조평에게 수리를 부탁해야 할 것 같았다.
석목은 삼수흉망의 시체에서 비교적 온전한 비늘이 붙어 있는 가죽을 벗겨낸 후, 그것을 말아서 배낭에 넣고 삼수흉망의 보금자리로 향했다.
석목은 삼수흉망이 똬리를 틀고 있던 자리를 찾았고, 운철흑도를 내려놓고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석목은 쉬골단을 복용한 뒤 눈을 감고 법결을 떠올리며, 반야천상공 7단계에 따라 진기를 운기하기 시작했다. 단전과 경맥에 가득 찬 진기와 복부의 열기가 그에게 수련을 하고자 하는 욕구를 불러일으킨 것이었다.
천상공 7단계를 손쉽게 넘어선 석목은 단전과 경맥에 여전히 진기가 충만해 있는 것을 느끼고, 8단계까지 단숨에 돌파해냈다.
이후 석목은 청명과를 하나 베어 먹고 하루를 꼬박 들여서 수련을 계속했다. 뱃속에 있는 삼수흉망의 정혈을 전부 진기로 전환한 석목은 결국 천상공 9단계까지 오를 수 있었다.
후천중기의 무인이었던 석목이 단 이틀 사이에 후천후기의 무인이 된 것이다. 가히 혀를 내두를 만한 속도였다.
석목의 힘은 코끼리 세 마리만큼이 더해져서 거의 만 근에 근접해 있었다. 이는 이미 일반적인 선천초기 무인의 힘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이제 반야천상공 두 단계만 더 수련한다면 후천 대원만의 경지까지도 오를 수 있었다.
비록 혈맥의 방해 탓에 선천의 경지에 오르는 것이 일반인보다 몇 배 이상이나 어렵겠지만, 적합한 선천등급의 심법을 찾아내고 청명과를 활용한다면 충분히 시도해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틀 후, 석목은 깊은 동굴 속에서 눈을 감은 채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호흡을 가다듬던 석목의 허리춤에서 갑자기 붉은 빛이 빛나기 시작했다.
석목은 곧바로 눈을 뜨고 품속에서 옥부(玉符)를 꺼냈다. 그것은 석목이 금지에 들어오기 전에 수혼 주머니와 함께 받은 것이었다.
“드디어 끝났구나!”
석목은 한숨을 돌리며 운철흑도를 집어 들고 옥부에 진기를 주입했다.
옥부에서 붉은 빛이 터져 나오며 직경이 반 장 가까이 되는 붉은 진법이 그의 몸을 감쌌다.
다음 순간 진법이 붉게 반짝였다. 그리고 석목은 진법과 동시에 자취를 감추었다.
* * *
같은 시간, 백마산 뒤편의 산골짜기에는 여덟 부족의 제사장이 검은 제단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그들은 무언가 기대하는 표정으로 거대한 바위로 이루어진 원형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잠시 후 직사각형 바위에 새겨진 부문들이 반짝이더니 붉은 빛이 원형진을 뒤덮었다.
“시간이 됐다!”
여전히 겉모습이 야위고 허약해 보이는 대제사장이 담담한 표정으로 한 마디 내뱉었다.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는 순간, 그 끝에서 한 줄기 붉은 빛이 발사되어 거대한 원형진의 중앙으로 빨려 들어갔다.
원형진의 붉은 빛이 일그러지더니 그 너머로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어렴풋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
붉은 빛에서 나온 사람들 중에는 힘겨운 듯 숨을 헐떡이거나 피투성이가 된 이도 있었다.
모두 용사의 문으로 들어갔던 자였다.
원형진의 붉은 빛은 족히 이 각 가까이 빛나다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러나 그 광경을 본 제사장들은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표정을 일그러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 금지에 들어간 야만족의 숫자는 백 명이 넘었다. 그러나 지금 남은 사람의 수는 고작 오륙십 명에 불과했다.
즉, 거의 절반에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어서 그 안에 영원히 갇히게 됐다는 것이다.
금지에 들어간 야만족은 하나하나가 각 부족의 정예였다. 그렇기 때문에 단 한 명을 잃는 것도 부족의 막대한 손실이었다.
비록 용사의 금지에서 서로 목숨을 빼앗는 것을 금한다고 명문화를 한 것은 아니었지만, 흉만과 평만 사이에는 서로의 수혼만 빼앗을 뿐 죽이지는 않겠다는 암묵적인 약속이 있었다.
게다가 그들은 금지안의 상황에도 대체로 익숙했다. 따라서 공적을 위해 무모하게 진입하지 않는 한 생명의 위협을 받을 리 없었고, 지금까지의 시련에서 사망률은 전체의 이 할도 채 되지 않았었다.
* * *
원형진의 붉은 빛이 완전히 사라질 즈음, 그 안에서 나타난 이들은 이미 각 부족원별로 정렬해 서 있었다.
석목은 평만의 네 부족 옆으로 걸어가다가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화무공주였다.
그녀는 안색이 살짝 창백한 것을 제외하면 무탈해 보였다. 석목이 무사한 것을 확인한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걸 본 석목도 마음을 놓으며 말했다.
“공주님,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화무공주는 인족의 안위와 관련된 교섭을 진행해야 하는 중임을 맡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만약 사고가 일어날 경우 발생하는 영향은 매우 클 것이었다.
그러나 특수한 신분인 그녀는 당연히 몸을 지킬만한 수단을 여럿 지니고 있었다. 그러니 어지간히 강한 상대와 마주치지 않는 이상, 상대를 이기지는 못해도 최소한 자신의 몸을 지키는 정도는 문제가 없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앗! 어느새 경지가….”
화무공주가 말하다 말고 놀란 듯 석목을 바라보았다.
“공주님과 헤어진 후에 기연을 얻어 한층 더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석목은 구체적인 설명은 하지 않고 웃으며 말했다.
화무공주는 호기심이 일었지만, 석목이 자세히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눈치 채고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바로 그때, 석목은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시선의 주인공은 향주였다. 그녀는 검은 갑옷을 입은 반인반어 사내의 옆에 서서 석목을 관심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석목은 삼수흉망과 싸울 당시를 떠올리며 향주에게 고마운 마음이 일었고, 그녀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