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음흉한 속내
화무공주는 창백한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며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천천히 제단 앞으로 걸어 나갔다.
화무공주가 수혼 주머니를 꺼내 들자 긴장한 염아 제사장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녀를 응시했다.
화무공주는 어두운 표정으로 수혼 주머니에 진기를 주입했다.
화악!
그녀의 주머니에서 스무 개가 넘는 수혼이 떠올랐다. 후천 대원만 수혼이 다섯 개, 후기의 수혼이 아홉 개 있었다. 나머지는 전부 후천 초기와 중기의 수혼이었다.
화무공주가 얻어온 수혼의 수는 한 부족의 수확과 필적할 정도로 많았다. 그러나 선천수혼이 없는 이상 역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녀의 주머니에서 마지막 수혼까지 나오자 평만부족 제사장들의 얼굴에는 실망이 가득 차올랐다.
이제 남은 사람은 석목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제사장들은 석목에 대해서는 전혀 기대하지 않고 있었다. 후천중기의 무인이 용사의 금지에서 살아나온 것만으로도 기적이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심지어 석목이 후천후기의 경지에 오른 것도 눈치 채지 못했다.
석목이 눈을 반짝이며 조용히 앞으로 걸어 나가는 순간, 갑자기 흉만부족 쪽에서 놀라움의 함성이 들려왔다.
평만부족 모두와 화무공주, 석목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난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서는 두 해족이 수혼을 꺼내고 있었는데, 향주의 몸 앞에서 사람의 머리만한 흰색 수혼이 밝게 빛나고 있는 게 보였다. 또 하나의 선천수혼이 나온 것이다.
석목은 놀란 표정이 되었다. 그는 향주의 실력에 대해 다시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평만부족의 제사장들은 이제 고개를 저으며 씁쓸하게 웃고 있었다. 두 개의 선천초기 수혼만큼 점수가 뒤처지면서 결국 마지막 남아 있던 희망마저 산산이 부서진 것이다.
염아 제사장의 마음속에서는 실망감과 분노가 동시에 솟구쳤다. 그는 즉시 이 자리를 떠나고 싶었지만, 대제사장 필력격이 있는 곳에서 제멋대로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는 짜증이 가득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리다가, 무심코 석목이 등에 메고 있는 배낭에 눈길이 꽂혔다.
배낭 위에 있는 작은 구멍을 통해 안에 있는 물건이 염아 제사장의 눈에 들어왔다. 그것은 구렁이의 가죽처럼 보였는데, 비늘 위에 화염무늬가 새겨진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것을 보고 염아 제사장은 토템용사들이 용사의 문에 진입한 이후 민도로부터 들은 이야기가 문득 떠올랐다.
석목이 민도로부터 다수흉망에 관한 정보를 얻어갔다는 이야기가 기억난 것이다.
그 순간, 석목이 팔을 휘두르자 족히 수박만한 크기의 검은 수혼이 떠올랐다.
평만부족 쪽에서 일부 눈치 빠른 이들이 그 수혼을 보고 놀라 외치기 시작했다.
“저것은….”
“저 수혼을 봐!”
“아주 강력한 혼의 파동이군. 이건 설마….”
강한 힘의 파동이 제단 주위의 모든 사람의 시선을 끌었다. 석목 앞에 떠 있는 검은색 수혼을 발견한 이들이 모두 넋을 놓았다.
시종일관 몽롱하고 졸린 듯한 표정이던 대제사장도 눈을 살짝 뜨고 석목을 바라보았다.
“이, 이것은… 이것은 선천중기의 수혼!”
금우부족의 제사장이 중얼거렸다.
잠시 후, 평만부족의 제사장들이 크게 웃으며 기쁜 표정을 지었다.
멍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석목을 바라보던 화무공주의 아름다운 얼굴에도 곧 놀라움과 기쁨이 교차했다.
반면 방금 전까지 승리를 확신하던 흉만부족 야만족들은 파랗게 질렸다. 순식간에 승리가 날아가 버렸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는 듯, 그들의 얼굴에는 굳어버린 미소가 아직 남아 있었다.
해족의 성녀 향주는 미간을 잠시 찌푸렸다가 다시 폈다. 그녀는 아름다운 눈을 반짝이며 석목을 바라볼 뿐, 크게 실망한 표정을 짓지는 않았다.
“삼수흉망의 수혼이라니, 정말 굉장하군요!”
박장대소를 하려던 염아 제사장이 곧 자신의 입장을 자각하고 표정을 거두어들이며 말했다.
“과찬이십니다.”
석목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며 수혼을 다시 챙기려 했다.
“잠깐!”
바로 그때, 누군가 큰 소리로 외치며 흉만부족 야만족 사이에서 걸어 나왔다. 열사부족의 제사장이었다.
그의 말에 석목은 동작을 멈추었다. 그리고 차가운 눈빛으로 열사부족의 제사장을 한 번 바라보고, 다시 염아 제사장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염아 제사장이 눈썹을 치켜 올리며 화가 난 목소리로 물었다.
“이혁 제사장, 승패가 결정 났소. 설마 아직도 반대 의견이 있는 것이오?”
다른 평만부족의 제사장과 부족원들도 일제히 열사부족의 제사장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얼굴에 경멸의 표정이 스쳤다.
“하하, 석 용사가 용감무쌍하게 삼수흉망을 사냥했으니 시합의 결과는 명백하지요. 당연히 두말없이 결과에 승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이혁 제사장은 말을 하다 말고 석목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금우부족의 제사장이 재촉했다.
“하지만 무엇이오? 할 말이 있다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시오.”
“삼수흉망의 수혼은 그가 가져가게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석목은 이혁을 보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그때 옆에 있던 화무공주가 먼저 나섰다.
화무공주는 제단 위 대제사장이 있는 곳을 향해 예를 표하며 말했다.
“제시한 만큼의 자원을 내놓는다면 용사의 문에 들어갈 수 있고, 그곳에서 얻은 것은 마음껏 가지라고 대제사장님께서 친히 약속하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이혁이 장내의 모든 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 말이 맞지만, 용사의 문은 우리에게 있어서 의미가 남다릅니다. 본래 인족은 발조차 들이는 것이 불가능한 곳이지요. 그 안에서 나온 수혼은 우리 용사들의 수련에 있어서 근본이 되는 것이오. 특히 선천등급 괴수의 수량이 많지 않으니 한 마리, 한 마리가 매우 귀중합니다.
동맹이 성사된 것을 기념하여 공주님께서 그 수혼을 우리에게 건네준다면 한없이 감사할 것입니다. 두 분이 용사의 문에 들어가기 위해 약속했던 자원도 전부 없었던 것으로 하지요.”
그의 말이 끝나자 흉만의 세 제사장이 일제히 맞장구를 쳤고, 염아 제사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평만부족의 제사장은 생각에 잠긴 표정이 되었다. 심지어 오각부족의 제사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기까지 했다.
그 모습에 석목은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그것은….”
석목과 주위 야만족의 표정을 보며 염아 제사장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지금 동맹을 핑계로 우리에게 수혼을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건가요?”
화무공주가 차가운 목소리로 따졌다. 그러자 이혁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투로 대꾸했다.
“오해하지 마십시오. 그저 흥정을 하는 것입니다. 선천수혼은 인족에게 아무 쓸모가 없지만 우리 야만족에게는 그 의미가 매우 큽니다. 동맹을 맺게 되었으니 서로 상대방을 위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바로 그때, 검은 제단 위에서 대제사장 필력격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야신 백성들의 말에는 반드시 신용이 있어야 한다. 이미 약속을 했는데 어찌 다른 말을 한단 말이냐?”
대제사장의 말에 장내에 있던 모든 야만족들이 일제히 외쳤다.
“맞습니다!”
이혁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며 무언가 말하려 했다.
“대제사장님, 이것은….”
그러나 필력격은 그가 더 말하기도 전에 휘청거리며 일어났다. 그는 제단의 양측에 있는 두 명의 하급 제사장에게 물었다.
“수혼의 집계는 끝났겠지?”
대제사장이 입을 열자 평만과 흉만 양측의 모든 이가 정숙했다. 석목은 그 사이에 수혼 주머니에 진기를 주입해 삼수흉망의 수혼을 챙겼다.
“전부 집계가 끝났습니다!”
두 명의 하급 제사장이 필력격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이어 두 사람은 각자 계산한 수혼의 수와 합계 점수를 보고했다.
사실 굳이 계산하지 않더라도 결과는 모두가 훤히 알고 있는 그대로였다.
선천중기의 수혼 한 개는 선천초기 수혼 열 개와 점수가 같았다. 평만부족은 석목이 가져온 삼수흉망의 수혼 한 개로 단번에 흉만부족의 점수를 앞질러버린 것이다.
“평만부족의 승리를 선포한다.”
필력격이 모두를 천천히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흐릿한 눈빛이 석목을 지나칠 때, 동공이 눈치 채기 어려울 만큼 살짝 수축했다.
평만부족의 네 제사장은 그제야 완전히 마음을 놓았다. 대제사장의 선포로 비로소 시합이 막을 내린 것이다.
흉만부족은 달갑지 않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 누구도 대제사장의 말에 감히 반박하지 못했다.
“향주 성녀. 시합의 결과에 따라 동맹의 상대를 결정하겠다는 약속에 따라, 해족의 제안은 어쩔 수 없이 거절해야겠군요.”
필력격이 향주에게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도 시합을 받아들였으니 결과에 승복하겠습니다. 야만족은 인족과 동맹을 맺기로 결정했으니 오늘부터 우리는 적이군요. 저희는 오래 머물지 않고 바로 떠나겠습니다.”
향주는 살짝 웃으며 담담하게 대답하고 몸을 돌렸다. 필력격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을 뿐 만류하지 않았다.
향주는 한 걸음 내딛다 말고 갑자기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려 석목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녀의 곁에 있던 검은 갑옷의 사내는 멍청한 표정으로 향주의 행동을 지켜보았다. 주위의 야만족들도 그 광경을 보고 일제히 놀란 표정이 되었고, 석목의 옆에 있던 화무공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석목은 파란 옷을 펄럭이며 사뿐사뿐 다가오는 향주를 그저 덤덤한 표정으로 응시했다.
석목의 앞에 멈춰 선 향주는 맑고 예쁜 눈으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화무공주의 눈빛을 느끼며 천천히 물었다.
“성녀님께서 무슨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그러자 향주는 침울한 눈빛으로 그를 보며 말했다.
“석 공자님, 과거에 위험을 무릅쓰고 저를 곤경에서 구해주신 것, 그리고 금지에서 다시 한 번 구해주신 것을 가슴 깊이 새기고 잊지 않겠습니다.”
향주의 표정을 보고 갑자기 마음이 약해진 석목의 표정이 한결 부드러워졌다.
그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모두 인연이 잘 들어맞아서 그런 것뿐이니 너무 담아둘 필요 없습니다.”
향주는 고개를 정중하게 가로저으며 손을 흔들었다.
“우리 해족은 받은 은혜는 반드시 갚습니다.”
그러자 석목의 몸에서 파란 빛이 반짝이더니, 품속에 있던 진주가 향주에게 날아갔다.
향주는 자신의 손가락을 깨물어 짙은 남색 피를 진주 위에 떨어뜨렸다. 진주에 닿은 피는 곧장 흡수되어 사라졌다.
이어 그녀가 무언가를 중얼거리자 파란색 부문이 나타나 진주 속으로 들어갔고, 아주 작은 파란색 인영이 진주 속에서 나타났다.
석목은 금색으로 변한 눈으로 진주 속의 그림자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작은 인영은 향주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향주는 살짝 웃으며 진주를 석목에게 건넸다.
이어 향주가 입술을 살짝 움직이자 그녀의 작은 목소리가 석목의 머릿속에서 직접 울렸다.
“이것은 우리 관계의 증표예요. 추후 인족과 해족의 전쟁이 일어났을 때, 만약 해족과 마주친다면 이 진주를 보여주세요. 그들이 공자님의 목숨을 쉽게 앗아가지 못할 것입니다.”
석목은 놀라서 몸을 흠칫 떨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머릿속에서 계속 들려왔다.
“하지만 석 공자님, 가능하면 해족과의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전장에서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말을 마친 향주는 몸을 돌려 걸어갔다. 검은 갑옷을 입은 사내가 꼬리를 움직이며 급히 그녀를 쫓았다.
산골짜기 근처에는 다른 해족 일행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향주를 둘러싸 호위하며 빠른 속도로 그곳을 벗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