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화. 교섭
진주를 받아 든 석목의 머릿속에 무수히 많은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는 진주를 바라보며 어떤 섭섭함을 느꼈다.
주위의 야만족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에 석목은 화무공주의 일개 호위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금지에서 선천중기의 괴수를 사냥하고 인족의 적인 해족의 성녀와도 깊은 인연을 가지고 있으니, 새삼 다르게 보이는 게 당연했다.
한편 화무공주도 석목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녀는 상당한 시간 동안 석목과 동행했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그의 신분이나 실력에 대해 점점 더 알 수 없게 되었다.
석목은 주위의 시선을 느끼며 몸을 돌렸다. 그는 화무공주를 향해 살짝 웃어 보인 뒤 그녀의 뒤에 섰다.
그때 대제사장 필력격의 지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화무공주, 성설궁으로 가시지요. 야만족과 인족의 동맹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필요할 듯합니다.”
모두의 시선이 제단 위로 향했다. 화무공주도 신중한 표정으로 필력격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산골짜기의 모든 야만족은 각자 제사장의 지시에 따라 빠르게 해산했다. 대제사장 필력격과 화무공주, 그리고 여덟 부족의 제사장은 함께 성설궁으로 향했다.
그 후, 양측은 동맹에 대한 구체적인 조건과 자원 배상 등의 문제를 놓고 사흘간이나 치열한 논쟁을 이어갔다.
이 며칠간 석목은 시종일관 화무공주의 곁을 따르며 그녀를 지켜봤다.
본래 화평을 주장했던 평만부족은 과도한 조건을 제시하지 않았지만, 흉만부족의 제사장들은 쉽게 타협하려 들지 않았다.
특히 열사부족의 제사장 이혁은 망우와 광사부족처럼 격렬한 언사를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 대신 무척이나 교활했다.
그러나 화무공주는 비록 혼자였지만, 기세가 등등한 흉만부족 제사장들을 상대로 전혀 겁먹지 않았다. 그녀는 종종 예리한 논리로 반박해서 상대의 말문을 막히게 하곤 했다.
야만족의 대제사장 필력격은 회의 때마다 상석에 앉아 있었으나, 대부분 흐리멍덩한 표정으로 일관하며 양측의 논쟁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내에 있는 흉만과 평만 제사장 모두가 그를 공손하게 대하는 것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사흘 후, 드디어 협의를 마친 양측이 성설궁의 성전에서 정전 조약을 체결했다.
인족은 야만족에게 점령당한 대제국의 3주를 백 년간 야만족에게 빌려주고, 또 일부 식량과 물자를 제공하기로 했다.
야만족은 국경에 인접해 있는 광산에서 인족이 채굴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주는 대신, 인족은 그곳에서 얻은 광석으로 제조한 무기와 갑옷 중 일정 비율을 야만족에게 제공하기로 했다.
그 외에도 조약에는 변경의 백 리 내에 군대를 주둔시킬 수 없다는 사항, 국경 근처의 교역에 관한 사항 등 다양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화무공주와 대제사장은 칼로 손바닥을 그어 금색 두루마리 양 끝단의 공백에 피를 떨어뜨렸다. 그 두루마리는 협의 내용이 적힌 조약서였다.
그러자 눈부신 금색 빛이 두루마리에서 뿜어 나왔다. 금색 빛이 하늘 높이 치솟자 장내의 모두가 눈을 뜨지 못했다.
한참 후, 금빛이 점차 흩어지고 모두가 눈을 뜨자, 어느새 금색 두루마리는 둘로 나뉘어 화무공주와 대제사장의 손에 각각 쥐어져 있었다.
화무공주는 반쪽짜리 두루마리를 챙겨 넣으며 대제사장에게 예를 표했다.
“이것으로 우리 두 종족이 맹우가 되었군요.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대제사장은 약간 피로한 듯 의자에 앉아 마른 팔을 흔들며 대답했다.
“예의 차릴 필요 없습니다.”
한편 대제사장의 뒤에서 정전 협의가 체결되는 순간을 지켜보던 여덟 부족 제사장의 표정은 각기 달랐다.
평만부족 제사장들은 매우 기쁜 듯 만면에 미소가 가득했다. 반면 흉만부족 제사장들도 미소를 짓고는 있었지만, 다분히 억지스럽게 보이는 웃음이었다.
특히 열사부족 제사장 이혁의 웃음은 석목의 마음을 매우 불편하게 했다.
화무공주 역시 흉만부족이 정전협의를 받아들인다고는 해도, 속으로 다른 속셈을 꾸미고 있을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든 야만족과 인족이 정전 협정을 체결하면서 그녀의 임무는 완수됐다.
“참, 대제사장님께 부탁드릴 것이 한 가지 있습니다.”
화무공주는 열사부족의 제사장 이혁을 한 번 바라보고 빠르게 시선을 거둔 후, 대제사장을 향해 예를 표하며 말했다.
그러자 화무공주의 뒤에 서 있던 석목이 눈빛을 반짝이며 몸을 살짝 떨었다.
대제사장이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온화한 목소리로 말했다.
“편하게 말씀하세요.”
화무공주는 석목을 가리키며 설명했다.
“제 뒤에 있는 석목은 인족의 거점을 지키던 중 야습을 받고 열사부족의 토템저주에 당했습니다.”
그러자 장내에 있는 모두의 시선이 석목을 향했다. 몇몇은 놀란 기색이었고, 몇몇은 담담한 표정이었다.
“다방면으로 조사해본 결과, 저주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더 강력한 수혼을 봉인해야 한다고 하더군요.”
화무공주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필력격을 향해 허리를 숙이며 천천히 말했다.
“현재 수혼은 준비되어 있으나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이 부족한 상황입니다. 방금 조달을 약속했던 식량에 사십만 근을 더할 테니 비술과 바꿔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말을 들은 필력격이 석목을 바라보았다.
그 순간 석목은 깜짝 놀랐다. 마치 벌거벗은 듯 모든 비밀을 대제사장에게 드러내 보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곧 대제사장이 시선을 거두자 긴장은 풀렸지만, 이미 석목의 등 뒤는 땀에 흠뻑 젖어 있었다.
“식량 사십만 근이라….”
대제사장은 무언가 저울질을 하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대제사장님, 토템비술은 우리 야만족의 근본입니다. 인족이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대제사장의 마음이 움직이는 듯하자, 열사부족의 이혁이 벌컥 화를 내며 말했다. 나머지 흉만부족의 제사장들 역시 그의 말에 일제히 맞장구를 쳤다.
대제사장은 이혁에게 시선을 돌리며 천천히 말했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전쟁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 서로 목숨을 걸고 싸울 뿐이니 원한은 마음속에 오래 두지 않는 것이 좋다. 현재 상당수의 부족이 식량이 부족한 상태에 놓여 있다. 사십만 근이라면 많은 부족원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겠지.”
대제사장 필력격의 노쇠한 시선을 받은 이혁이 몸을 흠칫 떨었다. 그는 두 눈을 슬쩍 돌린 후 곤란한 듯 말했다.
“대제사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석목은 우리 부족의 소군주를 살해한 자입니다. 원수에게 토템비술까지 전수한 것을 알게 된다면 열사부족의 부족원 사이에서 불만이 생길 것입니다.”
대제사장은 잠시 고민하다가 말했다.
“네 말도 일리는 있다. 그렇다면 양쪽 모두를 만족 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겠는가?”
“우리 야만족의 토템비술을 원하니, 야만족의 방식에 따라 실력으로 쟁취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십만 근의 식량을 대가로 도전할 수 있는 기회를 한 번 제공하는 것이죠.”
이혁이 태연한 말투로 덧붙였다.
필력격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말했다.
“화무공주가 동의만 한다면 안 될 것은 없지.”
대제사장의 말에 이혁은 석목을 보고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화무공주에게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시오? 사십만 근의 식량을 내고 도전하겠습니까?”
“우선 도전이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설명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그 과정은 대제사장님께서 공평하게 진행해주셨으면 합니다.”
화무공주가 대제사장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대제사장이 입을 열기도 전에 이혁이 웃으며 말을 가로챘다.
“하하, 저는 언제나 공정하게 일을 처리하니 안심해도 됩니다. 방식은 석목과 토템용사가 혈투를 벌이는 것으로 정하지요. 만약 석목이 이긴다면 이전의 은원을 전부 잊고 토템비술을 전수하도록 하겠습니다. 하지만 토템비술은 우리 열사부족의 최고기밀입니다. 그러니 스스로 익힐 뿐 타인에게 전수하지 않겠다고 맹세의 서약을 해야 합니다.”
그의 말에 석목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나 곧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표정을 풀었다.
“만약 그의 실력이 부족해서 패한다면 어떻게 되죠?”
화무공주가 물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삼수흉망의 수혼을 넘겨야 합니다.”
이혁이 웃으며 말했다. 기어코 자신의 속내를 드러낸 것이었다.
그때 석목이 화무공주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서며 말했다.
“좋습니다. 시합에 응하겠습니다.”
장내의 다른 일곱 제사장이 석목의 말에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었다. 흉만의 세 제사장은 석목을 놀리듯이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역시 호쾌하군요. 따로 날을 잡는 것보다는 지금 바로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이혁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나 화무공주가 미간을 찌푸리며 재빨리 가로막았다.
“기다리세요. 이혁 제사장님, 열사부족에서는 누구를 내보내는 거죠?”
이혁이 가볍게 웃으며 손바닥을 한 번 치고, 멀지 않은 곳을 향해 손짓했다.
그러자 대전 주위에 서 있던 열사부족 야만족 중 한 명이 다가왔다. 금지에서 선천수혼을 사냥해온, 마르고 키가 큰 청년이었다.
청년은 차가운 눈빛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입술을 핥았다. 석목은 그에게서 무형의 살기가 몰아치는 것을 느끼고 살짝 놀랐다.
그러나 선천중기의 괴수와도 맞섰던 석목이 그 정도의 기세에 위압감을 느낄 리는 없었다. 석목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청년의 시선을 받았다.
석목의 눈빛에 청년의 동공이 살짝 수축했다. 그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서로를 바라보던 두 사람은 동시에 대전 밖으로 걸어 나갔다.
* * *
잠시 후, 성설궁 앞 광장에서는 수백 명의 야만족이 넓은 연무대를 둘러싸고 왁자지껄 떠들고 있었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마침 오늘 휴식을 취하게 된 병사와 성산에서 거주하는 하급 제사장, 하인 등이었다. 그들은 석목과 열사부족 청년의 시합 소식을 듣고 구경하러 몰려온 것이었다.
성지에서의 일상은 대체로 무미건조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혈투는 상당히 접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특히 이번에는 열사부족의 전설적인 토템용사 오리가 나선다는 이야기에, 모두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이년 전 오리님은 무려 세 초식 만에 망우부족의 망웅을 꺾었어. 그의 실력은 선천등급 아래에서는 적수를 찾기 어려울 정도야. 이번에 제대로 눈요기를 하겠군.”
광사부족의 복장을 한 야만족 병사가 연무대 쪽을 보며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맞아. 망웅은 그 당시 이미 선천등급 이하 제일의 용사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지. 이번 상대인 인족은 정말 재수가 없구나.”
적미부족의 병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당연하지! 우리 오리님의 몸에는 금지에서도 수십 년에 한 번 볼까말까 한 극사(极蛇)의 혼이 봉인되어 있다고. 그가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후에는 선천등급 이하의 용사는 누구도 상대가 되지 못했어.”
열사부족의 복장을 입은 야만족 병사도 덧붙였다.
세 사람의 대화는 주위에 있는 이들의 호응을 얻었다. 무(武)를 숭상하는 야만족은 오리처럼 명성이 자자한 영웅을 받들고 동경했다.그러자 금우부족의 병사가 차갑게 웃으며 말했다.
“흥, 다들 실망하게 되겠군. 저 인족의 사자가 용사의 금지에서 삼수흉망을 처치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어? 삼수흉망은 선천중기의 실력을 가졌다고. 오리가 아무리 대단하다고 한들 삼수흉망보다 강하겠어?”
“쯧쯧, 후천무인이 어떻게 삼수흉망을 처치하겠나? 분명 운이 좋아 중상을 입은 삼수흉망을 죽인 것이겠지.”
광사부족의 하급 제사장이 상대를 무시하듯 바라보며 말했다.
“이번에 금지에 들어갔던 용사들이 반 이상이나 희생됐는데, 아마도 삼수흉망을 잡으려다 그런 것이겠지. 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고, 저 인족이 죽어가는 삼수흉망의 수혼을 가로챘을 가능성이 커.”
“맞아. 듣자하니 저 자는 고작 후천중기의 실력을 가졌다고 하던데, 금지에서 살아나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거야. 저 자는 삼수흉망의 수혼 외에는 다른 어떤 수혼도 가져오지 않았다고 하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