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현계지문-117화 (117/916)

117화. 혈투

한편 석목은 연무대 위에 있었다.

그는 주위에서 들려오는 이야기를 들은 체 만 체 하며, 맞은편에 서 있는 상대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열사부족의 청년 오리는 상반신을 벗고 있었고, 가슴에는 거대한 적색 구렁이 토템이 새겨져 있었다. 얼굴에는 흉터가 여러 개 있는 것으로 보아 많은 전투를 겪어왔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가 들고 있는 좁고 긴 곡도의 표면에는 빼곡한 무문이 새겨져 있었다.

“저는 오리입니다. 금지에서 삼수흉망을 사냥했다니, 정말 감탄했습니다.”

오리가 눈빛을 빛내며 말했다.

“과찬입니다.”

석목이 담담하게 대꾸했다.

연무대에서 멀지 않은 곳에는 흰색 돌을 깎아 만든 이 장 높이의 넓은 관람대가 있었다.

그 위에는 여덟 부족의 제사장이 일렬로 앉아 있었다. 평만부족의 네 제사장은 모두 미소를 짓고 있었고, 흉만부족의 제사장들은 이혁을 제외하고는 모두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었다.

중간의 가장 넓은 상석에는 대제사장 필력격이 졸린 듯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고, 그의 왼쪽에는 화무공주가 앉아 있었다.

대결 준비가 끝난 듯하자 이혁이 몸을 일으켜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오리와 석목을 한 번씩 번갈아 본 뒤 큰 소리로 외쳤다.

“도검에는 눈이 없으니, 목숨을 부지하고자 한다면 상대의 적수가 되지 않는다고 판단될 때 최대한 빨리 패배를 시인하길 바라오. 그럼 시작하시오!”

그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석목이 오른발로 바닥을 박차고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가 운철흑도를 휘두르자 열세 개의 검은 검광이 순식간에 생겨나서 오리를 향해 정면으로 날아갔다.

오리가 차갑게 웃자 그의 가슴에 있는 토템이 붉은빛으로 반짝였다. 이어 그의 몸 전체가 계란만한 크기의 적색 비늘에 뒤덮였다.

동시에 그가 들고 있던 곡도에 새겨진 무문이 천천히 꿈틀거리더니, 곧 곡도 전체가 푸른빛에 감싸였다.

오리 역시 석목을 향해 앞으로 달려 나가며 곡도를 휘둘렀다. 푸른색 검영이 마치 회오리처럼 석목의 검광을 향해 날아갔다.

두 검광이 충돌하려는 순간 오리가 곡도의 방향을 갑자기 꺾었다. 그는 방어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 듯 석목의 공격을 무시하면서 곧바로 머리를 노렸다. 푸른색 검광은 번개처럼 빨라서 석목이 초식을 바꿀 여지를 전혀 주지 않았다.

멀리 관람대에서 지켜보던 화무공주의 표정이 굳었다. 자신이었다면 양패구상을 노리지 않는 이상 초식을 거두며 뒤로 물러났을 것이다. 그러나 오리의 움직임은 석목보다 훨씬 빨랐다.

한편 이들의 대결을 지켜보며 이혁은 속으로 반색을 했다.

그는 오리의 몸에 봉인된 수혼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 잘 알고 있었다. 선천의 경지에 오르지 않은 이들은 그의 방어를 결코 뚫을 수 없었다. 다른 흉만부족 제사장들도 얼굴에 살짝 웃음을 띠었다.

염아 제사장을 포함한 평만부족 제사장들도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 만면에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인족과 야만족의 정전 협정이 체결된 이상, 인족 호위무사의 목숨쯤이야 어떻게 되든 그들이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 인족 사자의 피가 평만에 대한 흉만의 원한을 씻어준다면 그들로서는 나쁠 것이 없는 일이었다.

연무대 주위에 모인 흉만부족 야만족들은 흥분한 표정이었다.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올랐던 망웅 역시 오리의 저 공격에 겨우 세 초식을 버텨내고 무너졌다. 잘해봐야 후천후기의 실력에 불과한 인족이 버텨낼 재간이 있을 리 없었다.

심지어 평만부족의 야만족 역시 오리의 매섭고 신속한 공격을 보며 참지 못하고 박수와 환호성을 올렸다.

잠시 주저하던 석목이 서둘러 도를 회수했다.

거대한 힘을 억지로 회수하려 하자 기혈이 끓어올랐다. 그는 체내에 끓어오르는 기혈을 누르며 지면을 박차고 뒤로 후퇴했다.

그 순간 푸른색 검영이 미세한 차이로 석목의 앞을 스쳐지나갔다. 칼날에 서려 있는 오싹한 살기에 석목은 전신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오리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석목에게 귀신처럼 달라붙어서 그의 목을 향해 다시 한 번 푸른색 검광을 날렸다.

석목은 거대한 화염도로 변한 운철흑도를 휘두르며 반격에 나섰다.

쾅!

푸른 번개가 섞인 뜨거운 기의 파도가 사방팔방으로 퍼져나갔다.

이번에는 오리의 안색이 굳었다. 상상을 뛰어넘는 거대한 힘이 곡도를 타고 전해졌다. 그 힘은 오른팔을 통해서 산사태처럼 체내로 밀려들어왔다.

오른팔이 순간적으로 마비된 오리는 손에서 곡도를 놓치며 연달아 뒷걸음질 쳤다. 그는 체내의 오장육부가 뒤집히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살짝 넋을 놓았다.

그 순간 석목은 눈을 싸늘하게 번뜩이며 두 다리로 연무대를 박차고 나갔다. 그는 뒤로 밀려나는 오리를 향해 쏜살같이 다가갔다.

오리가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석목의 운철흑도가 반짝였다. 열세 개의 붉은 검광이 차례로 오리의 복부를 향해 매섭게 날아갔다.

그러자 기이한 일이 발생했다.

운철흑도가 오리의 복부에 닿으려는 순간, 배에 있는 비늘 표면의 흐릿한 빛이 회전하며 검광을 막아냈다.

운철흑도는 그대로 미끄러지며 상대의 비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도신에 담긴 거대한 힘이 허공을 베면서 균형을 잃은 석목의 몸이 비틀거렸다.

석목은 자신의 공격이 마치 미끄러운 물체를 벤 것처럼 상대에게 조금의 충격도 주지 못한 것에 놀랐다.

오리는 그 기회를 틈타 석목의 공격 범위에서 빠르게 물러났고, 허리춤에서 청록색의 날카로운 단도를 뽑아 들었다.

석목은 제자리에 멈춰 서서 오리의 귀신같이 빠른 움직임을 보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관람대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이혁은 잠시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다시 비웃는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그는 석목이 어느새 후천후기의 경지에 올랐다는 것, 그리고 그가 놀라운 힘을 가졌다는 것을 눈치 챘지만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고작 그것만 가지고 오리의 몸을 감싼 비늘을 뚫기에는 역부족이기 때문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혁은 오리의 청록색 단도를 보며 흉흉한 표정을 지었다.

화무공주의 옆에 앉은 염아 제사장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고개를 살짝 가로저었다.

다른 부족의 제사장들은 모두 재미있는 구경이라도 하듯 그들의 전투를 감상했다. 극사는 용사의 금지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려운 후천괴수 중의 하나였다. 그렇기에 그들은 오리의 방어가 뚫릴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대제사장은 흐릿한 눈을 가늘게 뜨고, 마치 잠에 빠진 것처럼 고개를 앞뒤로 끄덕였다.

화무공주는 무거운 표정으로 오리의 몸을 감싼 비늘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연무대의 주위에서는 환호성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방금 오리와 석목이 맞붙었을 때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모두를 흥분시키기에 충분한 장면이었다.

오리는 음침한 눈빛으로 석목을 한 번 바라보고 차갑게 웃었다. 그 순간 그의 가슴에 새겨진 토템이 다시 반짝였다.

곧이어 오리의 몸이 팽창하기 시작하더니 셋으로 나뉘어졌다. 세 개의 몸은 동시에 단검을 휘두르며 석목을 덮쳐왔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의 눈이 한순간 금색으로 빛났다가 다시 본래의 색으로 돌아왔다. 석목은 셋 중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오리를 향해 붉게 타오르는 운철흑도를 휘둘렀다.

순간 오리의 눈에 반가운 기색이 스쳐지나갔다.

둘의 공격이 충돌하기 직전, 석목의 좌측 지척에서 나타난 도가 그의 목을 향해 베어 들어왔다. 가운데와 오른쪽의 잔상은 그 자리에서 천천히 흩어져 사라졌다.

바로 그때, 석목은 도를 회수하며 허리를 숙여 오리의 일격을 피했다. 그와 동시에 하얗게 빛나는 왼손으로 주먹을 내질렀다.

퍽!

석목의 주먹이 오리의 아랫배에 정확하게 꽂혔다. 오리의 비늘을 덮은 흐릿한 빛이 다시 회전하기 시작했다.

비늘의 기괴한 힘이 다시 한 번 발현되려는 순간, 석목이 고함을 지르자 그의 왼팔이 맹렬한 기세로 두꺼워지며 선천등급의 강자와 비교해도 뒤처지지 않는 강한 힘이 석목의 주먹에서 순식간에 작렬했다.

오리의 비늘 위로 회전하는 빛이 순간 한곳에 모이더니, 복부의 비늘과 함께 폭발했다.

오리는 경악한 표정이 되었다, 이때 그의 복부에서 격렬한 통증이 밀려왔다. 마치 만근짜리 망치가 자신의 배를 두드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으억…!”

오리의 비명이 울려 퍼지다가 도중에 갑자기 멈췄다.

석목의 공격을 맞고 날아간 오리는 연무대를 둘러싼 단단한 가림막에 부딪혀 튕겨 나왔다. 이미 정신을 잃은 그의 코와 입에서는 피가 뿜어 나오고 있었다.

오리의 청록색 단도는 연무대 바닥에 깊게 박힌 채, 웅웅 소리를 내며 좌우로 흔들렸다.

연무대 주위를 둘러싼 수백 명의 관중은 모두 멍청한 표정이 되어 오리를 바라보았다. 그의 아랫배 비늘은 매우 심각하게 파손돼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그의 호흡은 거의 숨을 쉬지 않는 것처럼 미약했다.

그렇게 해서 승부는 갈렸다.

연무대 주위는 순간 적막에 휩싸였다. 관람대 위쪽에서 지켜보던 제사장들의 표정도 굳어졌다.

열사부족의 이혁 제사장만이 분노와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을 짓고 있었다.

화무공주는 놀라서 석목을 한 번 보았고, 곧 긴장이 풀리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았다. 그녀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줄곧 나른한 표정을 짓고 있던 대제사장 필력격의 쳐진 눈꺼풀 아래에서 눈동자가 빛났다.

그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이혁, 결과를 선포해라.”

이혁은 파랗게 질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결국 천천히 입술을 뗐다.

“승자, 석목.”

연무대 주위의 야만족 사이에서 그제야 놀라움이 가득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석목은 자신의 강함을 증명해보였고, 그 결과 강자를 존경하는 야만족의 인정을 이끌어낸 것이다.

석목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기절한 오리와 연무대의 바닥에 꽂혀 있는 청록색 단도를 번갈아 보았다.

상대는 이혁의 명령을 받고 자신의 목숨을 노린 것이 분명했다. 조금만 더 힘을 가했다면 상대를 즉사시킬 수도 있었지만, 그는 누차 고민한 끝에 그렇게 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어깨에 메고 연무대 아래로 뛰어 내려갔다.

주위의 요란한 환호성을 들으며 이혁의 안색은 점점 일그러졌다.

그의 뒤에 있던 열사부족의 야만족이 작은 목소리로 불렀다.

“제사장님….”

“어서 오리를 챙기지 않고 무엇들 하는 것이냐!”

머리끝까지 화가 치솟은 이혁이 소리쳤다.

그의 호통에 야만족은 관람대에서 급하게 달려 내려갔고, 뒤따라온 두 열사부족의 야만족과 함께 기절한 오리를 데리고 내려갔다.

“승부가 났으니 약속에 따라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건네주시죠.”

화무공주가 담담하게 웃으며 이혁 제사장에게 말했다.

석목은 이미 화무공주의 뒤에 서 있었다.

석목을 바라보는 제사장들의 표정은 이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 그들은 석목이 삼수흉망을 쓰러뜨렸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게 됐다.

반면 이혁은 거의 울 것 같은 침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잠시 후, 이혁이 석목을 향해 푸른 뼛조각을 강하게 던졌고, 석목이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았다.

“자신의 실력을 숨기고 전혀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니 대단하군요. 그 뼛조각에는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만약 의심스럽다면 대제사장님께 감정을 받아도 됩니다. 내용은 곧 사라지니 사흘 안에 전부 외워야 할 것입니다. 비술을 익힐 수 있을지 없을지는 본인의 능력에 달려 있겠죠.”

이혁이 말했다.

“만약 맹약을 어기고 다른 사람에게 비술의 내용을 알린다면, 그때는 제가 아니라 대제사장님께서 직접 손을 쓸 것이니 주의하시오.”

이야기를 마친 이혁은 대제사장에게 예를 표한 후 빠른 걸음으로 사라졌다. 다른 열사부족의 야만족들은 숨도 크게 쉬지 못하고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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