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경고
시합이 끝나자 연무대 주위의 관중들도 빠르게 흩어졌다.
석목은 즉시 뼛조각을 이마에 가져다 대고 눈을 감은 채 그것에 기록된 내용을 읽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석목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화무공주를 향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표정이 밝아진 화무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나 대제사장을 보았다,
“대제사장님, 인족의 연맹에 돌아가 소식을 전하고 약속했던 물자도 준비해야 하니, 저희는 이만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화무공주가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오래 붙잡지 않겠습니다.”
대제사장이 몸을 휘청거리며 일어나 예를 표했다.
“염아, 청아부족의 정예용사를 파견해서 화무공주를 안전하게 호위하도록 해라. 어떤 사고도 발생해서는 안 된다.”
“네!”
대제사장의 위엄 있는 지시에 염아가 급하게 몸을 일으키며 공경하게 대답했다.
필력격 대제사장은 화무공주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시종의 부축을 받아 천천히 관람대 아래로 내려갔다.
다른 부족의 제사장들도 모두 화무공주에게 작별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이제 연무대 주위에는 화무공주와 석목, 그리고 청아부족의 야만족만 남게 되었다.
염아 제사장이 곁에 있는 몇몇 하급 제사장에게 지시를 내리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관람대 아래로 내려갔다. 아마도 화무공주와 석목의 호위를 위해 용사를 데리러 가는 것 같았다.
그때 석목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청아부족의 야만족 사이에서 민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염아 제사장님, 그동안 수고 많이 끼쳤습니다.”
화무공주가 염아 제사장을 향해 말했다.
염아 제사장이 웃으며 화답했다.
“우리 부족의 귀빈이니 당연한 것이지요.”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하급 제사장들이 청아부족의 용사들을 데리고 다가왔다.
염아 제사장은 화무공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들에게로 향했다.
“공주님, 이곳에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방에서 짐을 챙겨 나오겠습니다.”
석목은 푸른 뼛조각을 조심스럽게 챙긴 후 몸을 돌리려 했다.
그때 화무공주가 갑자기 말했다.
“더 이상 저와 동행할 필요 없어요.”
그녀의 말에 석목이 발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의아한 표정으로 화무공주를 보았다.
“고생 끝에 수혼과 토템비술을 얻었으니, 우선 이곳에서 토템저주를 푸는데 전념하도록 하세요. 야만족의 토템비술은 쉽게 수련할 수 있는 것이 아닌 만큼 이곳에서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거예요. 성설궁을 떠나면 다른 이에게 도움을 구할 기회는 전혀 없을 테니까요. 저는 청아부족의 호위대와 함께 하니 안전할 겁니다.”
화무공주의 설명에 석목은 그녀를 향해 예를 표하며 말했다.
“배려 감사합니다, 공주님.”
화무공주는 담담하게 웃으며 허리춤에서 손바닥 크기의 칠각형 금색 영패를 꺼내 석목에게 건넸다. 영패의 한쪽 면에는 부문이, 다른 한쪽 면에는 ‘연(联)’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석목은 어리둥절해서 물건을 받아들고 그녀를 보았다.
화무공주가 말했다.
“이것은 7종문 연맹의 자금령(紫金令)이에요. 이 영패를 지니고 있으면 언제든 연맹에 출입할 수 있으며, 연맹의 거점 한곳에 도움을 청할 수 있어요. 이번에 야만족과의 동맹이 성사된 것에는 당신의 공이 크니 이 물건을 선물로 드릴게요. 감사의 표시라고 생각해주세요.”
“아니… 이런 귀한 것을 어떻게 받겠습니까!”
놀란 석목은 급하게 영패를 돌려주려 했지만, 화무공주는 웃으며 말을 이었다.
“사양할 필요 없어요. 저에게는 그다지 필요가 없는 물건이에요. 사실 저는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고 있어요. 토템저주에 관해 제가 약속했던 일들을 결국 당신이 직접 나서서 해결하게 했으니까요. 이 물건은 그에 대한 보상입니다.”
화무공주가 그렇게까지 말하자, 석목도 더 이상 사양하기 어려워져서 영패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참, 이혁 제사장의 원한이 굉장히 깊은 것 같아요. 대제사장이 있는 이곳에서야 손을 쓰지 못하겠지만, 인족의 영토로 돌아갈 때는 반드시 조심하도록 하세요.”
화무공주가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다.
그 말에 석목도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호위대의 편성을 마친 염아 제사장이 스무 명 남짓한 인원을 끌고 다가왔다.
호위대는 비록 인원은 적었지만 모두 후천후기 이상의 실력자들로 구성돼 있었다. 부대를 이끄는 자는 복면을 하고 차가운 눈빛을 지닌 여인이었는데, 그녀는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는 선천고수였다.
“이 분은 우리 청아부족의 낭청 장로입니다. 앞으로 그녀가 공주님의 호위를 책임질 것입니다.”
염아 제사장이 자신 있게 말했다.
“앞으로 신세지겠습니다.”
화무공주가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복면을 쓴 여인이 눈빛을 조금 누그러뜨리더니 화무공주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염아 제사장님, 한 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화무공주가 물었다. 석목이 이곳에 남아 토템비술을 수련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청이었다.
“그 일은 안심하고 맡겨주십시오.”
염아 제사장이 가슴을 두드리며 화무에게 대답한 후, 석목에게 말했다.
“만약 수련을 하다가 필요한 것이 있다면 언제든 찾아오게나.”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안심이 됩니다.”
화무공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뒤, 호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 * *
청아부족 궁전의 어느 방.
석목이 흥분한 표정으로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막 토템비술을 수련하려던 석목은 아쉬운 듯 들고 있던 뼛조각을 다시 품속에 집어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석목이 방문을 열자 흰 제사장 옷을 입은 야만족 소년이 문 앞에 서 있었다.
“저는 성설궁의 제사장 막죽입니다. 귀하가 인족의 석목 용사님입니까?”
소년 제사장이 먼저 물었다.
“막죽 제사장님이군요. 제가 바로 석목입니다. 들어오시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찾아온 것은 대제사장님이 석목 용사님과의 만남을 요청하셨기 때문입니다.”
막죽은 호기심이 살짝 어린 눈으로 석목을 보며 말했다.
석목은 속으로는 놀랐지만, 전혀 내색을 하지 않으며 물었다.
“대제사장님이 무슨 연유로 저를 찾는지 혹시 알고 있습니까?”
현재 두 종족의 동맹 협상은 이미 마무리됐고, 자신은 그저 화무공주의 호위일 뿐이었다. 대제사장이 어째서 갑자기 자신을 찾는지 전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저도 잘 알지 못합니다.”
막죽이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어쩔 수 없이 석목은 불안한 마음을 안고 막죽을 따라 성설궁으로 향했다.
일 각 후, 석목과 막죽은 성설궁의 별전 앞에 도착했다.
막죽이 문 앞에 서서 석목을 향해 손짓을 했다.
“석목 용사님, 여기부터는 혼자 들어가야 합니다. 가시죠.”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별전 안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석목은 들어가면서 주위를 신속하게 둘러보았다.
그곳은 그리 크지 않은 방이었다. 네 개의 두꺼운 돌기둥이 천장을 받치고 있었으며, 기둥에는 횃불이 걸려 있었다. 횃불의 흔들리는 불빛 때문에 실내에서는 약간 몽롱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방안의 구조는 매우 단조로웠다. 중앙에 두 줄로 놓여 있는 의자를 제외하고는 어떤 장식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노쇠한 대제사장 필력격은 눈을 감은 채 상석에 기대고 앉아 있었다.
“들어와 앉으시게. 불편해할 필요 없네.”
석목의 발걸음 소리를 들었는지 필력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석목은 놀라서 급하게 다가갔다. 그리고 공손하게 예를 표한 후 대제사장의 왼쪽 의자에 앉았다.
필력격이 천천히 눈을 뜨며 느릿한 말투로 물었다.
“오늘 부른 것은 그대의 몸에 걸려 있는 시혼주(尸魂咒)에 관한 일 때문이네. 분명 토템비술을 익혀서 수혼을 봉인하려 한 것이겠지?”
“맞습니다. 바로 그러려고 했습니다.”
석목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필력격이 살짝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평범한 방법으로 수혼을 봉인하려 한다면 시혼주는 풀리지 않을뿐더러, 되레 더 큰 위험에 처할 수도 있네.”
석목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를 정도로 놀라서 물었다.
“대제사장님의 그 말씀은 무슨 뜻이지요?”
석목은 순간 열사부족의 제사장 이혁이 토템비술에 무슨 수를 쓴 것인지 의심했다.
그러나 뼛조각을 받고 확인해봤을 때, 그것에 기록된 토템문양은 열사부족의 야만족 몸에 새겨진 것과 전혀 다를 게 없었다. 게다가 이론 역시 등아부족에게서 얻은 토템비술에 적힌 것과 동일했다.
그러자 필력격은 석목의 마음을 전부 꿰뚫어보는 것처럼 말했다.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의심할 필요는 없네. 내가 천천히 설명해주겠네.”
흠칫 놀란 석목은 앞으로 몸을 살짝 숙여 대제사장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리고 이어진 필력격의 설명을 들은 그는 그제야 야만족 토템비술에 대해 완전히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야만족이 토템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먼저 제사장이 몸에 토템을 새긴 후 수혼의 봉인을 시도하는 절차를 거친다. 일단 봉인에 성공하면 바로 토템용사가 되며, 수혼을 단련해 그 힘을 키워나가면서 경지를 높일 수 있다.
즉, 야만족 토템용사 사이에서 경지의 높고 낮음은 봉인된 수혼의 힘과 관련이 있는 것이다. 보통 등급의 수혼은 일반적으로 후천 대원만의 경지까지 올라갈 수 있으며, 등급이 높은 일부 수혼은 선천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다.
대다수의 후천 토템용사는 수혼이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르면 자신의 영혼과 봉인된 수혼을 토대로 새로운 선천초기 수혼의 봉인을 시도하며, 이로써 선천의 경지에 진입하게 된다.
처음에는 일반적으로 후천초기 수혼의 봉인을 시도하는데, 그 성공률은 일 할에도 미치지 못한다. 수혼의 경지가 높을수록 봉인의 성공 확률은 더욱 낮아지고, 수혼의 등급이 높을수록 봉인 시 수혼에게 저주가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
“…그대가 봉인하고자 하는 삼수흉망은 아홉 개의 머리를 가진 고대의 교룡 구수금교(九首金蛟)의 핏줄이라네. 등급이 매우 높을뿐더러 선천중기의 경지에 오른 수혼이지. 만약 수혼의 봉인에 성공한다면 단숨에 선천중기의 힘을 얻을 수 있겠지만,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네. 일반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봐야지.”
필력격이 무표정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에게 토템비술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으면서, 마치 번개를 맞은 것 같은 충격에 휩싸인 석목의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석목은 방금 전까지만 해도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얻었다는 기쁨에 차 있었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어느새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대가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수련하고자 하는 이유는 경지를 높이기 위함이 아니라 만겁시혼주를 풀기 위한 것이니, 사실 삼수흉망의 수혼을 완전히 봉인할 필요는 없다네. 그 대신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을 사용해서 삼수흉망의 수혼이 저주를 삼키게 하고 그 뒤 봉인을 제때 해제한다면, 비록 수혼은 낭비되겠지만 성공률은 훨씬 높아지지.”
석목이 좌절에 빠져 있는 사이에 필력격이 다시 설명했다.
그의 말에 석목은 다시 뛸 듯이 기뻐했다. 필력격은 야만족 토템비술의 최고 권위자였다. 그의 말이 틀릴 리가 없었다.
잠시 후, 다시 평소의 표정으로 돌아온 석목이 눈빛을 빛내며 물었다.
“대제사장님, 그런데 어째서 저에게 이런 것들을 가르쳐주시는 겁니까?”
그러나 그 뒤에 나온 필력격의 말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었다.
“그대는 우리 야만족의 목걸이를 하나 지니고 있지 않은가?”
석목은 깜짝 놀랐다. 그리고 곧 풍리가 자신에게 맡긴 목걸이를 떠올렸다.
바로 그 순간, 형용할 수 없는 무형의 힘이 갑자기 석목을 감쌌다.
놀란 석목이 고개를 들었으나, 노쇠한 대제사장은 아무 움직임도 취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그의 흐릿한 눈빛이 점점 밝아질 뿐이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볼 것만 같은 눈빛이 석목의 몸을 훑고 지나갔다. 석목은 마치 마음속의 모든 비밀을 들킨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잠시 뒤 석목이 입을 열었다.
“맞습니다.”
“그것을 꺼내서 나에게 보여주게나.”
대제사장의 말투는 평온했다. 그러나 거부할 수 없는 위엄이 가득 서려 있었다.
석목은 잠시 주저했으나, 원숭이를 닮은 기이한 괴수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 목걸이를 목에서 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