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집어삼키다
사흘 후, 누군가가 백마산 근처의 평지를 달리고 있었다.
그는 마치 무게라는 게 전혀 없는 듯, 지면을 밟을 때마다 몇 장씩이나 가볍게 이동했다.
그의 달리는 속도는 점점 빨라지면서, 지나간 곳에는 긴 잔상이 생겨났고 주위에는 기류가 용솟음쳤다.
그가 갑자기 바닥에 박힌 못처럼 꼿꼿하게 멈춰 섰다.
그는 바로 석목이었다.
토템의 힘을 사용해 변신한 석목의 몸에는 검은 비늘이 자라 있었으며, 눈빛은 매우 차가웠다.
“핫!”
그가 전방에 있는 집채 만 한 크기의 바위를 보며 주먹을 매섭게 내질렀다.
주먹에서 검은색 기운이 쏘아져 나가 거대한 바위 속으로 파고들어갔다.
쾅!
거대한 바위가 산산조각 나면서 돌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날렸다.
“토템의 사용법은 거의 다 익혔군. 떠날 때가 되었어.”
석목은 변신을 풀며 중얼거렸다.
그는 며칠간 이곳에 머무르며 줄곧 토템의 힘을 다루는 법을 연습했고, 이제는 대체로 익숙해졌다.
석목은 몸을 돌려 다시 백마산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백마산의 한 전당.
백옥장식이 바닥에 내던져지며 쿵 소리와 함께 가루가 됐다.
그곳에서는 열사부족의 제사장 이혁이 검푸른 얼굴로 방안을 이리저리 서성이고 있었다.
방 밖에는 열사부족의 야만족 몇 명이 고개를 숙이고 서 있었다. 그들은 이혁이 화가 난 모습을 보고 겁에 질려 감히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어째서 그놈이 아직 살아 있는 것이야!”
이혁 제사장이 갑자기 멈춰 서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가 석목에게 넘긴 열사부족의 토템비술은 정상적인 것이었다. 역대 열사부족 제사장의 개량을 거친 그 비술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사용했을 때 문제가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상당히 높은 성공률을 자랑했다.
그 이유는 한 번에 대량의 정기를 주입하는 봉인방법이었다. 다만 이 방법을 사용할 경우 봉인의 성공률은 높아지지만, 도중에 정기 주입을 멈출 수 있는 수단이 없었다.
설사 석목이 토템비술을 중도에 멈춰서 저주만 해제하는 방법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해도, 비술을 멈출 방법이 없는 이상 수혼에게 정신을 공격당해 미쳐서 죽었어야 했다.
“아무래도 그가 이 일에 개입한 것 같군!”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이혁 제사장이 이를 갈며 말했다.
전당 밖의 이들은 이혁의 발걸음 소리가 멈추자 천천히 고개를 들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여전히 누구도 안에 들어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있었다.
“여봐라.”
갑자기 안에서 이혁 제사장의 평온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중년의 야만족이 급하게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그는 이혁을 슬쩍 바라보고는 즉시 허리를 숙였다.
“제사장님, 분부하실 일이 있습니까?”
이혁은 담담한 표정으로 허공을 바라보며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중년의 야만족 역시 아무 소리를 내지 못하고 그저 허리를 숙인 채 서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중년의 야만족이 허리가 점점 아파오기 시작할 즈음, 그제야 이혁이 천천히 일어났다.
그는 품속에서 손바닥 크기의 옥패를 꺼냈다. 기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는 옥패는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이혁은 아깝다는 듯 옥패를 만지작거리다가 중년의 야만족에게 건넸다.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 물건을 찰고님에게 건네며 말을 전하거라….”
잠시 후, 전당을 나온 중년의 야만족은 먼 곳으로 걸어갔고, 이혁은 전당 밖의 하늘을 보며 얼굴에 차가운 미소를 떠올렸다.
반나절 후, 한 푸른색 인영이 성설궁을 나오더니 먼 곳으로 질주했다. 그의 움직임은 매우 빨라서 유성처럼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 * *
사령계의 하늘은 변함없이 을씨년스러웠다.
음산한 바람이 불자 마치 귀신이 우는 것 같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죽은 자들의 세계지만 고요하지만은 않은 이곳에서는 언제나 전투가 벌어졌다.
거대한 산봉우리 아래에서 두 군단이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양측의 규모는 비슷했고, 수는 각각 백 명 정도였다.
멀지 않은 곳에는 백 평 남짓한 크기의 깊은 못이 있었는데, 하늘에 뜬 열한 개의 붉은 달빛을 수면에 반사하면서 핏빛 잔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못의 주위에는 이미 크기가 각기 다른 해골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그 수가 적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보아 전투가 벌어진지 상당히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군단 중 한쪽은 인간형 해골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우두머리는 뼈 갑옷을 입고 흰색 뼈칼을 쥔 몸이 가느다란 해골이었다.
심청색 영혼의 화염을 가진 그 해골은 바로 연나였다.
연나의 군단과 전투를 벌이는 쪽은 호랑이, 뱀, 전갈 등 괴수의 해골들이었다. 이들은 못 앞에서 방어선을 구축하고 연나의 군단을 막아내고 있었다.
가장 앞서 달려 나간 연나의 뼈칼이 한 번 반짝일 때마다 적이 하나씩 두 동강 났다. 상대는 연나의 공격을 단 일합도 버텨내지 못했다.
이전보다 역동적으로 변한 연나의 영혼의 화염은 더 이상 공허한 느낌이 없었다. 연나는 전방의 깊은 못을 고집스럽게 바라보고 있었다.
크앙!
몸길이가 일 장 가까이 되는 거대한 뼈 호랑이가 연나에게 사납게 달려들었다.
푸른색 영혼의 화염을 반짝이는 거대한 뼈 호랑이는 괴수 군단에서 지위가 꽤나 높아 보였다. 호랑이는 수하들이 연나에게 당하는 것을 보고 달려와 발을 휘둘렀다.
호랑이는 몸에 살이 전혀 남아 있지 않은 백골이었지만, 몸에서 뿜어내는 기세는 오히려 실제 맹호보다 더 강했다.
그러나 연나는 호랑이를 건성으로 쳐다보며 뼈칼을 휘둘러 다섯 개의 검영을 날렸다. 만약 석목이 이 자리에 있었다면, 연나의 검법이 자신의 풍치도법과 매우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 놀랐을 것이다.
뚜두둑!
뼈 호랑이의 앞발이 검광에 뒤덮이며 순식간에 토막 났다.
이어 연나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순간적으로 가속해 호랑이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연나가 도를 내려찍자 뼈 호랑이의 커다란 머리가 몸을 떠나 바닥에 떨어졌다. 호랑이의 거대한 몸은 잠시 휘청거리다 바닥에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이때 연나가 고개를 들어 입을 벌리자 눈에 보이지 않는 흡입력이 입에서 생겨났다.
연나는 주위의 몇 장 이내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에게서 일제히 날아올라 모여든, 영혼의 화염을 한 입에 삼켰다.
영혼의 화염이 더욱 밝아진 연나가 갑자기 몸에서 사나운 기운을 뿜어내자, 괴수 군단의 해골들이 연나를 보고 두려운 표정을 지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때까지 엇비슷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던 두 군단의 전투는 연나가 가세하는 순간 흐름이 한쪽으로 기울었다.
전방으로 달려가는 연나의 시선은 시종일관 못에 고정되어 있었다.
연나는 하늘에서 덮쳐오는 앙상한 뼈의 매를 벤 뒤 드디어 못 앞에 도착했다.
연나는 눈앞에서 붉게 빛나는 못을 보며 영혼의 화염을 빛냈다. 그러더니 전투는 뒷전으로 하고 못 안으로 뛰어들었다.
바로 그때, 붉은 못의 수면이 갑자기 솟구치더니, 크고 두꺼운 흰 무언가가 연나를 향해 채찍질하듯 날아왔다.
연나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허공에서 도를 휘둘렀고, 공격을 막아내며 반동으로 튕겨나가서 물가에 착지했다.
그러자 못의 수면이 더 높게 솟구치더니 물속에서 거대한 뼈 악어가 천천히 떠올랐다.
악어는 몸길이가 오 장 가까이 됐고, 높이는 연나와 비슷했다. 두껍고 큰 뼈는 언뜻 봐도 매우 단단해 보였다.
방금 연나를 공격한 악어의 꼬리는 길이가 이 장은 되어 보였으며, 좌우로 흔들리는 움직임이 매우 민첩해보였다.
악어는 연나의 것보다 더욱 짙푸른 영혼의 화염을 반짝이며 전신에서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악어가 몸을 드러내자 호랑이와 뱀 등 괴수 군단의 해골들이 악어를 향해 일제히 머리를 숙였다. 눈앞의 이 거대 악어는 군단의 우두머리인 것 같았다.
그러나 거대한 악어는 자신보다 수십 배 작은 눈앞의 해골을 바라보기만 할 볼 뿐 곧바로 공격하지 않았다,
지능이 그리 높지 않은 악어였지만, 눈앞의 해골이 겉보기만큼 약하지 않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는 듯했다.
갑자기 연나가 자신보다 훨씬 큰 악어를 보며 강력한 기운을 뿜어냈다.
악어와 연나의 기운이 충돌하며 허공에 불꽃이 튀었고, 그 충격에 휩쓸려 주위의 몇몇 약한 해골들이 날아갔다. 두 군단의 해골들은 그 자리를 피해 허둥지둥 달아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연나가 바닥을 박차고 악어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러자 악어는 큰 입을 벌려 칼날처럼 날카롭고 거대한 송곳니를 드러냈다. 그 이빨에 물린다면 살아남기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순간 연나의 몸이 잔상만 남기고 갑자기 사라졌고, 악어의 입은 허공을 물었다.
연나는 악어의 머리 위에서 귀신처럼 나타나더니 손에 쥔 뼈칼을 휘둘렀다. 그러자 검광이 반월을 그리며 악어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뚜…둑!
악어의 머리뼈 한쪽에 조금씩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균열은 빠른 속도로 확산되어 결국에는 머리뼈가 부서졌다.
분노가 극에 달한 악어는 엄청난 소리로 포효하며 영혼의 화염을 활활 불태웠다.
악어가 다시 한 번 꼬리를 채찍처럼 휘두르자 순식간에 꼬리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며 연나의 바로 앞까지 날아왔다.
연나는 뼈칼을 거꾸로 쥐고 칼끝으로 꼬리의 측면을 찔렀다. 꼬리에 칼을 꽂은 채 악어의 몸을 스치며 날아가던 연나는 허리를 살짝 숙이더니 위로 뛰어올랐다.
허공에 떠오른 연나가 두 손으로 뼈칼을 사납게 휘둘렀다. 그러자 아까보다 더욱 거대한 검광이 악어의 머리를 다시 한 번 내려찍었다.
빠각!
악어의 머리에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강력한 혼의 파동을 뿜어내는, 사람의 머리만한 짙푸른 영혼의 화염이 구멍 사이로 보였다.
연나는 허공에서 한 바퀴 돌아서 멀지 않은 곳에 안정적으로 착지했다. 그리고 악어의 거대한 영혼의 화염을 보며 탐욕스럽게 자신의 영혼의 화염을 번득였다.
악어는 두려움을 느꼈지만, 그보다 분노가 더 컸다. 악어는 몸을 비틀어 꼬리를 강하게 휘두르며, 동시에 고개를 내밀고 입을 벌려 연나를 물어뜯으려 했다.
그러나 연나는 덮쳐오는 거대한 꼬리와 주둥이를 보고도 피하거나 막으려 들지 않았다.
연나가 돌연 입을 벌리자, 그 순간 입가에 흡입력이 생기더니 멀리 떨어져 있는 악어의 영혼의 화염을 끌어당겼다.
악어의 두개골 사이로 드러나 있는, 사람 머리만한 짙푸른 영혼의 화염이 마치 강풍을 맞은 것처럼 격렬하게 흔들렸다.
그 순간, 악어의 몸이 굳었다.
연나는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고 악어의 머리에 생긴 구멍으로 뛰어 들어갔다.
악어는 몸을 크게 떨면서 큰 소리로 포효하더니, 바닥에 쓰러져 뒹굴면서 꼬리와 발을 미친 듯이 휘두르기 시작했다. 악어의 거대한 꼬리에 맞은 주위의 지면에 커다란 구덩이가 생겨났다.
땅에서 뒹굴던 악어는 그대로 못 안으로 굴러 들어갔다. 물보라가 사방으로 튀면서 악어의 모습은 곧 물속으로 자취를 감추었다.
우두머리를 동시에 잃은 두 군단은 순간 망연자실했지만, 곧 자신들의 역할을 떠올리고 다시 필사적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악어의 괴수 군단은 연나에 의해 이미 핵심 전력을 잃은 상태였고, 점차 열세에 몰렸다.
반 시진 후 악어의 군단은 결국 궤멸됐다. 대부분은 쓰러졌고 남아 있는 소수의 괴수 해골은 멀리 달아났다.
연나의 군단은 도망가는 이들을 쫓지 않고 못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로 그 순간, 못의 수면이 갑자기 용솟음치더니 거대한 악어가 솟아올랐다.
그러나 이미 영혼의 화염을 잃어버린 악어는 두 눈이 텅 비어 있는 상태였다.
못의 바닥에는 연나가 사람의 머리만한 짙푸른 영혼의 화염을 들고 서서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연나는 입을 벌려 악어의 영혼의 화염을 집어삼켰다.
그러자 두 배 가까이 커진 연나의 영혼의 화염은 마치 심장이 뛰듯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이어 연나의 영혼의 화염은 갑자기 수축하더니 연한 남색으로 변했다. 남색의 화염에서 강력한 힘이 솟아 나와서 연나의 전신 곳곳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순식간에 전신에 강력한 힘이 차오르자 연나는 참지 못하고 고개를 들었고, 소리 없이 사나운 기운을 뿜어냈다.
연나의 몸에서 발산된 강력한 혼력(魂力)의 파동이 사방으로 퍼져갔다.
그러자 못의 수면에 파도가 일더니 십 장이 넘는 거대한 소용돌이가 생겨났고, 근처에 있던 해골 군단이 하나둘씩 땅에 쓰러지기 시작했다. 영혼의 화염이 약한 몇몇 해골은 아예 가루가 되어 완전히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