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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122화 (122/916)

122화. 후송

연나가 다시 한 번 소리 없이 기운은 뿜어내고 나자, 혼력의 파동은 천천히 줄어들면서 안정되기 시작했다.

연나는 주위를 잠깐 둘러본 뒤 못의 바닥에 조용히 누웠다.

그 순간, 물속의 붉은 물질이 마치 이끌림을 받는 것처럼 몰려들어 연나의 전신 곳곳에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 속도는 이전보다 확연히 빨랐다.

* * *

시간이 조금씩 흘러 며칠이 지났다.

붉은 색이 확연히 연해진 못에서 연나가 물보라를 일으키며 뛰어나왔다. 연나는 공중에서 잠시 머무른 뒤 가볍게 물가에 착지했다.

연나의 영혼의 화염은 연한 남색 빛을 뿜어내고 있었으며 움직임은 이전보다 매끄러웠다.

전신의 뼈는 하얀 빛을 띠고 있었는데, 그중 오른쪽 팔과 두개골은 특히 깨끗해서 마치 새하얀 옥처럼 보였다.

뼈 갑옷은 하얀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뼈칼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고, 그 대신 섬뜩한 빛을 뿜는 날카로운 뼈창이 손에 들려 있었다.

연나가 뿜어내는 기운은 이전보다 몇 배 이상은 강해져 있었다.

못 주위에서 목적 없이 방황하던 백 구 가까이 되는 해골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연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땅에 엎드려 절을 하기 시작했다.

연나는 바닥에 엎드린 해골들을 하나씩 바라본 후 입을 벌렸고, 눈에 보이지 않는 영혼의 파동 소리를 냈다.

땅에 엎드렸던 해골들이 그 소리를 듣고 일제히 일어났다.

연나는 몸을 돌려 어느 한 곳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 방향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었다.

해골 군단은 그 모습을 보고 우르르 연나의 뒤를 쫓아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골 무리는 연나의 인솔에 따라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갔다.

* * *

석목은 청아부족 전당의 어느 방 안에 있었다.

그는 탁상 앞에 앉아 무언가 고민에 빠진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는 참이었다.

잠시 후 석목은 몸을 일으켜 황급히 방을 나섰다.

일 각 후, 다시 방으로 돌아온 그의 손에는 양피지가 한가득 들려 있었다.

온통 먼지로 뒤덮여 있는 이 양피지는 민도에게 빌려온 야만족 황무지의 대략적인 지도였다.

석목은 잠시도 지체하지 않고 곧장 거실로 들어갔다. 그는 넓은 자리를 찾아서 바닥에 지도를 펼쳤다.

여러 장의 양피지를 연결해 만든 지도는 일 장 가까이 되는 크기였다.

지도는 대부분 검은색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일부 지역은 파란색과 노란색, 빨간색의 세 가지 색으로 그려져 있었다.

파란색 선은 강을 나타내는 것이고 노란색 선은 산지를 뜻했다. 마지막으로 빨간색 선은 위험구역이라는 표시였다.

석목은 지도에서 성산의 위치를 재빨리 확인한 뒤 네 흉만부족이 있는 곳을 찾아보았다. 성산에서 인족의 영토로 향하는 거의 모든 길은 넓게 펼쳐진 검은 선으로 완전히 봉쇄되어 있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석목은 이번에는 네 평만부족의 위치를 확인했다.

한참 후, 머릿속에서 새로운 경로를 그려낸 석목이 찌푸렸던 미간을 폈다.

그 경로는 황무지에 진입할 당시에 비하면 상당히 먼 거리를 돌아가야 하는 길이었다. 그러나 대부분 네 평만부족의 세력 범위 안에 포함되어 있어서 훨씬 안전했다.

석목은 눈을 감고 새로운 경로를 다시 떠올려보았다. 그리고 마음을 결정한 뒤 지도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일 각 후, 청아부족 전당의 어느 별전.

염아 제사장이 미소를 띤 채 상석에 앉아 있었고, 석목은 공손한 자세로 말석에 앉아 있었다.

“석 용사가 우리 야만족의 토템비술을 이토록 쉽게 깨우칠 줄 몰랐네. 이렇게 짧은 시간 내에 배우고 저주까지 한 번에 해제하다니, 정말 하늘이 내린 재능일세.”

염아 제사장이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석목은 씁쓸하게 웃으며 염아 제사장을 향해 감사를 표했다.

“과찬입니다. 저는 그저 대제사장님의 가르침에 따라 요행으로 저주를 해제했을 뿐입니다. 수련을 위해 지원해주신 염아 제사장님께 감사드립니다.”

염아 제사장이 손을 저으며 화제를 돌렸다.

“나 역시 부탁을 받은 것이니 예의 차릴 필요 없네. 나를 찾아온 것을 보니 곧 성지를 떠나려는 생각이겠지?”

“맞습니다. 이번에 찾아온 것은 감사인사와 함께 작별인사를 드리기 위함입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잠시 고민하던 염아 제사장이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내가 아는 열사부족의 이혁 제사장이라면 아마….”

“염아 제사장님의 충고에 감사드립니다. 그에 대해서는 더욱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나 자신이 계획한 경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좋네. 그렇다면 나도 더 이상 말하지 않겠네.”

염아 제사장이 말했다. 그는 잠시 생각하다가 품속에서 파란색 뼈로 만든 영패를 석목에게 건넸다.

“이것은 청아부족의 통행영패라네. 만약 돌아가는 길에 우리 네 평만부족의 세력 범위를 지나게 된다면, 이 영패를 내보이면 통과할 수 있을 걸세.”

“감사합니다, 염아 제사장님.”

석목은 몸을 일으켜 한 손을 가슴에 가져다 대며, 야만족의 방식대로 예를 표하고 영패를 받았다.

이후 석목은 한동안 염아 제사장과 한담을 더 나누다가 작별을 고했다.

별전을 나온 석목은 자신의 거처로 돌아가지 않고 전당의 대문을 나섰다.

그리고 성지 근처의 시장을 방문해 가죽 부적지를 구입했다. 그것이 일반 부적지에 비해 효과가 상당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한 시진 후, 청아부족의 전당으로 향하는 산길에 다시 나타난 석목은 등 뒤에 소가죽 배낭을 메고 있었다.

그때 뒤쪽의 멀지 않은 곳에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발걸음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우며 길가 쪽으로 붙었다.

뒤에서 나타난 것은 열 명이 넘는 오각부족의 기병대였다. 석목의 옆을 지나가던 그들은 인솔자의 갑작스러운 손짓에 따라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말을 돌려 석목에게 다가온 야만족 인솔자가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는 석목을 위아래로 유심히 바라보며 물었다.

“오각부족의 도통(都统) 오격이(乌格尔)라고 합니다. 귀하가 인족의 사자 석목 용사님인가요?”

“맞습니다. 무슨 일이지요?”

석목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오격이(乌格尔)라고 자신을 소개한 야만족은 호탕하게 보이는 삼십대의 사내였다.

그는 눈썹이 짙고 입이 컸으며, 등 뒤에는 핏빛 도끼를 메고 있었다.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을 봤을 때 선천초기의 토템용사로 보였다.

“하하, 부대를 인솔해 부족으로 복귀하던 중에, 염아 제사장으로부터 돌아가는 길에 석목 용사를 호송해달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그래서 청아전으로 용사님을 찾으러 가던 중이었는데 여기서 마주칠 줄 몰랐군요.”

오격이가 시원하게 웃으며 용건을 이야기했다.

그의 말을 들은 석목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렇다면 감사하지요. 돌아가서 제 물건을 챙겨서 나오도록 하겠습니다.”

석목이 계획한 경로로 가려면 오각부족을 거쳐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군대가 호송해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었다.

“좋습니다. 그럼 저희는 먼저 내려가 있을 테니 반 시진 후 산 아래에서 만나도록 하죠.”

오격이가 시원스럽게 말했다.

“좋습니다.”

석목이 웃으며 대답했다.

그러자 오격이는 즉시 말을 돌려 산 아래로 내려갔고, 기병들이 그의 뒤를 쫓았다.

석목은 오격이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서둘러 청아전으로 향했다.

석목이 청아전에서 나왔을 때 그의 등에는 불룩한 소가죽 배낭 한 개가 더해져 있었다. 배낭 안에는 이전에 사냥했던 삼수흉망의 가죽이 들어 있었다.

석목은 시종이 끌고 온 사불상에 올라타고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반 시진 후, 석목은 백마산 아래 군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쉬고 있는 오격이의 일행을 발견했다.

석목은 그제야 오격이가 이끌고 있는 기마병 전부가 토템용사라는 사실을 눈치 챘다. 선천초기의 오격이 외에도 그의 뒤에는 상당히 강한 토템용사 세 명이 있었다.

그중 한 명은 후천 대원만의 토템용사였고 나머지 두 명은 후천후기의 토템용사였다.

오격이가 석목이 타고 있는 사불상을 보고 재촉하듯 말했다.

“서둘러 이동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기 전에 홍조갈(红潮蝎)이 서식하는 구역을 지나지 못한다면 꼼짝없이 하루를 더 머물러야 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출발하지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각부족으로 가기 위해서는 나라부족과 청아부족을 차례로 지나가야 했다.

석목은 지도에서 본 내용을 어렴풋이 떠올렸다. 성산에서 나라부족으로 가는 길에 붉은색 선으로 표시된 위험구역이 있었다. 홍조갈의 세력 범위로 추측되는 곳이었다.

오격이는 즉시 말을 돌려 질주하기 시작했다. 석목과 야만족 기병들도 급하게 그의 뒤를 쫓았다.

* * *

닷새 후, 황무지의 어느 곳.

깊은 밤이 되었는데도 석목은 무언가 생각에 잠긴 듯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누워서 천막의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닷새 동안 오격이 일행은 그를 무척이나 성심성의껏 대해주었다.

매일 밤 숙영을 할 때마다 술과 고기를 대접했고, 여정 중 황무지의 명소와 각 부족에 대한 역사를 상세하게 설명해주었다. 석목이 묻는 말에도 전부 숨김없이 대답해줬기 때문에, 그는 견문을 상당히 넓힐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이동속도는 때로는 빠르고 때로는 느렸다. 게다가 정해진 경로에서 자주 벗어났다.

석목은 오격이에게 그 이유를 몇 번이나 물었다. 그때마다 그는 독충이 있다느니, 아니면 수원이 말라붙어서 경로를 변경하지 않으면 물이 부족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느니 하는 변명을 했다.

하나같이 석목으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는 이유들이었다.

이미 황무지의 지도를 한 번 본 적이 있는 석목은 오격이가 무슨 이유로 먼 길을 돌아가고 있으며, 고의적으로 시간을 끌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여기까지 생각한 석목은 조용히 장막을 열고 먼 곳을 바라보았다.

몇 개의 장막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는 오격이의 천막에는 아직 불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 안에서 네 사람이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석목의 천막은 가장 중간에 위치해서 오각부족의 천막에 겹겹이 둘러싸여 있었다. 오격이는 이에 대해 석목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야만족에게는 술을 즐기는 풍습이 있었고, 오격이와 그의 세 수하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들 네 명은 매일 밤 술을 들이켰다.

그 순간, 석목의 가슴에 새겨진 토템이 검게 빛나더니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전신의 경맥으로 흘러들어왔다. 이어 격렬한 고통이 느껴지면서 검은색 비늘이 그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신체가 괴수화되면서 석목의 오감이 순식간에 예민해졌다. 그의 귀에 오격이와 세 토템용사의 대화 내용이 또렷하게 들려왔다.

그러나 네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는 주제는 주로 오각부족의 내부 사정과 관련된 것이었고, 그다지 특별한 내용이 없었다.

괴수화 상태를 오래 유지할 수 없는 석목은 그들의 이야기를 잠시 듣다가 변신을 풀 수밖에 없었다.

석목은 이런 방식으로 사흘 동안 매일 밤 야만족들의 동태를 살폈지만, 이상한 낌새는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그동안 일행은 나라부족의 핵심 구역을 지나 청아부족의 세력 범위에 근접한 곳까지 이동했다.

오격이 일행은 날이 갈수록 더욱 극진하게 석목을 대했다. 그래서 석목은 오히려 좋지 않은 예감을 느꼈다.

그들이 성산을 떠난 지 아흐레 째 되는 날의 저녁이 되었다.

모래와 자갈이 널려 있는, 인적이 전혀 없는 황무지에 여덟 개의 천막이 원형으로 펼쳐져 있었다.

천막이 둘러싸고 있는 공터에는 커다란 모닥불이 활활 타오르고 있었다.

이날 오격이는 야만족의 명절이라는 이유로 석목에게 모닥불 연회를 함께 하자고 요청했다. 일행은 모두 많은 양의 술을 마셨고, 동이 틀 무렵이 되어서야 흩어졌다.

주위에서 코고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하자, 천막 안에 누워 있던 석목은 두 눈을 번쩍 뜨고 몸을 일으켰다.

그 역시 꽤 많은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멀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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