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3화. 선수를 치다
석목은 조용히 천막을 열고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어느 천막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다시 토템의 힘을 발동시켰다.
잠시 후 석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석목이 위치한 곳에서 멀지 않은 천막에서는 오격이가 다른 세 토템용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석목이 오리를 무찔렀다고는 하나 기껏해야 후천후기에 불과한데, 이혁 제사장은 어째서 찰고 어르신에게 직접 나서달라고 요청했을까요?”
체구가 우람한 야만족이 말했다.
그는 술을 많이 마신 탓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드러난 가슴에 검은 코뿔소 모양의 토템이 새겨져 있는 그는 후천 대원만의 토템용사였다.
“탁도, 그를 너무 얕보는구나. 나는 그가 오리를 쓰러뜨릴 때 현장에 있었다. 그의 마지막 일격에는 최소 팔천 근의 힘이 실려 있었다. 나라고 해도 정면으로 받아내기 어려웠을 것이다.”
“뭐라고요?!”
오격이가 신중한 말투로 작게 이야기하자, 탁도와 두 후천후기의 토템용사가 놀라서 숨을 들이켰다.
그러자 오격이가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이 일에 깊이 관여할 필요는 없어. 그저 그를 이첨호(伊尖湖)까지만 유인하고 나면 엄청난 보상이 있을 것이야.”
후천후기의 토템용사도 음흉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하하, 그 녀석은 오늘밤이 살아 있는 마지막 날인 줄도 전혀 모르고 쿨쿨 잘도 자는군요.”
오격이는 손을 뻗어 세 명의 부하를 진정시키며 조용히 하라는 몸짓을 했다.
“모두 소리를 낮추어라. 아직은 방심해서는 안 된다. 내일 이첨호에 도착한 다음에 다시….”
바로 그때였다.
쫘악!
오격이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갑자기 그의 등 뒤쪽의 천막이 갈라지더니 검은 장도가 덮쳐왔다.
놀란 오격이는 오른쪽에 있는 후천후기의 용사를 잡아당기며 자신은 재빠르게 앞으로 몸을 날렸다. 이어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니 머리 위에 구부러진 검은 뿔이 자라났다.
오격이에게 끌려간 토템용사는 졸지에 그의 등 뒤를 막게 되었다. 그 토템용사가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검은 장도가 그를 향해 날아들었다.
“으악!”
진기가 주입된 운철흑도가 토템용사를 위에서 아래로 두 동강을 냈다. 선혈과 내장이 허공에 흩뿌려졌다.
다음 순간, 석목이 찢긴 천막 사이를 뚫고 들어왔다.
그의 운철흑도에는 화염이 일 척 가까이 타오르고 있었으며, 옷 밖으로 드러난 두 팔과 목은 검은 비늘로 덮여 있었다.
“석목!”
오격이는 석목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다른 토템용사들도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리고 그의 몸에서 뿜어 나오는 기운이 자신보다 훨씬 강하다는 것을 깨닫고 한 번 더 놀랐다.
오격이는 흉악한 표정을 지으며 석목을 향해 손에 든 핏빛 도끼를 거세게 휘둘렀다.
빛이 일 장 가까이 솟아오른 도끼가 날카로운 소리를 내면서 석목의 머리를 겨냥하고 날아들었다.
탁도와 다른 토템용사의 토템문신도 빛나더니 두 팔이 두꺼워지고, 오격이와 마찬가지로 머리 위에 구부러진 뿔이 돋아났다.
두 사람은 각각 옆에 놓여 있던 철추와 낭아봉을 쥐고 석목을 향해 흉흉한 기세로 덤벼들었다.
순간 석목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그는 더욱 거세게 타오르는 운철흑도를 휘둘러 핏빛 도끼를 받아쳤다.
쾅!
운철흑도와 도끼가 맞부딪히며 화염이 크게 솟구쳤다가 바로 흩어졌다.
거대한 힘에 밀려서 일고여덟 보를 물러난 오격이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 사이에 석목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빠른 움직임으로 탁도를 향해 돌진했다.
캉! 캉! 캉!
금속이 충돌하는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탁도의 철추가 석목의 몸을 연달아 내려찍자 찢어진 옷가지가 날리며 갑옷 같은 검은 비늘이 드러났다.
그러나 비늘은 작은 흠집이 생긴 것을 제외하고는 전혀 손상을 입지 않았고, 그 모습을 본 탁도는 경악했다.
그때 석목이 잔상을 남기며 그의 몸을 스쳐지나갔고, 탁도는 순간 가슴이 차가워지는 것을 느꼈다.
탁도는 고개를 숙여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보았다. 가슴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구멍이 생겨 있었다. 차가운 기운에 감싸인 상처에서는 피가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그리고 석목의 왼손에는 아직도 두근두근 뛰고 있는 탁도의 심장이 쥐어져 있었다.
그때 석목의 뒤에서 파공성이 들려왔다.
다른 후천후기의 토템용사가 석목의 머리를 노리고 낭아봉을 매섭게 내려찍는 소리였다.
석목은 들고 있던 심장을 탁도의 발치에 던져버리고, 낭아봉을 든 토템용사를 향해 달려들며 왼손을 독사처럼 뻗었다.
그리고 날아오는 낭아봉을 왼손으로 꽉 잡으며 운철흑도를 든 오른손을 휘둘렀다. 한층 커진 화염에 휩싸인 운철흑도는 토템용사를 단칼에 베었다.
상대는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화염도에 두 동강이 났다.
한편 탁도는 자신의 발치에서 아직까지도 뛰고 있는 심장을 멍청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허리를 굽혀 자신의 심장을 주우려 했다. 그러나 비틀거리며 쿵 소리와 함께 바닥에 쓰러졌고, 경련을 일으키다가 금세 조용해졌다.
석목이 나타난 후 세 명의 후천후기 토템용사를 살해하기까지 걸린 시간은 단 몇 초에 불과했다.
그제야 겨우 몸을 바로잡은 오격이는 분노에 가득 찬 표정을 지었다.
석목은 움직임을 잠시도 멈추지 않고 강한 바람을 일으키며 오격이에게 뛰어들었다.
“나를 너무 얕보는구나!”
오격이가 고함을 지르며 핏빛 도끼를 허공에 연달아 휘둘렀다. 초승달 모양의 핏빛 강기가 석목을 향해 몰아쳤다.
그러자 허공에 떠 있던 석목이 두 손으로 도를 휘둘렀다. 도신의 부문에서 화염이 피어오르더니 붉은 검광 열세 개가 그의 몸을 감싸며 보호했다.
콰르릉!
소용돌이치는 화염과 충돌한 핏빛 강기가 전부 폭발하면서 사라졌다.
오격이가 놀란 표정을 짓는 찰나, 이미 그의 지척까지 다가간 석목이 손에 든 화염도를 휘둘렀다.
공격을 피할 수 없다고 판단한 오격이는 손에 쥔 핏빛 도끼로 가슴 앞을 막았다.
깡!
상상을 초월하는 거대한 힘이 오격이에게 밀어닥치면서, 그의 팔이 마비되고 전신의 기혈이 들끓어 올랐다. 들고 있던 핏빛 도끼는 그의 손을 떠나 멀리 날아갔다.
오격이가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백옥처럼 하얀 석목의 주먹이 오격이의 가슴을 향해 뻗어나갔다.
오격이는 포효하며 머리를 숙였고, 굽은 뿔로 석목의 공격을 받아쳤다.
쿵!
주먹과 뿔이 부딪히면서 두 사람 모두 튕겨나갔다.
바로 그 순간, 석목이 다시 한 번 뻗은 주먹에서 갑자기 검은 빛이 반짝이였다. 주먹만 한 크기의 권강이 소리 없이 날아가 오격이의 가슴을 가격했다.
뼈가 산산이 부서지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움푹 파인 오격이의 가슴으로부터 검은 기운이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그의 몸이 몹시 추운 곳에 있는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더니, 잠시 후 온 몸이 뻣뻣해졌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운철흑도를 횡으로 그었다.
퍽!
운철흑도는 이미 반응하는 속도가 느려져서 방어조차 하지 못한 오격이의 허리를 반으로 갈랐다. 핏물이 사방으로 휘날리고 내장이 쏟아지면서 피비린내가 일었다.
그때 오각부족의 다른 토템용사들이 깨어나서 천막으로 몰려왔다.
토템용사들이 깜짝 놀라고 있는 사이에, 석목이 마치 귀신처럼 그들 중 한 명의 앞에 나타났다. 그가 운철흑도를 휘두르자 토템용사의 몸은 검과 함께 두 동강이 났다.
석목의 몸이 다시 한 번 반짝이더니 또 다른 토템용사의 뒤에서 나타났다. 이번에는 상대의 몸이 허공에서 얼어붙기 시작했고, 곧 바닥에 떨어지며 산산이 조각났다.
잠시 후 석목은 모닥불 옆에 서서 가슴팍을 들썩였다.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이 일렁이며 그의 강인한 얼굴을 비추었다.
석목의 주위에는 열 명이 넘는 오각부족의 야만족이 목숨을 잃고 쓰러져 있었다. 구역질나는 피비린내가 공기 중에 진동했다.
석목은 표정이 어두워지며 작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오격이가 자신을 배신하려 했던 사실을 오각부족의 모든 토템용사들이 알았을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그러나 석목이 삼수흉망을 봉인했다는 사실은 현재 그가 가진 가장 큰 비밀 중 하나였다. 만약 그 사실이 새어나간다면 상당한 풍파가 일어날 수 있었다.
게다가 지계의 강자인 찰고라는 자가 분명 석목의 흔적을 쫓아올 터인데, 누군가 그의 행방과 상황을 누설하기라도 한다면 처지가 상당히 위험해질 것이 분명했다.
석목은 잠시 휴식을 취한 후, 재빨리 야만족의 시체를 뒤져서 소지하기 편한 금과 부적을 챙겼다. 그 외에도 오격이의 시체에서 수혼 주머니를 찾았다.
물건들을 몽땅 소가죽 주머니에 넣은 석목은 눈앞의 모닥불을 잠시 바라보다가 숙영지 밖으로 질주했다.
잠시 후, 석목은 높이가 일 장 가까이 되는 사각형 바위를 짊어지고 돌아왔다.
쿵!
그는 바위를 모닥불 옆 바닥에 꽂아 넣었다. 비석처럼 선 바위는 지면 아래 몇 척 깊이까지 박혔다.
석목은 운철흑도를 뽑아들고 손목을 흔들어서 바위에 글자를 새기기 시작했다.
잠시 후, 자유분방하면서도 위엄이 넘치는 글자들이 바위에 새겨졌다.
“저 석 아무개가 흑마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운철흑도를 어깨에 메고 눈앞의 바위를 위아래로 유심히 바라보던 석목이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오각부족과 열사부족이 결탁하여 그의 목숨을 빼앗으려 했다. 그 사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는 쪽은 그들이었다.
이어서 석목은 숙영지 밖에서 사불상을 찾았다. 그리고 너덜너덜해진 옷의 아랫부분을 찢어 바위를 사불상의 몸에 매달았다.
석목은 사불상의 목을 살짝 껴안고 쓰다듬었다. 그러자 사불상은 마치 무언가를 깨달은 듯 울음소리를 냈다. 그리고 털이 무성한 머리를 석목에게 비비며 아쉬움을 표했다.
석목은 야만족 황무지에 들어선 후 줄곧 이 사불상과 함께 해왔기 때문에 정이 많이 든 상태였다.
그러나 사불상은 결국 야만족 황무지 태생이었다. 그와 함께 인족의 영토로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석목은 자신이 미리 찾아놓은 경로의 반대 방향을 향해 사불상의 엉덩이를 강하게 때렸다.
“깨갱!”
사불상이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화살처럼 빠르게 질주했다. 사불상은 순식간에 멀지 않은 낮은 언덕 위에 올라서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은 사불상을 향해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러자 사불상은 고개를 들어 울부짖은 뒤 몸을 움직여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이어서 석목은 오각부족의 말을 한 마리만 빼고 전부 끌고 왔다. 그리고 끌고 온 말들의 몸에 자신의 기운이 배어 있는 옷가지를 이용해 바위를 묶은 뒤, 사불상처럼 사방팔방으로 보냈다.
모든 작업을 마친 석목은 배낭을 메고 남은 말 한 마리에 올라탔고, 지도에서 찾아놓은 방향을 따라 신속하게 이동했다.
다음 날, 한 중년의 야만족이 오각부족 숙영지의 모닥불 옆에 나타났다.
이마가 벗겨지고 뒷머리를 땋은 중년 야만족은 두 눈에 불을 켜고 눈앞의 바위에 적힌 글자를 보는 중이었다. 그의 오른손에는 푸른색 채찍이 감겨 있었다.
야만족이 든 채찍의 푸른빛이 점점 밝아졌다. 이어 그가 손을 흔들자 채찍은 마치 뱀처럼 바위를 노리고 날아갔다.
그러나 바위에 부딪히기 직전,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채찍을 다시 회수에서 팔에 감았다.
다시 냉정을 되찾은 중년의 야만족은 생각에 잠겼다.
오각부족의 기병대는 전부 살해당했으며, 선천초기의 토템용사인 오격이 역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살해한 수단과 심법을 보면 이전에 들은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갑자기 야만족의 가슴에서 푸른빛이 반짝였다. 그의 전신이 순식간에 푸른색 비늘로 뒤덮이면서 두 눈이 붉어졌다.
중년의 야만족은 정신을 집중해서 주위의 지면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냄새를 맡으려는 듯 방향을 바꿔가며 코를 벌름거렸다.
한참 후, 중년의 야만족이 화를 내기는커녕 크게 웃으며 중얼거렸다.
“하하, 재미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