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파괴
사유지 안에 들어서자 그 안에 위치한 넓은 정원에서 많은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제일 앞에 서 있는 사람은 오십 대로 보이는 노인이었다.
그는 키는 크지 않았지만 몸에서 느껴지는 기운이 매우 거대했다. 주위 사람들이 오히려 그보다 작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후천 대원만의 고수였다.
노인의 옆에는 얼굴이 하얀 중년의 남자가 서 있었다. 뿜어내는 기운으로 보아 후천후기의 경지에 오른 것 같았다.
이들 두 사람은 바로 풍성 오 씨 가문의 가주인 오량과 그의 형제 오풍이었다.
정원에 모여 있는 사람들 중에는 오 씨 가문의 사람이 몇 명 더 있었고, 나머지는 검은 옷을 입은 금룡방의 사람이었다. 그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이는 덩치가 아주 크고 방울처럼 큰 눈을 가진 후천중기의 무인이었다.
“금 씨 가문이 먼저 찾아온 줄 알았더니 오 씨 가문이었군.”
석목은 정원의 입구에 서서 그들을 훑어보더니 흥미 없다는 듯 하품을 하며 말했다.
“흥! 석목, 우리 오 씨 가문의 오동과 오화를 살해한 너는 천만 번 죽어 마땅하다! 오늘 네놈을 죽여 그들의 원한을 갚겠다!”
하얀 얼굴의 오풍이 원한에 사무친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오 씨 가문의 수하들이 정원의 출구를 막았다. 이어 금룡방 사람들이 석목을 천천히 에워싸기 시작했다.
“먼저 손을 쓴 것은 너희 오 씨 가문이었지. 나는 그저 내 몸을 보호하려던 것뿐이고.”
석목이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오풍이 눈을 흉흉하게 번뜩였다. 그리고 석목을 향해 섬뜩하게 반짝이는 연검을 휘두르려 했다. 그는 눈이 새빨개져서 원수인 석목을 갈기갈기 찢어버릴 생각밖에 하지 않았다.
그때 오 씨 가문의 가주인 오량이 오풍의 어깨를 잡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다려라.”
오풍은 오량을 매우 믿고 따랐기 때문에, 비록 달갑지는 않았지만 그의 말을 듣고 움직임을 멈추었다.
오량이 석목을 바라보며 말했다.
“후천후기의 경지에 올랐다니, 불과 몇 년 사이에 네놈이 이만큼 강해질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구나.”
“뭐라고?!”
오량의 말에 옆에 있던 오풍을 비롯해 금룡방의 모두가 크게 놀랐다.
석목은 자신의 기운을 숨기지 않고 있었고, 그 때문에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오량이 자연스럽게 그의 경지를 감지해낸 것이다.
석목은 차갑게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량은 몸에서 점차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며 석목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의 옷은 바람 한 점 없는데도 펄럭였으며, 그가 밟고 지나간 바닥에는 깊은 발자국이 남았다.
오량이 또박또박 말했다.
“석 달 뒤가 오동과 오화의 기일이다. 네놈이 얼굴을 드러내지 않으면 사람을 보내 어촌을 전부 쓸어버리는 것으로 그들을 기리려 했거늘. 네놈이 겁도 없이 돌아올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구나!”
오량의 말을 들은 석목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그 순간, 석목의 눈앞이 갑자기 하얗게 반짝이더니 십여 개의 검광이 종횡으로 교차하며 그의 머리를 노리고 날아왔다.
쇠뇌의 화살과 같이 빠르게 다가온 오량이 하얗게 반짝이는 도를 빠르게 휘두른 것이었다.
칼끝이 채 닿기도 전에 용솟음치는 위압감이 석목을 덮쳐왔다.
그러나 석목은 코웃음을 치며 유성추를 든 왼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강풍을 동반한 검은 운석덩어리가 오량의 검광을 향해 날아갔다.
깡!
금속이 충돌하는 거대한 소리가 울리며 수많은 검영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오량이 들고 있던 도는 그 충격으로 부서졌다. 이어 엄청난 힘이 반절만 남은 도를 타고 그의 몸으로 전해지면서, 도를 쥔 오른팔의 뼈가 뚝 하고 끊어졌다.
오량의 몸은 석목에게 달려들 때보다 더 빠른 속도로 뒤로 날아가서 바닥에 처박혔다. 대량의 선혈을 뿜어낸 그의 안색이 누렇게 변했다.
현장에 있던 모든 이가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오량이 석목에게 한 초식 만에 쓰러진 것이다.
오풍은 오량과 함께 석목을 협공하려 했지만, 뛰쳐나가기도 전에 상황이 마무리되자 그 자리에 굳어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그때 석목이 몸을 돌려 바닥을 박차고 오풍을 향해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오풍의 눈앞에 도달한 그는 다섯 개의 손가락을 전부 펼치더니 오풍의 안면을 향해 뻗었다.
오풍은 크게 놀랐으나, 그 역시 가만히 앉아서 당할 만큼 약하지는 않았다. 오풍은 즉시 반응하여 몸을 뒤로 빼는 동시에 들고 있던 연검을 휘둘렀다.
꼿꼿하게 변한 연검이 석목의 손바닥을 향해 거세게 날아갔다.
석목은 차갑게 웃으며 맨손으로 검신을 잡았다. 그의 손바닥에는 어느새 검은 비늘이 돋아 있었다.
그의의 손에 잡힌 연검은 오풍이 아무리 힘을 주어도 꼼짝도 하지 않았다. 마치 바위에 박힌 것 같았다.
석목이 코웃음을 치며 손을 당기자 연검이 오풍의 손아귀에서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석목은 연검을 뺏은 채 그대로 앞으로 찔렀다. 연검의 손잡이가 오풍의 가슴을 강하게 가격했다.
뚜두둑!
오풍의 가슴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입에서 선혈을 뿜어내며 몇 장이나 날아가 바닥에 떨어진 그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것 같았다.
석목이 오량과 오풍을 날려버리고 중상을 입히기까지는 불과 몇 초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 광경을 지켜본 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정원은 바늘이 떨어지는 소리도 들릴 것처럼 고요해졌다.
금룡방의 우두머리는 얼굴이 잿빛이 되어 입을 벌렸다. 그러나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는 석목은 손을 흔들어 연검을 던져버렸다. 검은 비늘에 뒤덮였던 그의 손이 옥처럼 하얗고 가느다란 손으로 되돌아왔다.
이어 석목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보며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마치 몇 년 동안 오 씨 가문에게 쌓여 있었던 원한을 뱉어내는 것 같았다.
사실 석목은 처음에는 상대를 제압만 하려는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복수에 대한 의지를 꺾어버리려 했다. 그러나 오량의 말이 그를 격분시키고 살의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상한 일이 일어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석목이 목에 걸고 있는 목걸이에는 오풍이 뱉은 피가 튄 자국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피가 목걸이에 전부 흡수되더니 목걸이의 표면이 갑자기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콰르릉!
순간 목걸이에서 흘러나온 포악한 기운이 석목의 머릿속으로 침투해 들어갔다.
그의 머릿속에 갑자기 어떤 곳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곳은 끝없이 넓게 펼쳐진 땅이었다.
피에 붉게 물든 대지 위에는 시체와 해골이 겹겹이 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시체의 산 위에서 회색 원숭이가 하늘을 향해 포효하며 두 팔로 가슴을 두드리고 있었다.
“악!”
석목의 눈이 순식간에 붉은 핏빛으로 물들더니 몸에서 엄청난 살기가 뿜어 나왔다.
눈에 보일 정도로 강력한 그 살기는 핏빛 안개의 형상을 띠며 석목의 몸에서 피어올랐다. 마치 마신(魔神)이 현신한 듯한 모습이었다.
광폭하고 거친 기운이 사유지를 덮자 그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몸을 파르르 떨었다. 누군가 한 사람이 큰소리로 비명을 지른 것을 시작으로, 모두 허둥지둥 도망치기 시작했다.
석목은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그의 마음속에서는 강력한 살육의 충동이 솟아올랐으나, 일부 남아 있는 이성이 그것을 필사적으로 억제하고 있었다.
순간 목걸이가 마치 피가 흐르는 것처럼 괴이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분노에 찬 포효가 목걸이에서 어렴풋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강력하기 이를 데 없는 포악한 기운이 다시 한 번 석목의 의식 속으로 침투했다. 그러자 간신히 남아 있던 이성마저 완전히 사라져버렸다.
석목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이제 그의 두 눈은 이미 완전히 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흉악하게 일그러진 얼굴에는 살기가 가득했다.
석목은 크게 한 번 포효하더니 황급히 도망치는 사람들을 쏜살같이 덮쳤다. 그의 왼손이 휘두른 유성추가 도망가는 무리를 향해 거세게 날아갔다.
퍽! 퍽! 퍽!
검은 운철에 맞은 사람들의 몸이 터지며 뼈와 살이 가루가 됐다. 그들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선혈이 비처럼 쏟아지며 석목의 몸을 적셨다.
석목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깊은 호흡을 하며 무서운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새빨간 눈을 정원의 다른 사람들에게 돌리며 다시 몸을 날렸다.
훅! 훅!
유성추가 사방으로 날아가며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그것에 닿으면 사람이고 건물이고 할 것 없이 전부 갈기갈기 찢겼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이 울부짖었다. 몇몇은 무릎을 꿇고 목숨을 구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살육에 미쳐버린 석목은 손속에 전혀 사정을 두지 않았다.
퍽!
한 금룡방 사내가 유성추에 가격 당했다. 그의 머리가 터지면서 빨갛고 하얀 것이 한데 뒤섞여 사방으로 튀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는 한 오 씨 가문 사람이 석목의 오른손에 들린 운철흑도에 베였다. 그의 몸은 두 동강이 나며 바닥에 내장을 쏟았다.
한편 오량은 오른팔만 부러졌을 뿐이라 목숨에는 큰 지장이 없었다. 그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을 보며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오량은 고통을 참으며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생명이 위독한 오풍도 내버려두고 뒤돌아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겨우 두어 걸음밖에 내딛지 못했다.
퍽!
공기를 가르고 날아온 유성추가 오량의 등에 명중했다. 그의 몸은 거대한 힘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며 피를 흩뿌렸다.
석목이 쇠사슬을 흔들자 유성추는 마치 팔의 일부분인 것처럼 거꾸로 날아서 돌아왔다.
핏빛으로 물든 두 눈으로 오량의 처참한 시체를 한 번 본 석목은 다른 사람들에게 다시 시선을 돌렸다.
정원에는 선혈이 낭자하고 뜯겨진 팔다리가 날아다녔으며, 때때로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웅장하고 커다란 정원은 일 각이 채 지나기도 전에 완전히 파괴되어 평지로 변해버렸다.
바닥에는 사지가 온전하지 않은 시체가 족히 백 구는 넘게 쌓여 있었으며, 사방에서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가 풍겼다.
석목은 도처에 널린 시체들 사이에 서 있었다.
온통 땀과 피로 범벅이 된 그는 두 눈을 꽉 감고 표정을 살짝 일그러뜨린 채였다. 그러나 방금 전처럼 살육에 미쳐버린 얼굴은 아니었다.
석목은 가슴을 끊임없이 들썩이며 숨을 크게 몰아쉬었다.
그의 왼손에 쥐여 있는 유성추는 피투성이였으며 살 조각이 묻어 있었다. 오른손에 들린 운철흑도에서도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었다.
한참이 지나고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온 석목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의 눈은 아직까지 살짝 붉은 빛을 띠고 있었으나, 제정신을 회복한 만큼 이제는 그저 상당히 피곤해보일 뿐이었다.
석목은 고개를 숙이고 가슴의 목걸이를 바라보다가, 그것을 확 잡아당겨 멀리 던져버렸다.
그는 두려움이 미처 가시지 않은 눈빛으로 저 멀리 바닥에 떨어진 목걸이를 바라보았다. 의식을 제멋대로 장악하는 그 목걸이를 차마 다시 목에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러나 석목은 잠시 고민한 끝에 결국 목걸이를 다시 주워들었고, 찢어진 천으로 감싸서 품속에 넣었다.
이어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들 쪽으로 시선을 돌린 그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석목은 이미 많은 사람을 죽인 경험이 있었다. 그러나 오늘처럼 마구잡이로 학살을 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코를 찌르는 피비린내에 구역감을 느낀 석목은 몸을 돌려 사유지 밖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러나 겨우 몇 걸음 내딛은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미간을 찌푸렸다.
사유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가 건물을 뛰어넘으며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다가온 사람은 회색 옷을 입고 등에 장검을 둘러멘 십대 소년이었다. 그는 사유지에서 벌어진 광경을 보고 놀라서 석목을 바라보며 칼자루를 쥐었다.
소년을 본 석목이 입을 열었다.
“풍리….”
그 소년은 다름 아닌 풍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