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만남과 이별
잠시 멍하니 서 있던 풍리는 온통 피를 뒤집어쓴 채 눈앞에 있는 사람이 석목이라는 것을 깨닫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석 형!”
풍리가 칼자루에서 손을 떼며 말했다.
“풍 형, 오랜만이에요.”
석목이 풍리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했다.
풍리는 주위를 둘러보며 물었다.
“오랜만이네. 이곳에서 다시 만날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네. 그런데 이것은 설마… 석 형이 혼자 한 일인가?”
석목은 잠시 망설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엄청난 실력이네! 석 형은 한층 더 강해졌나 보군!”
풍리는 석목이 살육을 한 것은 전혀 개의치 않은 듯, 오히려 흥분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의 반응에 석목은 의아함을 느꼈다. 풍리의 말투와 표정이 이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참, 풍 형은 무슨 일로 이곳에 온 것이죠?”
석목이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곧 어머니의 기일이라 제사를 지내러 나온 김에 풍성에 왔네.”
풍리는 대답하면서 한 사내의 시체 곁으로 다가갔다.
가슴에 커다란 구멍이 나 있는 그 시체는 주위의 다른 시체에 비하면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바로 금룡방 방주의 시체였다.
풍리는 검을 뽑더니 그의 수급을 잘라 천으로 싸기 시작했다.
그의 행동에 의아해진 석목이 물었다.
“이 사람에게 원한이 있었나요?”
잠시 침묵하던 풍리는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과거 흑호회는 금룡방에게 멸망당했어. 고원은 바로 이 자의 손에 죽었지. 내가 이곳에 온 것은 금룡방을 뿌리 뽑아서 고원과 흑호회 형제의 원수를 갚기 위해서였다네. 그러나 이 자는 오 씨 가문의 배후에 숨어 있어서 도저히 기회를 잡을 수 없었지. 그런데 생각지도 못하게 석 형이 나를 대신해 일을 해결해준 것이네.”
풍리는 석목에게 허리를 숙여 감사를 표했다.
“토템저주는 해결한 것인가?”
풍리가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네,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저주를 풀었어요. 전부 풍 형 덕분이에요.”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자 풍리는 놀란 표정으로 손사래를 쳤다.
“아, 맞다.”
석목이 품속에서 천 조각에 싸인 물건을 꺼냈다.
“야만족과 인족이 동맹을 맺었으니, 이 물건은 더 이상 제가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원래 현무종에 찾아가려 했는데 만난 김에 지금 돌려줄게요.”
석목이 천 조각을 펼치지도 않은 채 풍리에게 건네며 말했다.
“인족과 야만족이 동맹을 맺었다는 소식이 사실이었나 보군….”
풍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목걸이를 받아들였다.
그의 표정이 어두워지는 것을 본 석목은 순간 무슨 말을 건네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풍리는 생기 없는 표정으로 목걸이를 목에 걸고 뒤돌아 자리를 떴다.
“현무종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석목은 터덜터덜 걸어가는 풍리를 보고 잠시 머뭇거리다가 물었다.
“돌아가지 않네.”
풍리는 발걸음을 잠시 멈추었으나, 고개는 돌리지 않은 채 담담한 말투로 말했다.
석목은 그의 평온한 목소리에 깊은 실망이 담겨 있다는 걸 눈치 챘다.
“내가 현무종에 들어간 것은 야만족에게 복수하기 위해서였네. 잔인무도한 야만족이 변경에서 인족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자네도 직접 목격하지 않았나. 연맹이 이리도 쉽게 야만족과 화해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네!”
풍리는 두 주먹을 불끈 쥐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현재 동해의 해족이 침략을 꾀하고 있어요. 인족에게는 야만족과 해족의 공격을 모두 막아낼 힘이 없으니,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것을 막으려면 연맹 입장에서도 어쩔 도리가 없었습니다.”
석목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야만족은 나의 불구대천의 원수라네. 어떤 이유에서든 연맹이 야만족과 동맹을 맺은 이상, 현무종은 더 이상 내가 있을 곳이 아니네.”
풍리가 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쩌실 계획이죠?”
석목이 물었다.
“계획이라…. 대륙의 중심으로 가려고 하네.”
풍리는 고개를 들고 격양된 표정으로 말했다.
“대륙의 중심!”
대제국과 염국, 황국은 광활한 국토를 가지고 있었고, 그 서쪽으로는 야만족의 황원이 넓게 펼쳐져 있었다. 그러나 이 모든 지역을 전부 합하더라도 고작 동주대륙(东洲大陆)의 동쪽 일부분에 불과했다.
끝없이 넓은 동주대륙의 면적은 이곳 동부 반도(半岛)의 백 배, 천 배는 됐다. 이곳이야말로 인족의 기원지이며, 반도의 7종문보다 열 배는 뛰어난 진정한 수련의 성지라고 할 수 있었다.
석목은 흑마문에 입문할 당시, 흑마문이 대륙 중앙의 천마종에서 갈라져 나온 가지일 뿐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났다.
“대륙의 중심으로 가는 길은 매우 위험하다고 알고 있어요. 선천무인이라 하더라도 성공을 장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석목이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맙네. 하지만 이미 나는 마음을 정했어. 겨우 그 정도 위험조차 극복하지 못하고 어찌 복수를 논하겠나?”
풍리가 확고한 말투로 말했다.
“야만족이 정말 그리도 밉습니까? 제가 야만족 황무지에 가서 겪어보니, 대부분의 평만부족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갈망했습니다. 전쟁은 그저 끝없는 살육만을 불러올 뿐이에요.”
석목이 풍리를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하하, 야만족에 대해서는 내가 더 잘 알고 있으니, 구태여 그런 말로 설득하려 할 필요 없네.”
풍리의 말에 석목은 더 이상 그를 설득하기를 포기했다. 그 대신 문득 떠오른 한가지를 물었다.
“그 목걸이는 도대체 뭐죠? 야만족의 대제사장 필력격이 그것을 굉장히 신경 쓰는 것 같았어요.”
그러자 풍리는 이를 악물더니 대제사장의 이름을 씹듯이 내뱉었다.
“필력격….”
석목은 풍리의 반응을 보고 곧 시선을 돌렸다.
정말로 대제사장과 관련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사실인 것 같았다.
풍리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내뱉은 후, 석목을 향해 몸을 돌렸다.
“야만족 대제사장을 만났다니, 야만족 황무지에서 자네의 여정이 평범하지는 않았나 보군.”
“인연이 잘 맞아떨어진 덕분이죠. 연맹이 동맹을 위해 야만족 측으로 보낸 사자단과 만나서 성설궁까지 동행했어요.”
석목은 풍리에게 용사의 문에서 벌어진 대결에서 평만 쪽이 승리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만 간단히 언급했다.
석목의 말을 들은 풍리는 잠시 침묵하다가 차갑게 웃었다.
“이전에 목걸이에 대해서 했던 말은 전부 사실이라네. 더 자세한 이야기는 개인적인 일과 관련되어 말하기가 곤란하네. 용서해주게나.”
그 말을 하는 풍리의 표정은 살짝 쓸쓸해보였다.
“그렇다면 더 이상 묻지 않겠습니다. 다만 그 목걸이에 매우 사악한 기운이 담겨 있으니 조심하길 바랄게요.”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풍리는 석목을 향해 인사하고 몸을 돌려 떠나갔다. 점점 멀어지는 그의 모습이 천천히 작은 점으로 변해갔다.
석목은 풍리가 떠나자 고개를 돌려 폐허가 된 사유지를 바라보았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사유지에서 나온 석목은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주위에 있는 건물 하나를 유심히 바라보다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이랴!”
마차의 바퀴소리가 멀어지자, 석목이 출발하기 전에 바라본 건물 뒤에서 두 사람이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두 사람은 스무 살도 채 되어 보이지 않았는데, 금룡방이나 오 씨 가문의 정탐원인 것 같았다. 그들의 안색은 공포로 인해 새하얗게 질려 있었으며, 몸은 끊임없이 떨리고 있었다.
* * *
반 시진 후, 석목은 유풍무관에서 여창해와 함께 나왔다.
그는 객잔에서 피를 씻어낸 뒤 새로운 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원래 어깨가 떡 벌어지고 외모가 준수한 덕분에, 깨끗한 비단옷을 갖춰 입자 더욱 멋이 났다.
여창해는 구레나룻이 약간 하얗게 세어 있었을 뿐, 몇 년 전과 모습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는 매우 감격한 듯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목이 말했다.
“여 사부님, 바래다주실 필요 없습니다. 그저 고원단(固原丹) 몇 개일 뿐인 걸요. 과거 가르침의 은혜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너에게는 별 것 아닐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귀중한 물건이다. 이 단약만 있다면 몇 년간 정체되어 있던 경지를 한 단계 끌어 올릴 수 있을지도 몰라.”
여창해가 감동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말했다.
스승과 잠시 대화를 나눈 석목은 그에게 작별을 고하고 유풍무관을 떠났다.
석목은 미소를 지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 정도 시간이 흘렀으니 그들의 귀에도 정확한 소식이 들어갔겠지.”
그가 고삐를 흔들자 마차가 빠르게 질주하기 시작했다.
* * *
금 씨 가문 저택에 있는 커다란 방에 가문의 주요 구성원들이 모여 있었다.
상석에는 화려한 금색 옷을 입은 정정한 노인이 앉아 있었다.
이 노인은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금 씨 가문의 전대 가주였다. 그는 올해 아흔 살이 된 노인이지만, 고령자 특유의 굼뜬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노인의 옆에는 현재의 가주가 불안한 듯 서 있었다.
흰 눈썹을 찌푸리며 무언가 생각에 잠겨 있던 전대 가주가 갑자기 일어나더니 방 안을 서성이기 시작했다.
“확실히 석목이 맞느냐?”
발걸음을 멈춘 노인은 방의 한가운데 서 있는 키가 작고 마른 청년을 바라보며 물었다.
“화…확실합니다. 모습이 조금 변하긴 했지만 석목이 분명했습니다.”
마른 청년이 급히 대답했다. 석목의 이름을 입에 올리는 순간 그의 얼굴에 두려운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의 대답에 장내의 모든 사람이 웅성웅성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 어디에 있지?”
“금룡방을 떠난 후 유풍무관을 향해 이동했습니다.”
노인의 물음에 마른 청년이 즉각 대답했다.
노인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옆에 있던 금 씨 가문의 현 가주가 앞으로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서며 말했다.
“석목은 풍성에 머물며 유풍무관의 여창해에게 무예를 배웠습니다.”
전대 가주는 잠시 고민하다가 지시했다.
“사람을 보내 석목의 행동을 감시하고, 금 씨 가문으로 오려 하거든 즉시 내게 알리거라.”
그러자 가주가 재빨리 대답했다.
“이미 금순을 보내놨습니다.”
노인은 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간사하게 생긴 한 중년의 남자가 갑자기 일어서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그 자는 과거 다섯째 형님과 금전을 살해했습니다. 감히 풍성에 다시 돌아오다니, 그 자를 죽여 원수를 갚아야 합니다.”
그는 금 씨 가문의 금오와 항렬이 같았으며, 그중 아홉째였다. 형제들 중에서 금오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던 그는 그동안 가장 열심히 석목을 추적했다.
“아홉째야. 아버지 앞이다. 주제넘게 나서지 말거라!”
가주가 차가운 표정으로 호되게 꾸지람했다.
중년 남자는 감히 말대꾸를 하지는 못했지만 불만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석목이 혼자 힘으로 백 명이 넘는 금룡방의 사람들과 오량, 오풍 두 형제를 전부 살해했다는 이야기를 방금 듣지 않았느냐. 이전의 그와는 다르다. 그토록 강한 사람과는 더 이상 악연을 쌓아서는 안 된다.”
가주는 전대 가주를 한 번 힐끔 보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중년의 남자는 그 말에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