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위세를 보이다
노인은 천천히 걸어가더니 다시 자신의 자리에 앉았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가 물었다.
“첫째야.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한다고 생각하느냐?”
가주가 천천히 대답했다.
“아버지, 어찌됐건 석목은 일곱째의 아들입니다. 과거 금오와의 사건 때문에 우리 금 씨 가문에서 그에게 현상금을 걸긴 했지만, 실질적인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습니다. 석목과 화해할 수 있는 가능성은 충분히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가주의 말에 중년의 남자가 분개해서 소리쳤다.
“형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금오와 금전이 그에게 죽었습니다!”
그러나 가주는 평온한 말투로 대답했다.
“아홉째야, 당시의 일은 금전이 먼저 잘못하지 않았느냐? 다섯째가 복수에 눈이 멀어 우리가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것이다. 이미 떠나고 없는 두 사람을 위해서 석목과 정면으로 맞서자는 것이냐?”
“가주의 말이 옳습니다. 어디서 수련했는지 몰라도, 그는 굉장한 실력을 쌓았습니다. 오 씨 가문의 오량조차 그의 적수가 되지 않았으니, 그의 실력은 최소 후천 대원만의 경지라고 봐야겠지요.”
기품이 있는 중년의 남자가 가주에게 동의했다.
그러자 간사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가 이를 악물고 말했다.
“흥! 나이도 얼마 되지 않은 그가 그 정도 실력을 가졌다니, 믿을 수 없습니다. 분명 간사한 계략을 사용해 오풍과 오량을 살해했겠지요. 뇌화기관진(雷火机关阵)을 설치하고 가지고 있는 풍화통을 전부 사용한다면 그의 목숨 정도야 손쉽게 빼앗을 수 있을 것입니다.”
“아홉째야, 얼토당토않은 소리는 하지 말거라. 풍화통이 얼마나 진귀한 물건인지 모르는 것이냐? 우리 금 씨 가문이 백 년을 들이고도 고작 서른 개도 모으지 못했는데, 어찌 그것을 전부 사용할 수 있겠느냐?”
중년 남자를 말리는 가주의 목소리에는 이제 짜증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간사하게 생긴 중년의 남자는 무언가 더 말하려 했으나, 전대 가주가 그의 말을 끊었다.
“아홉째야, 네가 다섯째와 관계가 특히 좋았던 것은 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첫째의 말을 듣도록 해라.”
중년의 남자는 달갑지 않은 표정이었으나,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대 가주는 시선을 가주에게 돌리며 물었다.
“첫째야, 계속 말해보거라. 만약 석목이 금 씨 가문까지 들어온다면 어떻게 하는 게 좋겠느냐?”
“우선 일곱째를 풀어주고 석목과 접촉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곱째도 우리 금 씨 가문의 사람이니 분명 동의할 것입니다….”
가주가 여기까지 말했을 때 밖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금색 옷을 입은 노인이 허둥대며 달려오더니 창백한 얼굴로 외쳤다.
“보…보고 드립니다! 밖에 자신을 석목이라 청하는 자가 와 있습니다!”
“뭐라고?”
놀란 전대 가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다른 금 씨 가문의 사람들 역시 크게 놀란 표정이었다.
“첫째야, 분명 금순이 감시하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어떻게 그 자가 이곳에 올 때까지 아무 소식이 없을 수 있지?”
노인이 가주를 보며 화가 난 말투로 말했다.
가주는 창백해진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 역시 어떻게 된 것인지 자초지종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때,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다시 한 번 들려왔다.
이번에는 단발머리의 중년 남자가 달려와서 말했다.
“보고 드립니다. 유풍무관 근처의 길목에서 쓰러져 있는 금순이 발견됐습니다. 상처가 가볍지 않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습니다.”
전대 가주는 숨을 깊이 들이마시며 가까스로 놀란 가슴을 가라앉혔다.
“금복, 석목을 응접실로 모셔라. 내가 바로 가겠다.”
노인이 전대 가주로서의 기개를 보이며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석목의 도착 소식을 전한 노인이 대답을 하고 몸을 돌려 나가려 할 때, 밖에서 낭랑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필요 없습니다. 모두 여기 있는데 응접실까지 갈 필요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순간 비단 옷을 입은 청년이 방문 앞에 귀신처럼 나타났다. 석목이었다.
그는 살짝 거만한 눈빛으로 금 씨 가문의 사람들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석목은 유성추와 운철흑도를 전부 밖에 세워진 마차에 두고 왔기 때문에 아무 무기도 소지하지 않은 상태였다.
금 씨 가문 사람들이 전부 벌떡 일어났다. 무기가 있는 자들은 무기를 뽑아들었다. 장내의 분위기가 순간적으로 팽팽하게 긴장됐다.
“모두 멈춰라!”
전대 가주가 가문의 사람들을 향해 소리쳤다.
무기를 뽑아 든 이들은 석목의 양손이 비어 있는 것을 확인하고 그제야 무기를 거두었다. 그러나 여전히 석목을 향해 경계의 눈빛을 거두지 않았다.
“네가 석목인가?”
가문의 사람들을 저지시킨 전대 가주가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맞습니다. 그러는 당신은 금 씨 가문의 전대 가주겠죠?”
석목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면서 웃으며 반문했다.
전대 가주는 그가 점차 가까이 다가오는 것을 보며 진기를 슬그머니 끌어올렸다.
전대 가주는 석목의 몸에서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거대한 압박감을 느꼈다. 후천후기에 불과한 무인을 마주한 것이 아니라, 마치 거대한 괴수를 마주한 것 같은 서늘함이었다.
그리고 사실 전대 가주의 느낌이 딱히 맞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삼수흉망의 수혼을 흡수한 후 석목의 몸에서는 자연스럽게 괴수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기 때문이다.
“하하, 네가 석목이구나. 나는 금 씨 가문의 가주 금현이다. 일곱째의 아들인 너 역시 우리 금 씨 가문의 사람이지. 가문의 어른들을 소개해주마.”
금 씨 가문의 가주가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석목을 맞이했다.
“가문의 어른이라….”
장내에 있는 사람들을 훑어보는 석목의 표정에 경멸의 빛이 떠올랐다.
“금 씨 가문에서 내가 인정하는 손윗사람은 진이모 한 분 뿐입니다. 내가 과거 금오와 금전을 살해했다는 이유로 그녀를 감금해 화풀이했다고 하던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죠?”
석목이 차가운 표정으로 전대 가주를 바라보며 말했다.
전대 가주는 성이 나서 안색이 새까맣게 변했다.
그는 풍성을 주름잡는 금 씨 가문의 전대 가주로서 수십 년간 존중만을 받아왔다. 이제껏 이런 새파란 젊은이에게 꾸지람을 받아본 적이 있을 리가 없었다.
전대 가주는 가볍게 숨을 내쉬고 무언가 말하려 했다.
바로 그 순간, 검은 검영이 석목의 등을 노리고 소리 없이 찔러왔다.
마침 석목 뒤쪽의 멀지 않은 곳에 있던, 간사하게 생긴 중년 남자가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급습한 것이었다.
후천중기의 무인인 중년 남자는 뛰어난 실력으로 풍성 바닥에서 상당히 이름을 날리고 있었다. 특히 그의 공격은 매우 악랄하면서도 정확했다. 일반적인 후천후기의 무인은 막아내기 힘든 공격이었다.
그의 검은 검에는 극독으로 보이는 끈적끈적한 액체가 묻어 있었다. 검 끝에 살짝 긁히기만 해도 곧바로 쓰러져서 다시는 일어나지 못할 것이 분명해보였다.
그 모습을 본 전대 가주의 눈이 번뜩였다. 그는 기합을 지르며 세검을 뽑아들었다. 순간 검광이 반짝이며 수십 개의 얇고 기다란 검광이 석목의 몸을 노렸다.
석목이 전대 가주의 공격을 피하려면 뒤쪽으로 후퇴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의 등 뒤에서는 극독이 칠해진 검이 다가오고 있었다.
전대 가주는 석목이 바닥에 쓰러져 나뒹구는 광경을 상상했는지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석목의 모습이 잔영을 남기며 여러 개로 나뉘었다.
곧이어 잔영이 사라지자, 석목은 처음부터 몸을 움직인 적이 없었다는 듯, 그대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독이 칠해진 검은 석목의 옷가지를 뚫었으나, 그 이상은 조금도 파고 들어가지 못했다.
그리고 중년 남자가 갑자기 반 정도 입을 벌리며 기괴한 소리를 냈다. 어느새 구멍이 뚫린 그의 목에서는 피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중년 남자는 곧 동공이 풀려서 바닥에 쓰러졌다.
동시에 전대 가주의 몸이 뒤로 강하게 밀려났다. 그는 벽에 몸을 부딪치고 바닥에 쓰러졌다.
그의 손에 쥐어진 세검은 반 토막이 나 있었고, 가슴팍의 옷이 찢어져서 그 사이로 금색 연갑이 드러나 보였다.
전대 가주의 입가에서는 피가 천천히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사갑…. 흥!”
석목이 왼손을 덮은 검은 비늘을 빠르게 거두며 콧방귀를 뀌었다.
그곳에 있던 다른 이들은 전대 가주가 나서는 것을 보고 공격에 가세하려 했으나,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이 모두 당하는 것을 보고 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금 씨 가문의 기둥이라더니, 고작 이 정도입니까? 오 씨 가문의 오량과 별반 다르지도 않군요.”
석목이 전대 가주를 향해 경멸하는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전대 가주의 눈에는 두려움이 가득 서려 있었다.
그는 방금 석목이 무엇으로 자신의 검을 부러뜨렸는지조차 자세히 보지 못했다. 그는 그제야 석목과 자신의 격차가 얼마나 큰지 깨달았다.
그는 고작 후천후기에 불과한 석목이 무기조차 들지 않은 채 무례한 언행에 화가 나 있었다. 그러던 참에 아홉째가 기습을 펼치자, 순간적인 판단으로 자신도 가담했다.
바닥에 쓰러진 전대 가주는 부끄러움과 분노를 동시에 느끼고 있었다.
석목이 바라보자 그는 마치 뱀 앞에 놓인 생쥐처럼 벌벌 떨었다.
“어…어쩌고 싶은 것이냐?”
전대 가주가 어두운 표정으로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살짝 쉬어 있었다.
“풍성에 온 것은 당신들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단지 진이모를 뵙기 위한 것이니 안심하시지요.”
석목이 차갑게 말했다.
그러자 전대 가주가 무언가 지시를 내리기도 전에, 그의 옆에 있던 가주가 즉시 사람을 보내 진이모를 데려오게 했다.
“당신들은 얼굴도 보기 싫으니 이곳에서 당장 나가십시오.”
석목은 상석으로 가서 앉으며 말했다.
이미 겁을 먹고 덜덜 떨고 있던 장내의 사람들은 석목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앞 다투어 밖으로 도망쳤다. 심지어 그들은 시체를 옮기는 것조차 하인에게 떠맡겼다.
가주의 부축을 받으며 밖으로 나온 전대 가주는 문 앞의 정원에 멈춰 서서 석목이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전대 가주와 가주가 그 자리에 멈추자, 금 씨 가문의 다른 사람들도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방에 혼자 남게 된 석목은 의자에 앉아서 두 눈을 감고 있었다.
잠시 후, 석목은 가벼운 발걸음 소리를 듣고 눈을 떴다. 곧 진 이모가 그의 앞에 나타났다.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지만 진 이모는 크게 바뀐 게 없었다. 다만 그동안 가택연금을 당한 탓인지 살짝 초췌해졌으며, 처음 만났을 때와 같은 여장부의 기운은 느껴지지 않았다.
“진 이모.”
석목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 석목이니?”
그에게 몇 걸음 다가선 진 이모가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녀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런 진 이모의 반응은 당연한 것이었다.
과거에 석목이 풍성을 떠날 당시 고작 열네다섯 살에 불과했다. 그는 이제 이십 대에 접어들었으며, 그동안 종문과 야만족 황무지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외모와 체형, 그리고 피부색까지 전부 바뀌어 있었다.
“저예요. 몇 년 동안 저 때문에 고생하게 해서 정말 미안해요.”
“바보야,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데 지켜주지 못했으니 내가 미안해 해야지. 이렇게 잘 컸으니 망정이지, 나중에 네 아버지를 뵐 낯이 없을 뻔했구나.”
석목이 미안한 마음을 드러내자 진 이모는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서로 인사를 주고받는 사이 두 사람은 더욱 친밀해졌다. 진 이모는 석목이 그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물었고, 석목은 숨기지 않고 간단하게 대답했다.
진 이모는 석목의 말을 들을수록 놀랐다. 그가 몇 년 사이에 그렇게까지 많은 일을 겪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잠시 후, 석목이 물었다.
“참, 옥환은 지금 집에 있나요?”
“옥환은 네가 떠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개원무관에 들어갔단다. 야만족의 침입 때문에 벌써 삼 년간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있지.”
진 이모가 그리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석목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인족과 야만족이 동맹을 맺었으니 곧 전쟁이 끝날 겁니다. 옥환은 머지않아 집에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인족과 야만족이 연맹을 맺은 사실은 아직 대중에게 정식으로 공표되지는 않았다. 진 이모는 석목의 말을 듣고 잠시 놀랐으나 곧 안도하는 표정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