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떠나다
석목은 품에서 부적뭉치와 병 한 개, 그리고 푸른색 채찍을 꺼내 진 이모에게 건넸다.
“진 이모, 이번에는 풍성을 경유하던 중에 들른 것이라 이곳에 오래 머물 수 없어요. 병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은 증원단(增元丹)이에요. 아마 수련에 상당히 도움이 될 거예요. 그리고 이것들은 부적과 법기이니 가지고 있다가 쓰도록 하세요.”
석목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
증원단은 그가 황무지에서 얻은 것으로, 후천무인의 수련에 큰 도움이 되는 단약이었다.
진 이모는 복잡한 표정이 되어 머뭇거리며 약병을 받아들었다. 그리고 뚜껑을 열자 증원단의 상쾌한 향기가 새어나왔다. 그녀는 순간 자신의 진기가 넘실거리는 것을 느끼고 깜짝 놀랐다.
그녀는 부적과 푸른색 채찍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석목이 준 부적들은 전부 하급부적이었지만 그 가치는 굉장했다. 금 씨 가문은 재산이 풍족한 편이었지만, 이렇게 많은 부적을 한 번에 사들일 만한 돈은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푸른색 채찍은 열사부족에서 공들여 만든 중급법기였다. 금 씨 가문 전체를 통틀어도 하급법기조차 몇 개 있지 않았다.
“이 물건들은 너무 진귀한 것이라 받을 수 없다. 다시 가지고 가거라.”
진 이모가 물건들을 석목에게 다시 건네며 말했다.
“사양할 필요 없어요. 이것들이 귀한 것은 맞지만, 저에게는 그다지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에요. 편하게 받아주세요.”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네가 그렇게 말한다면, 면목 없지만 받도록 하마.”
진 이모는 살짝 머뭇거렸지만 결국 물건들을 받아들였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담담하게 웃다가 곧 무언가를 떠올리고 살짝 어두워진 표정이 되었다.
“진이모, 사실은 도움을 청하고 싶은 일이 하나 있어요.”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라면 당연히 도울 테니 편하게 말하려무나.”
“이 돈을 금룡방 방파원의 남은 가족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까요?”
석목은 품속에서 은표와 금덩어리를 꺼내 진이모에게 건넸다. 그리고 금룡방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 설명했다.
비록 목걸이에게 지배당해 저지른 일이긴 하지만, 결국 자신의 손으로 학살을 저지른 것에 대해 석목은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오 씨 가문은 죗값을 받은 것이라고 치더라도, 금룡방은 평소에 악행을 저지르기는 했지만 죽을 정도의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석목은 남은 가족들에게 힘이 닿는 데까지 보상을 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방법을 고민하던 석목은 이 일을 진 이모에게 부탁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진이모는 고개를 끄덕이며 석목에게 흔쾌히 약속했다.
“감사합니다.”
마음이 놓인 석목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 바로 떠나려는 것이니?”
진 이모가 아쉬운 듯 말했다.
“맞아요, 진 이모. 나중에 또 봐요. 몸조심하세요!”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진 이모에게 작별을 고한 후 밖으로 나왔다.
아직 정원에 모여 있던 금 씨 가문의 사람들은 석목이 나오는 것을 보고 겁에 질린 표정이 되었다.
석목은 서늘한 표정으로 장내의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오늘은 진 이모의 얼굴을 봐서 용서해 주지만, 다시 한 번 진 이모나 옥환을 건드린다면 그때는 오늘처럼 쉽게 넘어갈 수 없을 겁니다.”
석목은 마지막으로 전대 가주를 바라보며 차갑게 말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전대 가주를 대신해 겁에 질린 가주가 급하게 대답했다. 나머지 사람들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은 몸을 돌려서 진 이모에게 고개를 끄덕인 후 담장을 넘어 사라졌다.
그리고 반 시진 후, 석목이 탄 검은 마차가 풍성을 나섰다.
석목은 고개를 돌려 높이 솟은 성을 바라보았다. 해질 무렵의 석양이 성을 금빛으로 비추고 있었다.
석목은 조금의 아쉬움을 느끼며 다시 앞을 바라보았다.
무인의 길을 걷는 지금, 그가 앞으로 나아갈수록 풍성에 있는 이들과는 점점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석목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이제껏 느껴본 적 없었던 고독이 갑자기 피어올랐다.
석목은 갑자기 눈썹을 치켜세우며 근처에 있는 한 민둥산을 바라보았다. 산꼭대기에 낡은 사당이 있었다.
그 사당은 석목이 종수와 그녀의 아버지를 처음 만난 곳이었다.
그는 종수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과거에 도망을 치는 와중에 황급히 이별한 뒤로는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잠시 후, 석목은 마차의 방향을 틀어서 묘음종이 위치한 남서쪽으로 향했다.
* * *
늦은 밤, 어느 황야에 마차가 멈춰 서 있었다. 마차를 끌던 두 마리 말은 옆에 있는 나무에 묶인 채였다.
석목은 조금 피곤한 표정으로 바위 위에 앉아 있었다.
물론 마차를 타고 이동하느라 피곤해진 것은 아니었다. 낮에 목걸이의 사악한 기운이 몸 안으로 침입했을 때 몸을 무리하게 쓴 탓이었다.
단약을 하나 꺼내 먹으려던 석목은 주위에 펼쳐진 광야를 보고 갑자기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비록 이곳은 외진 곳이었지만, 위험이 없을 거라고 장담할 수는 없었다.
문득 석목은 연나를 떠올리고 미안함을 느꼈다.
당시 용사의 문에서 연나는 자신을 대신해, 치명적인 일격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이후 석목은 금지를 나선 뒤 저주를 해제하느라 바빴고, 그 뒤에는 황무지에서 도주하느라 연나에 대해 완전히 잊고 있었다.
석목은 주문을 외우며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의 눈앞 허공에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더니 안개 속에서 해골 한 구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해골은 뼈 갑옷을 입고 뼈창을 들고 있었으며, 눈가에는 두 개의 파란색 화염이 반짝이고 있었다.
해골을 본 석목은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앞에 서 있는 해골은 그의 기억 속에 있는 연나의 모습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연나?”
석목이 확신 없는 목소리로 연나의 이름을 불렀다.
그러자 연나는 석목이 무엇을 하는지 이해하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석목을 잠시 바라보다가 빠르게 다가와 그를 안았다.
놀란 석목은 진기를 전부 끌어올려 연나를 떨쳐내려 했지만, 이어 그대로 멈췄다.
연나는 석목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전혀 없었다. 그저 그를 안고 두 팔로 몸을 더듬을 뿐이었다.
이전까지 연나는 이런 행동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방금 연나의 움직임은 석목조차 반응하지 못할 정도로 빨랐다.
삼수흉망과의 전투 이후 연나의 몸에 무언가 변화가 생긴 것 같았다.
석목은 연나를 밀어낸 뒤 자세히 살펴보려고 했다.
바로 그때, 석목의 허리춤이 갑자기 가벼워졌다. 이어 연나가 몇 장 밖으로 빠르게 물러났다.
허리춤을 만져본 석목은 그곳에 걸려 있던 수혼 주머니가 어느새 연나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연나는 영혼의 화염을 반짝이며 수혼 주머니를 열고 입을 벌렸다. 수혼이 주머니에서 하나씩 날아올라 연나의 입 속으로 흡수됐다.
수혼을 삼킬수록 연나의 파란 영혼의 화염은 조금씩 짙어졌다.
연나는 주머니의 수혼을 절반 정도 삼킨 후 갑자기 고개를 들어 하늘을 향해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연나의 몸에서 강대한 기운이 사방으로 뿜어져 나오며, 사나운 기류가 주위를 휩쓸었다.
석목은 깜짝 놀랐다. 연나가 뿜어내는 기운은 선천의 경지에 오른 이들의 그것만큼 크고 강력했다.
연나는 석목이 모르는 사이에 선천의 경지에 오른 것이었다.
석목은 믿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강력한 기운을 뿜어내는 연나가 바로 눈앞에 있으니,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석목이 오각부족의 야만인에게서 강탈한 수혼이 잠깐 사이에 연나에게 전부 먹혔다.
연나의 파란 영혼의 화염이 요란하게 반짝이더니 곧 안정되었다. 영혼의 화염은 이전보다 더욱 커졌으며 색도 더욱 짙어졌다.
어두운 빛이 감돌기 시작한 연나의 창은 창끝에 섬뜩한 빛이 반짝여서 더욱 날카로워 보였으며, 지렁이 같은 부문이 생겨나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그가 줄곧 무시해온 해골이 어느새 자신보다 더 높은 선천의 경지에 올라 있으며, 방금 수많은 수혼을 흡수하고 선천중기의 경지를 바라보는 수준까지 다다랐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야만족의 금지에서 자신의 수혼 주머니를 털어간 것도 연나의 소행이 분명해보였다.
연나는 다시 석목의 옆으로 다가오더니, 수혼 주머니를 그의 허리춤에 걸었다. 그리고 다른 주머니를 찾는 듯 석목의 허리춤을 더듬기 시작했다.
“더 이상 없다. 수혼은 네가 가져간 것이 전부야.”
석목은 연나의 행동을 저지하면서 말했다. 그는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기분이었다.
석목이 몇 번을 밀어내자, 연나는 그제야 포기하고 옆으로 움직였다.
석목이 수혼을 남겨둔 것은 자신의 토템등급을 높이기 위해서는 많은 수혼을 흡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원래는 자신의 경지가 한 단계 더 오르면 토템의 힘을 강화시킬 생각이었는데, 그것을 연나가 전부 먹어버린 것이다.
석목은 한숨을 쉬었지만 곧 표정이 밝아졌다.
연나가 선천의 경지에 올랐다는 건 자신에게 그만큼 강한 조력자가 생겼다는 뜻이기도 했다.
연나는 수혼을 흡수하면 빠르게 강해졌다. 수혼을 정제하는 과정도 필요 없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이후 괴수를 사냥해서 수혼을 수집하는 것만으로도, 연나의 실력을 빠르게 강화시킬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석목은 연나에게 다가가 정신의 교류를 시도했다.
연나는 이미 선천초기의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나, 지력은 크게 높아진 것 같지 않았다. 연나의 지력은 여덟 살 아이 정도의 수준이었다.
석목은 산산이 흩어진 정보를 천천히 규합해 연나가 선천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방법을 알아냈다. 물론 주된 방법은 수혼을 흡수하는 것이었다.
살짝 피로감을 느낀 석목은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리고 연나에게 자신을 지키라고 지시한 후 눈을 감았다.
선천의 경지에 오른 연나가 옆에서 지켜주니 아무런 걱정이 없었다.
밤은 빠르게 지나갔다. 하늘이 밝아질 때쯤 석목은 천천히 눈을 떴다.
사악한 기운과 싸우며 무리를 했던 그의 몸은 밤새 취한 휴식 덕분에 완전히 회복돼 있었다.
그의 옆에는 창을 든 연나가 아직도 서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석목은 갑자기 어지러움을 느꼈고, 잠시 뒤 씁쓸하게 웃었다.
연나가 선천의 경지에 오르자 소환을 유지하기 위해 소모되는 정신력의 양이 그만큼 대폭 증가한 것이었다. 연나는 그저 가만히 서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몇 시진 사이에 석목의 정신력을 거의 고갈시켰다.
연나를 사령계로 돌려보낸 후 정신력을 회복한 석목은 묘음종을 향해 다시 발걸음을 재촉했다.
* * *
보름 후, 대제국 진주(陈州) 자령 산맥의 깊은 곳.
석목은 자색 연무에 뒤덮인 자색 산봉우리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산봉우리에서 시선을 거둔 석목은 왼쪽에 있는 자색 산맥으로 걸어 들어갔다. 산길이 좁아 통행이 불편했기 때문에, 그는 들어가기 전 마차를 두고 배낭과 운철만 챙겼다.
일 각 후, 석목은 산자락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자 일 장 너비의 푸른색 산길이 정상까지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것이, 자색 안개 사이로 보였다.
앞의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나무 정자에는 녹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하지만 안개에 덮여 모습이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