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청명과를 선물하다
석목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정자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자 앉아 있던 두 사람이 뛰어올라 석목의 앞을 가로막았다.
길을 막은 것은 묘음종의 복장을 한 소녀들이었다. 한 사람은 열다섯 살 정도의 나이에 외모가 매우 아름다웠으며, 다른 한 사람은 몸이 늘씬하고 입술이 얇았다.
두 사람의 기운은 그리 강하지 않았다. 둘 다 후천초기의 무인인 것 같았다.
“멈춰라! 이곳은 묘음종 종문이 있는 곳이다. 누구도 허가 없이는 산에 오르지 못한다.”
아름다운 소녀가 왼손을 뻗으며 석목에게 소리쳤다.
“저는 흑마문의 석목입니다. 묘음종을 찾아온 것은 종수라는 여제자를 찾기 위해서입니다. 번거롭겠지만 두 사매께서 전갈을 부탁드립니다.”
석목은 발걸음을 멈추고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나 아름다운 소녀가 입을 열기도 전에, 입술이 얇은 소녀가 코웃음을 치며 거만하게 말했다.
“종 사숙의 존함은 네가 마음대로 부를 있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만나고 싶다고 그냥 만날 수 있는 분도 아니다!”
석목은 종 사숙이라는 말을 듣고 순간 멍해졌다. 그러나 과거에 엽홍약이 자신의 사부를 대신해서 종수를 제자로 들인다던 말을 기억해내고 의문을 풀었다.
“7종문의 자금령입니다. 당신들의 종 사숙을 만나고 싶습니다.”
석목은 품속에서 칠각형 자금령을 꺼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입술이 얇은 소녀가 눈썹을 치켜세우며 무언가 말하려 하자, 옆에 있던 아름다운 소녀가 급히 말을 가로챘다.
“석 사형은 연맹의 사자였군요. 그럼… 우선 저를 따라 산으로 들어가시지요.”
아름다운 소녀는 얇은 입술의 소녀를 잡아 끌어, 귓가에 몇 마디를 속삭였다. 그러자 입술이 얇은 소녀는 석목을 향해 살짝 어색한 미소를 지어보인 후 정자로 돌아갔다.
아름다운 소녀는 웃으며 석목에게 길을 안내했다. 석목은 무표정한 얼굴로 자금령을 다시 품속에 넣고 그녀를 따라 산에 올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가에 있는 고풍스러운 정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제 사매가 철이 없어 푸대접을 한 것을 너무 언짢아하지 않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저기에서 잠시 쉬고 계시면 종 사숙에게 전갈을 하겠습니다.”
아름다운 소녀는 정자 방향으로 석목을 안내하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석목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대화를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정자에 도착했고, 소녀는 석목을 향해 한 번 웃어 보인 후 바로 자리를 떴다.
소녀가 떠난 후 석목은 덤덤하게 정자에 앉아 여유롭게 산 정상을 바라보았다. 산 정상에는 자색 전당과 많은 건물이 있었다.
이 각 후, 산 정상에서 녹색 옷을 입은 사람이 석목이 있는 정자 쪽으로 빠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곧 피부가 하얗고 아름다운 소녀가 정자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기쁜 얼굴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소녀의 까만 머리카락이 바람에 휘날리자, 적당히 짙은 눈썹 아래 드러난 맑은 눈동자가 석목의 정신을 쏙 빼놓았다. 그녀의 날렵한 코와 눈처럼 하얗고 갸름한 얼굴은 상당히 수려했으며, 몸매도 매우 날씬해서 마치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 같았다.
그녀의 얼굴에 어렴풋이 과거의 모습이 남아 있지 않았다면, 석목은 눈앞의 절세미녀가 예전의 수줍음 많고 연약했던 소녀라는 사실을 믿지 못했을 것이다.
“종…수? 이마의 반점은 어떻게 된 거죠?”
놀란 석목이 엉겁결에 말했다.
“반점은 벽음만파공을 수련하기 시작한 뒤로 점차 사라졌어요. 왜요, 별로인가요?”
정자에 들어온 종수가 석목 옆에 앉아 살짝 웃으며 말했다.
“천만에요, 예전에도 예뻤지만 지금은 더욱 아름다워 하마터면 알아보지 못할 뻔했어요. 몇 년 안 본 사이에 이미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올랐군요.”
정신을 차린 석목은 그제야 그녀가 이미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것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코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종수가 깔깔 웃으며 말했다.
“제가 어디 오라버니만큼 대단하겠어요! 오라버니는 이미 7대 종문에서 유명인이에요. 야만족의 금지에서 화무공주를 도와서 야만족과의 동맹을 체결시키는 큰 공을 세웠잖아요.”
“하하, 그저 운이 따랐을 뿐이에요.”
석목이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종수는 그 일에 대해서 자세히 묻고 싶었으나, 석목이 말을 아끼는 모습을 보고 결국 입을 다물었다.
그녀는 문득 석목의 어깨에 떨어진 낙엽을 발견하고 손을 뻗어 치워주려 했다.
그러나 석목은 종수의 손이 다가오자 무의식적으로 몸을 뒤로 피했다. 어깨의 낙엽은 나풀거리며 떨어지고, 갈 곳을 잃은 종수의 손은 허공에서 멈췄다.
갑자기 분위기가 어색해졌다.
“종 소저, 저는….”
그러자 종수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손을 거두고 살짝 웃으며 말했다.
“참, 오라버니, 사실 이전에 오라버니를 보러 현무종에 간 적이 있었어요. 하지만, 그 당시 제자들이 전부 염국의 흑마문에 잡혀갔다고 하더라고요….”
석목은 그녀의 말을 듣고 옛날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고, 종수와 옛날 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랫동안 만나지 못해 생겼던 어색함은 얼음 녹듯이 자연스럽게 사라졌다. 곧 산중턱의 정자에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오라버니, 지금은 종문에 들어와 무인의 길을 걷고 있지만, 사실 제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은 오라버니와 함께 금 씨 가문의 사유지에서 보낸 나날이에요. 그런데, 앞으로는 어떻게 할 계획이죠?”
종수가 아름다운 눈을 돌리며 잔잔하게 물었다.
석목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솔직하게 말할게요. 저는 마음에 둔 소저가 있어요. 비록 아직까지는 그녀의 이름조차 모르지만, 그녀는 제가 서른 살이 되기 전에 선천무인이 된다면 자신을 찾아와도 된다고 했어요. 그러니 전 종문으로 돌아가 훈련에 매진할 생각이에요.”
종수의 눈빛이 살짝 침울해졌다. 그러나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오라버니가 빠른 시일 내에 선천의 경지에 올라서, 그녀의 마음을 얻기를 기원할게요! 저 역시 선천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 곧 폐관수련에 돌입하려 했으니, 오늘 헤어지면 언제 또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
그때 석목은 무언가 생각나서 이마를 탁 치며 말했다.
“참, 하마터면 깜빡할 뻔했네요. 선천의 경지에 오르는데 이것이 상당한 도움이 될 거에요.”
석목은 품속에서 주먹 크기의 푸른 과일을 꺼내 종수에게 건넸다.
“오라버니, 이…이것은 설마 청명과인가요? 이렇게 귀한 물건은 받을 수 없어요. 오라버니가 가지고 계세요.”
놀란 종수가 황급히 거절했다.
“종 소저, 저는 하나 더 있어요. 받아주세요.”
석목은 살짝 웃으며 품속에서 청명과를 하나 더 꺼내보였다.
“그럼… 그럼 감사히 받을게요.”
종수는 아름다운 얼굴을 살짝 붉히며 청명과를 받아들였다.
석목은 종수가 묘음종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잘 지내는 것 같아서 안심했다. 그는 종수와 대화를 조금 더 주고받다가 몸을 일으키며 작별인사를 했다.
그리고 종수는 청명과를 꼭 안은 채, 멀어지는 석목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 * *
반 시진 후, 자령산맥의 정상.
들쭉날쭉 세워져 있는 건물들 사이에 삼 층 높이의 자색 전당이 우뚝 서있었다.
건물들과 자색 전당은 서로 다리로 연결되어 있었는데, 그 모습이 굉장히 운치가 있었다.
전당의 꼭대기 층에 위치한 커다란 방에는, 몸매가 풍만한 한 여인이 백옥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의 맞은편에는 녹색 옷을 입은 더 없이 아름다운 소녀가 마찬가지로 백옥 방석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그녀는 바로 종수였다.
종수는 무심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눈에는 침울한 기색이 흘렀다.
“수아야, 벽파지(碧波池)에 들어가기로 결심을 한 것이냐?”
풍만한 여인의 목소리가 방에서 메아리쳤다.
“그렇습니다, 사부님.”
종수가 고개를 살짝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는 과거의 아쉬움을 너에게 억지로 떠넘기고 싶지 않단다. 그 길을 선택하면 많은 것을 포기해야만 할 것이며, 다시는 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다.”
여인이 천천히 말했다.
“사부님, 저는 이미 결심했습니다.”
종수는 고개를 들며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러자 여인은 두 눈을 뜨며 말했다.
“그렇다면 가거라. 너의 자질이라면 벽파지에서 일 년도 되지 않아, 기부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 * *
그 즈음, 석목은 어느 가게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의 손에는 작은 보따리가 들려 있었고, 그 안에는 일고여덟 개의 약병이 들어 있었다.
묘음종에 예속되어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던 석목은 이곳에서 쉬골단과 혈강단을 팔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게다가 그 품질은 흑마문의 것보다 훨씬 좋았다.
석목은 남은 재산을 전부 털어서 쉬골단과 혈강단을 구매했다. 이 정도면 일 년 동안은 충분히 사용할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가게를 나온 석목은 지도를 꺼냈다. 그 지도에는 인족의 구역과 각지의 성이 표시되어 있었다.
석목은 지도를 들여다보며, 묘음종에서 출발해 흑마문으로 돌아가는 경로를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갑자기 두 종문 사이에 있는 한 산맥에 고정됐다.
“만롱산맥(万陇山脉)….”
석목은 한 여인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잠시 침묵하던 석목은 다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 * *
한 달 후, 석목은 마차를 몰고 어느 거대한 산봉우리 근처에 도착했다.
산봉우리의 정상을 둘러싼 흰 구름 사이로 수많은 건물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 모습은 마치 선계처럼 보였다.
이곳은 대륙의 동부반도에서 매우 유명한 만롱산맥이며, 대제국 3종문 중 하나인 천음종이 위치한 곳이었다.
석목은 산 정상을 바라보며 품속에서 하얀색 옥상자를 꺼냈다. 얼음꽃 모양의 문양이 그려져 있는 매끄러운 옥상자는 얼음처럼 차가운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
이 상자는 고급 한설빙옥(寒雪冰玉)으로 만든 것이었고, 그 안에는 주먹만 한 크기의 청명과 한 개가 들어 있었다.
석목은 산 정상을 바라보며 주저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음차녀와 겨우 두 번 밖에 만나지 않았지만, 그녀가 한빙(寒冰) 속성의 심법을 수련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청명과는 큰 도움이 될 것이었다.
석목은 그녀에게 청명과를 주고 싶었지만, 과거에 그녀와 선천의 경지에 오른 후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 때문에 함부로 산에 올랐다가는 약속을 어기는 꼴이 될 수도 있었다.
그때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왔다.
천음종의 복장 한 사람 여덟 명이 산 입구에서 걸어나오고 있었다.
“누군데 우리 천음종 근처에서 배회하지?”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흰 옷을 입은 소녀가 허리춤에 손을 가져다대며, 석목에게 소리쳤다.
“저는….”
석목은 급하게 설명하려다 말고 순간 멍청한 표정이 되었다.
맞은편의 흰 옷을 입은 소녀 역시 똑같은 표정이 되어 석목을 바라보았다.
“석목 사형?”
흰 옷을 입은 소녀가 말했다.
“기 사매, 오랜만이에요.”
마차에서 뛰어내린 석목이 웃으며 인사했다.
소녀는 예전에 거점에서 같이 지낸 적이 있는 천음종의 기선이었다. 그녀는 만나지 못한 사이에 상당히 강해져서 후천후기의 경지에 올라 있었다.
석목은 그녀와 천음차녀가 특별한 관계였다는 것을 뚜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무슨 일로 천음종에 온 것이죠?”
기선은 손을 흔들어 주위의 제자들이 먼 곳에서 기다리도록 지시하며 물었다.
“이곳을 지나던 길에 개인적인 일로 방문하게 됐습니다.”
석목이 말했다.
“석 사형이 야만족과의 회담을 위해 파견된 사자단에 합류해 상당한 공로를 세웠다는 소문이 연맹에 자자하더군요.”
기선이 호기심이 생긴 듯 말했다.
석목은 그녀의 말을 듣고 놀랐다. 그러나 화무공주가 대제국의 공주인 동시에 천음종의 제자라는 사실을 곧 떠올렸다.
“그저 인연이 닿아 화무공주와 동행했을 뿐이에요.”
석목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기선은 석목이 야만족들 사이에서 경험한 것들에 대해 매우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두 사람은 한동안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하는데 너무 정신이 팔렸군요. 천음종에 일이 있어 온 것이니 저와 함께 종문으로 가시지요.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제가 돕도록 할게요.”
기선이 말했다.
그러나 석목은 살짝 머뭇거렸다.
“종문까지는 가지 않겠습니다. 혹시 기 사매가 일을 하나 도와줄 수 있을까요?”
“편하게 말하세요.”
기선은 석목의 반응에 다소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지만, 곧바로 대답했다.
“천음차녀 장로님은 현재 종문에 계신가요?”
석목이 여전히 머뭇거리며 물었다.
“천음 사숙이요? 사숙은 지금 수련 중이에요. 천음 사숙을 보러 왔나 보군요?”
기선이 눈을 반짝이며 약간 음흉한 말투로 물었다.
“비슷합니다. 흠…. 사실 그녀에게 물건을 전해주고 싶은데 산에 올라가기 곤란한 상황입니다. 기 사매에게 부탁해도 될까요?”
석목이 얼굴을 살짝 붉히며 말했다.
“그러세요.”
기선이 놀리는 듯한 웃음을 지으며 손을 뻗었다.
석목은 품속에서 옥상자를 꺼냈고, 기선은 웃으며 손을 뻗어 그것을 건네받았다.
기선이 마음 놓으라는 듯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석 사형, 안심하세요. 잘 가지고 있다가 천음 사숙에게 꼭 전달할게요.”
“그럼 부탁할게요.”
기선은 석목과 몇 마디를 더 나누고 천음종의 두 제자를 데리고 자리를 떴다.
그녀가 멀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석목은 다시 산 정상을 조용히 올려다보았다.
“금방 돌아올게요.”
석목은 혼잣말을 한 뒤 마차에 올라탔다.
말발굽 소리와 함께 마차는 먼 곳으로 빠르게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