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초대
펑!
흰색 빛의 사슬이 부서지는 동시에 모습을 감춘 연나는 몇 장 떨어진 곳에서 다시 나타났다.
하지만 너무 격렬하게 움직인 탓인지, 녹색 꽃은 연나의 머리에서 떨어져 가루가 되었다. 그러자, 온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던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절반 정도로 줄어들었다.
놀란 석목은 오른손을 뻗은 채로 그 자리에서 굳어 있었다. 그의 손에는 녹색 꽃의 꽃잎이 쥐여 있었는데, 꽃잎은 곧 녹색 꽃과 마찬가지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 순간, 불가사의한 일이 일어났다.
차가운 기운이 석목의 손을 통해 체내로 들어왔다. 그러더니, 경맥을 타고 전신을 한 바퀴 돌아 단전에 모이기 시작했다.
석목은 한기를 느끼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나 곧 단전의 법력이 크게 증가해 온신술이 6단계의 끝자락에 오른 것을 깨닫고 기뻐했다.
연나는 화가 난 듯 영혼의 화염을 들썩이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몸에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왔고, 연나는 순식간에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무안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그는 연나에 대한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그러나 그보다는 자신의 법력이 증가한 것이 더 기뻤다.
바로 그때, 석목의 머릿속에 어떤 광경이 떠올랐다.
그것은 청록색 산봉우리가 있는 풍경이었다. 산봉우리에는 흰 명주가 거꾸로 걸려 있는 듯한 폭포가 곳곳에 있었다.
그곳은 바로 지금 석목의 거처가 있는 5호 산봉우리였다.
첫 장면은 산 정상까지 이어진 구불구불한 길에서부터 시작했다. 검은 옷을 입은 흑마문의 청년이 그 산길을 따라 빠르게 산봉우리로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석목의 머릿속에 떠오른 이 장면은 바로 채아가 그에게 공유해준 것이었다.
석목은 자신이 필요할 때, 채아의 시야를 공유할 수도 있었지만, 반대로 이렇게 채아가 주도적으로 자신의 시야를 공유해줄 수도 있었다.
“석두, 누군가 왔어. 아마도 너를 찾아온 것 같아!”
채아의 목소리가 석목의 머릿속에서 울렸다.
그 순간 석목의 머릿속에 있는 장면의 장소가 갑자기 이동하더니 산길과 더욱 가까워졌다. 그러자 청년의 이목구비와 표정까지 뚜렷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청년은 빠르게 산을 오르며, 때때로 존경이 가득 담긴 눈빛을 들어 산 정상에 위치한 석목의 거처를 바라보았다.
석목은 그 청년이 흑마문에서 장문인의 곁에 있는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저 자가 왜 이곳에 왔지? 설마 흑마문의 장문인이 또 나를 부른 것인가?’
“석두, 저 사람이 뭐 하러 찾아온 거지? 아니다, 일단 말하지 말아봐. 현명하신 이 몸께서 한 번 맞춰보지. 참, 만약 맞춘다면 신선한 청준과의 씨를 줘야….”
속사포 같은 채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석목은 손으로 이마를 짚다가, 결국 참지 못하고 채아와 연결된 정신을 끊었다. 그러자 머릿속의 장면은 곧 사라졌다.
시야를 공유하는 채아의 능력은 확실히 매우 유용했다. 그러나 채아의 끊임없는 수다는 도저히 견디기가 어려웠다.
채아가 집 밖에서 자유롭게 활동할 수 있도록 해준 것 역시 소란스럽게 떠드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였다.
채아의 안전에 대해서는 딱히 걱정하지 않았다. 채아는 말이 많고 시끄러운 것에 비해 겁이 굉장히 많아서, 5호 산봉우리 근처에서만 맴돌 뿐, 그 이상 벗어날 엄두는 전혀 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잠시 후, 밖에서 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석목은 문 앞으로 다가가 대문을 열었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석목에게 허리 굽혀 예를 표하며 공경하게 말했다.
“석목 대사형, 장문인의 전령입니다. 중요한 이야기가 있으니 본문의 대전으로 즉시 오시랍니다.”
“혹시 무슨 일 때문인지 알고 있습니까?”
석목이 물었다.
“그것은… 저 역시 모릅니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석목은 잠시 묵묵히 있다가 손을 흔들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정리를 좀 하고 바로 가겠습니다.”
검은 옷을 입은 청년은 대답을 하고 물러갔다.
석목은 대문 앞에 서서, 장문인이 자신을 부른 이유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보았다.
“석두, 어딜 가려는 거야?”
석목이 산 아래로 향하자, 채아가 날아와서 그의 어깨에 앉으며 말했다.
“장문인이 나를 찾는다고 해서, 흑마문의 대전으로 가. 넌 따라올 필요 없어.”
채아가 국 사숙의 소환수라는 사실은 대부분의 흑마문 사람이 알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이 채아의 능력을 알아서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석목은 그 존재를 알리고 싶지 않았다.
채아도 이를 이해하고 있는 듯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채아는 곧 산봉우리의 다른 곳을 향해 날아갔다.
* * *
반 시진 후, 석목은 1호 산봉우리에 위치한 흑마문의 대전에 도착했다.
“대사형, 대장로님과 장문인이 안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문을 지키고 있던 흑마문의 제자가 석목을 보고 예를 표하며, 공경하게 말했다.
석목은 놀랐다. 대장로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정말로 큰일이 발생한 모양이었다.
대전의 주석에는 검은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대전의 안으로 들어선 석목이 남자를 바라보았다. 남자 역시 발걸음 소리를 듣고 석목을 바라보았다.
중년의 남자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흑발을 지니고 피부가 반들반들했으며, 나이는 사십 대로 보였다.
그는 그저 조용히 앉아 있을 뿐이었지만, 몸에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압감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하는 순간, 석목은 서늘함을 느끼고 눈에 띄지 않게 몸을 떨었다.
석목으로서는 남자의 경지를 전혀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는 바로 지계의 존재이자 흑마문의 대장로였다.
대장로의 옆에는 흑마문의 장문인과 금소채가 서 있었다.
앞에 있는 세 사람은 석목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갑급제자 서열 2위와 3위인 전웅과 백수수, 그리고 등급전에서 자신에게 패한 막녕이었다.
“제자 석목이 대장로님과 장문인, 금 장로님을 뵙습니다.”
석목이 앞으로 나가서 대장로가 있는 곳을 향해 예를 표했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의 눈이 대장로 옆에 서 있는 금소채와 마주쳤다. 그녀는 석목을 향해 놀리듯 눈을 깜빡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놀란 석목은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너무 예의 차릴 필요 없다.”
중년 남자가 석목을 위아래로 바라보고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몸을 일으킨 석목은 옆에 있는 세 제자 앞에 가서 섰다. 세 제자는 각각 다양한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막녕은 이미 상처가 전부 회복된 상태였지만 여전히 거북한 표정으로 석목을 보았다.
석목에게 매우 우호적인 전웅과 백수수 두 사람은 그를 향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석목인가? 진기와 정신력이 상당히 크고 강하구나. 훌륭하군.”
중년의 남자가 담담하게 말했다.
“칭찬 감사합니다.”
석목이 전혀 위축되지 않고 말했다.
중년의 남자는 의외로 차분한 석목의 모습에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종문의 일부 선천장로들조차 그를 마주하면 쩔쩔맸기 때문이다.
중년 남자는 고개를 돌려 장문인을 보았다. 그러자 장문인이 앞으로 한 발 걸어 나왔다.
“오늘 너희 네 사람을 부른 것은 한 가지 일에 대해 알리기 위해서다.”
장문인이 품위 있는 표정으로 입을 열자 네 사람이 귀를 기울였다.
“너희도 모두 알다시피 우리 흑마문이 세워진지 이미 수천 년이 되었다. 우리 종문은 염국에서 기원한 것이 아니라 대륙 중앙의 천마종을 계승했지.”
장문인의 말에 사람들이 서로를 한 번 바라보았다. 이는 그들도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흑마문의 장문인이 말을 이었다.
“우리 흑마문은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천마종의 분파로서 천마종과 줄곧 관계를 맺어왔다. 그리고 곧 천마종에서 삼십 년에 한 번 개최되는 마양대전이 열리지. 이 대전에서는 천마종의 각 분파가 모두 한 자리에 모여 주맥제자(主脉弟子)와 함께 마양성과(魔阳圣果)를 복용할 자격을 얻기 위해 쟁탈전을 벌이게 된다. 마양성과를 복용하면 자질이 대폭 개선되고 주맥제자가 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여기까지 들은 석목은 장문인이 그 뒤에 무슨 말을 할지 어느 정도 예상이 됐다. 다른 세 사람 역시 마찬가지인지 흥분한 표정이 되어 있었다.
“나와 대장로님은 너희 네 사람을 이번 마양대전에 흑마문의 대표로 참여시키기로 결정했다. 인솔은 금소채 장로가 맡을 것이다.”
장문인이 석목이 예상한 이야기를 꺼냈다.
석목은 장문인의 말을 듣고 감격해서 눈을 빛냈다. 그가 알기로 대륙의 중앙은 대제국처럼 동주대륙의 외딴 곳에 위치한 나라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운 곳이었다.
석목은 줄곧 대륙의 중앙에 대해 매우 선망해왔으며, 꼭 한 번 가보고 싶었지만, 그동안은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 기회가 바로 눈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나머지 세 사람도 매우 기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대장로님과 장문인의 명이니 당연히 따르겠습니다. 출발은 언제입니까?”
석목이 물었다.
이에 대장로가 은은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륙의 중앙까지 가는 길은 상당히 멀지만 마양대전이 열릴 때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러니 두 달 뒤에 출발하더라도 늦지 않을 것이다. 오늘 너희를 부른 것은 미리 준비를 할 수 있도록 사전에 알리기 위해서다.”
“네.”
네 사람이 동시에 대답했다.
금소채와 네 제자가 모두 떠나고 대전에 대장로와 장문인 두 사람만 남았다.
“대장로님, 마양대전은 드물게 한 번 있는 큰 행사입니다. 소채와 네 제자만을 보내기에는 조금 불안하지 않습니까.”
장문인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이어서 말했다.
“후천 대원만 제자 넷 중에서 한두 명을 골호나 녕평 같은 젊은 선천제자로 대신하는 것이 어떨까요?”
“이미 마음을 정한 사안이다.”
대장로가 천천히 대답했다.
“네.”
장문인은 얼른 대답하고 대전을 나섰다.
그가 떠난 후 대장로는 대전의 밖을 바라보며 무언가 생각에 잠겼다.
* * *
대전을 나선 석목과 세 사람은 서로 인사를 하고 각자의 거처를 향해 이동했다.
그때, 갑자기 나타난 금소채가 석목의 앞을 가로막았다.
“석목!”
놀란 석목이 급하게 발걸음을 멈췄다. 금소채가 워낙 갑작스레 코앞에 나타났고 석목의 발걸음도 매우 빨랐기에 두 사람은 거의 부딪힐 뻔했다. 금소채의 매혹적인 체취가 은은하게 풍겨왔다.
석목은 쓴웃음을 지으며 뒤로 한 걸을 물러났다.
막녕등 세 사람이 석목과 금소채를 바라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더니 약속이라도 한 듯 발걸음을 재촉해서 먼 곳으로 사라졌다.
석목이 세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슨 일로 저를 부르신 겁니까?”
금소채는 대답을 하지 않고 석목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내가 준 건원단을 아직 먹지 않은 것이냐?”
그녀는 눈썹을 찌푸리며 물었다.
석목은 금소채에게 감사를 표하며 대답했다.
“건원단은 선천 경지에 오르는 벽을 뛰어넘을 때 먹는 단약이지 않습니까. 아직 수련의 경지가 조금 부족하니 때가 되면 사용할 것입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진귀한 단약을 주셔서 감사하다는 말을 아직 드리지 못했군요.”
“그때가 언제지?”
석목의 말에 금소채가 살짝 어두워진 표정으로 물었다.
“원래 시간을 조금 더 들인 후 두세 달 뒤에 시도하려 했는데, 곧 천마종에 가야 하니 더 뒤로 미뤄야 할 것 같습니다.”
석목은 금소채가 자신의 수련 계획에 대해 묻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도 착실하게 대답했다.
“고작 선천 경지에 오르는 것조차 이렇게 우물쭈물하다니, 정말 답답하구나.”
금소채가 갑자기 차가운 표정으로 화를 냈다.
그녀가 그런 반응을 보일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석목은 순간 얼이 빠졌다.
“네가 조금은 능력이 있는 남자인 줄 알았더니, 이렇게 답답하게 행동할 줄은 몰랐구나. 됐다. 애초에 너에게 기대한 내가 잘못이지….”
금소채는 석목을 한 번 사납게 쳐다본 후 화를 내며 떠나갔다.
석목은 멀어지는 금소채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그녀가 어째서 화가 났는지 도저히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고민을 해봐도 답이 나오지 않자,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산 아래로 내려갔다.
그 후 석목은 한동안 그를 끌어가려는 종문의 고위층과 여러 세력의 제안을 모두 거절하면서, 거처에서 온신술과 현부묘적 수련에만 전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