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화. 깨우침
보름 뒤, 석목은 밀실의 탁자 옆에 엄숙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탁자 위에는 가죽 부적지 여러 장이 가지런히 쌓여 있었고, 그 옆에 법묵과 법붓이 놓여 있었다.
가죽 부적지는 석목이 이전에 야만족 황무지에서 가져온 것으로, 그중 검은색 부적지는 삼수흉망의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석목의 예상대로라면, 선천중기인 삼수흉망의 부적지로 제작한 중급 부적의 위력은 고급 부적의 위력과도 맞먹을 것이었다.
석목은 두 눈을 금색으로 빛내며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리고 삼수흉망의 가죽 부적지를 탁자 위에 펼쳤다.
이어 석목은 법붓에 법묵을 묻혔다. 그리고 왼손에 금속성 영석을 쥔 채 아주 느린 속도로 부적을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가 제작하는 부적은 금갑부보다 더욱 강력한 중급 방어 부적인 금강부(金罡符)였다.
* * *
열흘 후, 석목은 삼수흉망의 가죽으로 만든 것을 포함한 모든 가죽 부적지를 사용했다. 그러나 부적지의 절반 이상은 부적을 제작하는 과정에서 쓰지 못하게 되었다.
그중 삼수흉망의 가죽으로 제작에 성공한 부적은 총 여덟 개로, 적의 움직임을 구속하는 나등부(罗藤符) 다섯 장과 금강부 세 장이었다.
평범한 가죽 부적지를 사용해 제작에 성공한 부적은 총 스무 장이었다. 석목은 평범한 부적지로는 화속성 중급 부적인 화모부(火矛符)만을 제작했다.
그렇게 석목은 탁자 위에 있는 서른 장이 넘는 중급 부적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살짝 피로한 얼굴이었지만 안심한 표정이었다.
대륙의 중심으로 가는 길은 굉장히 멀었다. 여정 중에 어떤 위험이 있을지도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이 부적들이 분명 어느 정도 도움이 될 것이었다.
석목은 손을 흔들어 부적들을 전부 진묘계에 넣은 뒤 침대에 누워 잠에 들었다.
몇 시진 후, 잠에서 깨어난 석목은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두 눈을 감고 적원화경의 법결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그리고 반 시진 후, 눈을 뜬 석목은 미간을 찌푸린 채 사색에 잠겼다.
적염화경은 석목의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총 열두 단계로 나뉘어 있었는데, 7단계에 도달하면 선천 경지에 오를 수 있었고 12단계를 전부 익히면 지계의 경지까지 오르는 게 가능했다.
게다가 단계가 오를수록 화속성 원소에 대한 친화력이 높아져서 화속성 무기를 사용할 때 위력을 더해주었다.
심법이 7단계에 오르면 칠살곤술(七杀棍术)이라는 곤봉을 사용하는 선천 등급의 무예를 익힐 수 있었고, 10단계에 오르면 혼원진화(混元真火)라 불리는 무예를 익힐 수 있었다.
다만 이 심법을 익히려면 불의 기운이 충만한 곳에서 수련을 해야 하며, 대량의 지양단약(至阳丹药)을 복용해야 했다.
석목은 조평에게 흑마문 내에 불의 기운이 충만한 장소에 대해서 들은 적이 있었다. 특수한 단약과 법기를 제작할 수 있는 그곳은 3호 산봉우리 뒷산에 위치해 있었고, 을급제자 이상이라면 누구라도 사용할 수 있는 장소였다.
석목은 몸을 일으켜 밀실의 문에 다가갔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린 영패에서 검은 빛줄기가 나와 돌문을 비췄다.
쿠구궁!
이때 거대한 돌문이 열렸고, 석목이 침실로 나오자 돌문은 조금의 빈틈도 보이지 않게 다시 닫혔다.
석목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거처를 나와서 산 아래로 향했다.
한 시진 후, 석목이 다시 거처로 돌아왔을 때 그의 진묘계에는 집양단(聚阳丹) 서른 알이 들어 있었다. 그것은 지양단약 중 가장 흔한 것이었다.
석목은 채아를 불러 몇 마디 당부를 한 뒤, 다시 몸을 돌려 거처를 떠났다.
* * *
석목은 3호 산봉우리의 뒷산에서 눈앞의 동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동굴의 밖에는 크지 않은 건물 하나가 세워져 있었고, 주위에는 반들반들한 검은 돌만 있을 뿐 어떤 식물도 존재하지 않았다.
순간, 동굴의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덮쳐오자 체내의 진기가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바로 그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건물에서 걸어 나왔다.
“대사형님이셨군요. 단약 제련을 위한 곳과 법기 제작을 위한 곳 중 어느 지화옥(地火屋)을 원하십니까?”
검은 옷을 입은 사람이 예를 표하고 웃으며 말했다. 그는 스무 살 정도 되어 보이는 병급제자였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떤 방이든 상관없네.”
“지화옥은 흑염령으로 빌릴 수 있습니다. 흑염령 한 개에 을급제자는 사흘, 갑급제자는 칠 일 동안 사용할 수 있습니다.”
젊은 병급제자가 놀란 표정으로 설명했다.
석목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흑염령 세 개를 건넸다.
병급제자는 흑염령을 받고 품속에서 붉은색 영패와 두꺼운 검은 붓을 꺼냈다.
그가 검은 붓으로 붉은 영패를 몇 번 찍었다. 그러자 영패에서 빛이 반짝이더니 한쪽 면에 숫자 ‘21’이 떠올랐다.
“대사형, 이것은 ‘정(丁)’호 방의 영패입니다. 단약제련을 위한 지화옥이지요. 방에 들어간 뒤 이십일 일이 지나면 방 안의 진법이 자동으로 멈출 겁니다.”
병급제자가 자세히 설명했다.
석목은 영패를 받아들고 뒤집어보았다. 뒷면에 ‘정’자가 커다랗게 적혀 있었다.
이어 그는 병급제자를 향해 살짝 웃어보인 뒤 고개를 끄덕이며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동굴에 들어서자 일 장 너비의 통로가 나타났다. 통로의 양측에 일정한 간격으로 꽂혀 있는 횃불이 동굴 안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석목은 통로를 따라 앞으로 걸어갔다.
일 각 후, 석목은 반원형의 공간에 들어섰다. 그곳에는 열 개가 넘는 방이 있었으며 방문에는 모두 글자가 적혀 있었다. 그곳의 온도는 동굴 입구보다 훨씬 높아서 석목의 온몸은 이미 땀에 젖은 상태였다.
‘정’호 방 입구에 도착한 석목이 영패를 가져다 댔다. 영패에서 쏘아져 나온 붉은 빛이 방문을 비추자, 문에 새겨진 부문이 반짝이며 방문이 열렸다.
이어 석목이 방 안으로 들어가자 등 뒤의 방문이 저절로 닫혔다.
방에는 중앙에 놓인 소박한 모양의 단로(丹炉)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족히 십 장 가까운 높이의 천장에는 지붕창이 하나 열려 있었는데, 그곳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그 방을 비추는 유일한 빛이었다.
석목이 방에 들어 온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단로 아래가 붉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러자 복잡해 보이는 진법에서 강력한 지화영력(地火灵力)이 뿜어져 나왔다.
이때 석목은 공기 중에 만연해 있는 화속성 원소를 느끼며 단로 옆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방의 온도가 어느 정도 올라가자 석목은 상의를 벗고 단로 옆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는 적원화경의 가장 앞 세 단계를 떠올렸다. 적홍색의 작은 원숭이가 화염 속에서 탄생하는 장면이 머릿속에 생생하게 떠올랐다.
잠시 후, 석목은 진묘계에서 집양단을 한 알 꺼내먹고, 적원화경에 기록된 법결을 따라 수련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조금씩 흐를수록 석목의 정신이 주위의 모든 것과 공명하기 시작했다.
허공에 작은 붉은 빛의 점들이 점점 나타났다. 그 점들은 신비한 힘의 작용을 받아 석목을 향해 모여들었다. 붉은색 열기가 그의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하자 온도가 견디기 힘들 정도로 급격히 상승했다. 석목은 피부가 점점 빨갛게 달아오르며 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이어 선회하는 열기 속의 붉은 점들은 석목의 피부에 닿는 순간 뜨거운 기운으로 변해 체내에 흡수되어 경맥을 따라 흘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석목의 주위로 점점 더 많은 붉은 빛의 점이 모여들어 그의 몸을 완전히 둘러쌌다. 그러자 더 이상 뜨겁지 않았고 오히려 청량하고 편안한 감각이 느껴졌다.
그렇게 그의 체내에 흡수되어 경맥을 흐르던 기운은 새빨간 진기로 변해 단전 속으로 모여들었다.
* * *
순식간에 열흘이 넘게 흘렀다.
갑자기 정호 지화옥 안에 원숭이의 그것과 비슷한 울음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동시에 모든 지하 공간의 공기가 진동하며 천장의 암석 틈에서 돌조각과 먼지가 떨어져 내렸다.
한편, 정호 지화옥에 있는 석목은 흥분 가득한 표정으로 단로 옆에 서 있었다. 그는 적원화경의 전반 6단계 수련을 이토록 순조롭게 마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사실 곰곰히 생각해보면 이상할 것도 없었다. 후천 대원만의 경지에 오른 그는 이미 필요한 만큼의 진기를 채내에 지니고 있었기에, 그것을 축적하는 지루한 수련 과정을 생략할 수 있었던 것이다.
또한, 석목은 원래 화속성 원소에 대한 2단계의 친화력을 지니고 있었고, 과거 천음차녀에게 치료를 받을 때 복용했던 현목혈백단으로 인해 친화력이 3단계까지 올랐다. 화속성 원소 친화력이 높으니 그 앞 단계의 심법을 수련하는 것이 순조로울 수밖에 없었다.
이제 석목은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단로의 옆에서도 조금도 뜨거움을 느끼지 않았다. 화속성 원소에 대한 친화력은 수련을 시작하기 전보다 육 할 가량 올라 있었다.
“아무래도 이 심법은 화속성 원소 친화력을 높여주는 것인가 보군.”
석목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어서 그는 체내의 진기를 단전에서 끌어올려 사지로 퍼트렸다.
석목이 오른발을 내딛으며 오른손을 앞으로 뻗자 주먹이 순식간에 붉은 빛으로 감싸였다.
쿵!
순간, 주먹이 공기를 때리며 커다란 소리와 함께 열기의 권풍이 몰아쳤다.
석목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공기 중의 화속성 원소가 더해지자 공격의 위력이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상승했다.
석목은 두 눈을 감고 주위의 농밀한 화속성 원소를 느껴보았다. 단전에 충만한 진기가 살짝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설마….”
두 눈을 뜬 석목은 무언가가 떠올랐는지 기쁜 표정이 되어 그 자리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그의 오른손에 끼워진 진묘계가 반짝이더니, 흰색 병과 푸른색 과일이 손에 나타났다. 바로 건원단과 청명과였다.
석목은 건원단이 들어있는 흰 병을 보며 잠시 주저했다. 그의 머릿속에 하얀 옷을 입은 여인이 떠올랐다,
잠시 뒤 석목은 결연한 표정이 되더니 건원단을 꺼내 한 입에 삼켜버렸다.
곧 따스한 기운이 뱃속에서 피어올랐다. 그 기운이 순식간에 몸속으로 퍼져나가면서 전신의 경맥과 단전에 찌릿찌릿하게 기분 좋은 감각이 전해졌다.
이어서 석목은 손에 들린 청명과를 몇 번에 나누어 깨끗하게 먹어치웠다.
그 순간, 차가운 기운이 순식간에 단전으로 밀어닥쳤다. 그 기운은 그의 진기를 둘러싼 채 움직임을 멈췄다.
석목은 남아 있는 집양단 몇 알을 한 입에 전부 털어 넣었다. 그리고 적원화경에 기록된 대로 단전에 기배의 형성을 시도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의 표정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단전에 모여 있던 진기가 격렬하게 들끓으면서, 복부에서 칼로 후비는 것 같은 강력한 고통이 느껴졌고, 전신의 경맥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르며 마치 무수한 개미가 갉아 먹는 듯한 고통이 엄습했다.
갑자기 몰려온 고통은 대력마원탈태결을 수련할 때보다도 훨씬 심했다.
석목은 진혼주를 외울 틈도 없이 두 눈 앞이 깜깜해지는 것을 느끼며 혼절해버렸다.
* * *
부드러운 햇살이 내리쬐며 생기가 넘쳐흐르고 있는 숲속.
하얀 원숭이와 회색 원숭이가 질풍과 같이 빠른 속도로 숲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두 원숭이는 나이는 어려 보였지만 숲의 지형에 상당히 익숙한 듯 보였다.
그들이 나무를 뛰어 넘는 움직임은 매우 빨라서, 마치 흰색과 회색의 그림자가 쭉 늘어지는 것 같았다.
순식간에 숲을 뚫고 나온 두 원숭이는 곧장 구름 위로 높게 솟은 산봉우리를 기어오르기 시작했다.
산길은 직각에 가까울 정도로 경사가 가팔랐지만, 두 원숭이는 손발을 동시에 사용해서 좌우로 뛰며 마치 평지를 걷듯 간단하게 올랐다.
산의 중턱에 다다르자, 푹신한 구름에 가려서 동서남북도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모호해졌다.
회색 원숭이의 움직임이 갈수록 느려졌다. 원숭이는 방향을 구분하기 어려운 듯, 주위를 둘러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안절부절 못했다.
바로 그때, 앞서가던 흰 원숭이가 움직임을 멈췄다. 그리고 어느새 금색으로 변한 두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어 흰 원숭이는 몸을 돌리더니 회색 원숭이에게 손짓을 했다. 그리고 어느 방향을 향해 질주하기 시작했고, 그 모습을 본 회색 원숭이도 망설임 없이 뒤를 쫓아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원숭이는 산 정상과 가까운 곳에 위치한 평지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굉장히 농밀한 운무가 퍼져 있었다.
두 원숭이는 즉시 옆에 있는 숲에 들어가 몸을 숨겼다.
그들 눈에는 깊숙한 곳에 있는 선과원(仙果园)이 희미하게 보였다.
상당히 넓은 선과원에는 거대한 과수가 빽빽하게 자라 있었는데, 그 위에 다양한 선과가 열려 있었다. 선과(仙果)는 모양과 색은 각양각색이었으며 아주 먹음직스러워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