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헤어지다
석목은 여정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수혼을 수집해왔다. 수혼은 연나를 위해서 필요하기도 했고, 자신의 토템을 강화시키는 것에도 필요했다.
석목의 이런 행동이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었다. 어차피 수혼은 그들에게 전혀 쓸모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백수수는 전웅의 조각난 몸을 보고 슬픔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백 사매, 죽음은 우리 종문 제자들에게는 언제나 함께하는 것이에요. 우선 마음을 진정시키고 전 사제를 안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막녕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자 백수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전웅을 안장한 후 이 괴수의 가죽을 벗겨오너라.”
금소채가 거대 호랑이의 시체를 가리키며 두 사람에게 지시했다.
“남은 물건들은 사제들이 모두 가져요.”
석목이 옆에서 말을 덧붙였다.
막녕과 백수수는 감격한 표정으로 석목을 바라보았다. 선천등급 호랑이 계열 괴수의 뼈와 피, 담 등은 모두 가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 * *
한밤 중, 휘영청 밝은 달빛이 마치 물이 흐르듯 흑석산맥에 쏟아지고 있었다.
석목은 하늘이 보이는 검은 바위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탄월식의 자세를 취하고 눈을 감자 그는 곧 꿈속으로 빠져들었다.
꿈속에 들어가자 평소와는 다른 낯선 환경이 그를 맞이했다.
그곳은 하늘까지 닿을 정도로 커다란 나무가 무성하게 자라 있는, 끝이 보이지 않는 원시림 속이었다.
숲속에는 자연의 기가 매우 짙게 깔려 있었으며, 나뭇잎에도 자연의 기가 응축된 물방울이 맺혀 있었다.
한 나뭇잎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떨어져, 나무 아래 입을 벌리고 있는 작은 털북숭이 괴수의 입으로 들어갔다.
이슬을 먹고 광택과 윤기가 더해진 괴수는 만족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석목은 놀란 표정으로 그 장면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흰 원숭이로 변한 자신은 숲속 공터에 서서 두 팔을 아래로 늘어뜨린 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거대한 백호를 흉흉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백호가 크게 포효하자 그 발 아래로 바람이 일어났다.
순간 백호는 마치 활을 떠난 화살처럼 빠르게 흰 원숭이를 향해 달려들었다.
단숨에 원숭이와 삼 장 정도 앞까지 거리를 좁힌 백호가 갑자기 뛰어오르며 두 앞발을 휘둘렀다. 백 개가 넘는 조영이 흰 원숭이의 머리 위를 덮었다.
흰 원숭이는 포효하며 두 팔을 휘둘렀다. 무수히 많은 권영(拳影)이 머리 위로 날아오는 공격들을 날려 보냈다.
권영과 조영이 충돌하며 일어난 강풍이 소용돌이를 일으키면서 주위의 돌과 흙을 말아 올렸다. 흙과 돌이 흩날리며 주위가 어두워졌고, 돌에 맞은 나무의 표면에는 기다란 흔적이 생겨났다.
잠시 후 권영에 밀려 조영의 기세가 점차 약해지기 시작했다. 백호는 공포에 질린 표정으로 몸을 돌려 달아나려 했다.
흰 원숭이는 요란스럽게 소리를 지르며 나는 듯이 빠른 움직임으로 백호의 뒤를 따라잡았다.
흰 원숭이가 오른팔을 뻗으려는 순간, 백호가 꼬리를 강하게 휘둘렀다.
그러나 흰 원숭이의 눈이 금빛으로 반짝였다. 순간 두 배 커진 원숭이의 오른팔이 호랑이의 꼬리를 정확하게 잡아챘다.
흰 원숭이가 꼬리를 잡은 두 팔을 강하게 끌어당기자 백호가 고통에 찬 울음소리를 내며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원숭이는 그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백호의 등 뒤로 뛰어올라갔고, 백호의 목 가죽을 강하게 잡고 두 다리를 오므렸다.
백호는 포효하며 숲속에서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했다.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다가 때때로 뛰어오르거나 급격하게 방향을 틀기도 했다.
하지만 무슨 짓을 해도 등 뒤에 올라탄 원숭이를 떨쳐낼 수 없었다.
원숭이는 마치 빠른 탈것에 올라타 희열을 느끼는 듯 흥분해서 꽥꽥 소리를 질렀다.
한 시진 후, 백호는 결국 원숭이를 떨쳐버리는 것을 포기하고 몸부림을 멈췄다.
그러자 흰 원숭이가 백호의 등 뒤에서 뛰어내렸다. 백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만, 공포에 찬 눈빛으로 원숭이를 바라볼 뿐 도망치려 하지는 않았다.
원숭이는 근처의 복숭아나무에 올라가더니 가장 큰 복숭아 두 개를 따서 한 개를 백호에게 건넸다. 백호는 머뭇거렸지만 원숭이가 집요하게 계속 권했다.
백호는 어쩔 수 없이 복숭아를 살짝 맛보았고, 아주 맛이 좋았는지 순식간에 전부 먹어치웠다.
그 뒤 백호는 복숭아가 더 먹고 싶었는지, 살가운 태도로 원숭이를 향해 울부짖었다.
원숭이는 손에 들고 있던 복숭아를 백호에게 주는 척 하다가 손을 뒤로 뺐다. 그 바람에 복숭아를 향해 뻗었던 백호의 앞발은 허공을 갈랐다.
원숭이는 그 모습을 보고 입을 벌려 크게 웃기 시작했다.
백호가 복숭아를 향해 다시 달려들었으나 원숭이는 번개같이 빠른 속도로 피했다.
두 괴수는 그렇게 숲속에서 쫓고 쫓기며 장난을 치고 놀기 시작했다.
꿈속에서 원숭이와 백호가 뛰노는 모습을 흥미진진하게 구경하던 석목은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지면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어째서 이런 꿈을 꾸었는지, 혹시 낮에 만난 호랑이 괴수와 관련이 있는 것인지 생각했다. 그러나 곧 머릿속에서 잡념을 떨쳐버리고, 두 눈을 감고 몸 상태를 점검해보았다.
잠시 후, 몸에 어떤 변화도 생기지 않은 것을 확인한 석목이 천천히 눈을 떴다.
두 달 후, 석목 일행은 드디어 흑석산맥의 끝자락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는 도중에도 여러 차례 괴수의 습격을 받았지만, 일전의 호랑이 괴수만큼 강력한 괴수는 없었기에 큰 어려움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끝이구나! 석두, 앞으로 얼마나 이동해야 야만족 황무지를 벗어날 수 있지? 이곳을 나가면 바로 씻을 테야.”
머지않은 곳에 언덕지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이자, 앞장서 걸어가던 금소채가 몸을 돌려 기지개를 피며 말했다.
“나도 어서 씻고 싶어!”
금소채의 어깨에 앉아 있던 채아도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외쳤다.
언젠가부터 채아는 금소채와 붙어 다녔고, 금소채는 석목을 석두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석목은 시끄러운 채아가 멀어진 덕분에 귓가가 조용해져서 좋았다.
“남서쪽으로 한 달 정도 걸어가서 습지를 통과하면 야만족의 영토를 벗어날 수 있어요.”
석목이 계속 걸으며 대답했다.
막녕과 백수수는 석목의 뒤에서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여정 동안 여러 차례 전투를 겪으며 상당히 가까워져 있었다.
“저게 뭐지?”
금소채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며 말했다.
바로 뒤이어 채아가 말했다.
“석 아무개가 흑마문에서 기다리겠습니다. 흑마문의 석 아무개라니, 설마 석두 너를 말하는 거야?”
그 말을 들은 석목은 놀란 얼굴로 그들이 가리킨 곳을 바라보았다.
수십 장 앞쪽에 있는 두 언덕 사이에 일 장 높이의 사각형 바위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아무래도 열사부족의 지계고수 찰고가 주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석목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뭐라고? 지계고수?”
금소채가 놀라서 물었다.
뒤따라오던 막녕과 백수수도 그 말을 듣고 크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상황이 급박하니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찰고가 찾는 것은 저입니다. 금 사숙은 막녕과 백수수를 데리고 가세요. 둘로 나뉘어 따로 움직입시다.”
석목은 빠르게 머리를 회전시키며 차분하게 말했다.
막녕과 백수수도 서로 눈을 한 번 마주치더니 몇 걸음 다가와 금소채에게 말을 건넸다.
“금 사숙, 우리의 목숨은 별 것 아니지만 사문의 임무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계고수는 우리가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닙니다.”
금소채는 멀리 있는 바위를 힐끔 보더니 두 제자에게 지시했다.
“나는 석 사제와 함께 그 찰고를 만나봐야겠으니 너희는 먼저 가거라. 나는 이제껏 살면서 누군가를 두려워해본 적이 없다.”
“금 사저, 막녕의 말대로 우리는 종문의 막중한 임무를 맡고 있습니다. 그 일은… 금 사저에게 부탁하겠습니다.”
석목은 평온한 표정으로 금소채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다면… 알겠다. 몸조심하고 나중에 다시 만나자.”
잠시 침묵다던 금소채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리고 막녕과 백수수를 데리고 다른 길로 향했다.
막녕과 백수수는 떠나기 전에 석목에게 인사를 했다. 막녕은 조금이라도 빨리 이곳을 떠나고 싶은지 초조한 표정이었고, 백수수는 석목에게 작은 소리로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다.
채아는 멀어져 가는 세 사람과 석목을 번갈아보다가 결국 석목의 어깨에 내려앉았다.
“채아, 무섭지 않아?”
석목이 물었다. 그러자 채아가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우리 건앵 일족은 절대로 전우를 버리고 도망가지 않아!”
석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남아봐야 아무런 쓸모가 없으니 역시 헤어지는 것이 좋겠어. 만약 석두 네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내가 꼭 복수할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해볼게.”
말을 마친 채아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려 했다.
그 순간 석목이 왼손에서 손가락 두께 정도 되는 빛의 사슬이 날아가 채아를 묶었다.
“주인, 이게 무슨 짓이야?”
채아가 우왕좌왕하며 꽥꽥 소리를 질렀다.
“채아, 넌 높게 날면 위험하지 않을 거야. 무언가 발견하면 바로 내게 알려줘.”
석목이 웃으며 말했다.
채아는 내키지 않았지만 결국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몸을 묶은 빛의 사슬이 흩어지자 채아는 두 날개를 움직여서 점점 높은 곳으로 날아 올라갔다.
잠시 후, 석목은 세 사람이 떠난 방향의 반대쪽으로 질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구불구불한 언덕길을 따라 이 각 정도 이동하다가 발걸음을 멈췄다.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각형 바위가 멀지 않은 곳에 보였기 때문이다.
석목은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이를 악물고 방향을 바꿔 질주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다른 방향으로 향해도 가는 곳마다 바위가 나타났다.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았다. 채아의 시야를 통해 보아도 특이한 점은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다.
석목은 결국 세 개의 언덕에 둘러싸인 평지에서 멈춰 섰다. 그리고 앞에 있는 사각형 바위를 바라보며 곤봉과 흑도를 뽑아 하나로 합쳤다.
그 순간, 등 뒤에서 차가운 살기가 느껴졌다.
가슴이 철렁해진 석목이 고개를 홱 돌렸다. 십 장 가량 떨어진 곳에 머리를 꽈배기처럼 길게 땋은 중년의 야만족이 서 있었다. 그의 차가운 연녹색 눈에는 마치 뱀의 눈처럼 가는 타원형의 동공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야만족의 시선을 받은 석목은 온 몸 깊숙한 곳까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야만족이 주는 압박감은 흑마문의 대장로와 비교하면 조금 약했지만, 그 역시 지계의 존재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귀하는 누구입니까?”
석목이 무표정한 얼굴로 물었다.
“나더러 너를 찾아오라 하지 않았더냐? 그래서 내가 왔다.”
중년의 야만족이 대답하며 손을 흔들자 그의 손에 푸른색 채찍이 나타났다.
“귀하가 찰고로군요. 자자한 명성은 오래전부터 들었습니다.”
석목이 두 손으로 운철흑도를 꽉 쥐고 팔을 살짝 들어 올리며 말했다.
“하하, 재미있구나! 어디 한번 덤벼 보거라. 네가 내 공격을 세 번만 받아낸다면 이 바위를 네 묘비로 세워주는 은혜를 베풀도록 하마.”
찰고가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두꺼운 덩굴 여덟 개가 그의 발아래 지면을 뚫고 나와 순식간에 몸을 옭아맸다.
석목은 덩굴이 땅을 뚫고 나오는 순간 찰고를 향해 뛰어들었다. 이어 그의 손에 들려 있는 운철흑도에서 눈부신 붉은 빛이 뿜어져 나왔다.
“권운(卷云)!”
석목이 크게 외치며 협도를 휘둘렀다.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는 협도가 허공에서 붉은 선을 그리며 덩굴에 얽힌 찰고의 몸을 향해 베어 들어갔다.
콰르릉!
검광이 폭발하면서 찰고의 몸이 활활 타오르는 화염에 휩싸였다.
하지만 석목은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그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고 뒤로 후퇴하며 주문을 외웠다.
그 사이 찰고의 몸 위로 활활 타오르던 화염이 꺼졌다.
찰고는 채찍을 가로로 뉘어 손에 들고 있었고, 그의 몸을 옭아맨 덩굴들은 토막이 나서 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