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선인강림
석목은 하늘의 두 선인을 보며 천천히 숨을 내뱉었다.
그의 현재 실력으로는 전혀 통천선교 교주의 상대가 되지 않았지만, 그의 기운은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두 눈을 감고 허공에 떠 있는 두 선인의 기운을 느껴보려던 석목은 다시 두 눈을 뜨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아무도 없는 것처럼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천 년 전 본좌는 육산왕조 마운종(摩云宗)의 평범한 무인이었다. 이후 종문에서 가르침을 받고 운 좋게 승선대회에 참여했고, 등선을 한 뒤 선계에 올라 현재의 성취를 이룰 수 있게 되었다. 이곳에 모인 수많은 후배 중에는 자질이 우수한 사람들이 상당히 많구나. 열심히 수련에 매진한다면 너희도 선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보라색 옷을 입은 사내가 천천히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비록 크지 않았지만, 광장의 사람들뿐만 아니라 천우성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었다.
“예!”
승선대회에 참여하는 제자들의 가슴 속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끓어올랐다.
눈앞의 선인들 역시 과거에는 자신들과 같았으니, 이곳에 있는 모두에게 기회가 있는 것이다.
이후 선인이 되어 선계에 오르면 손짓 한 번으로 산을 옮기고 바다를 메꿀 수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가!
광장에 있는 사람들 중, 소매에 붉은 꽃이 수놓아진 보라색 옷을 입은 두 어린 제자가 격양된 듯 두 손을 떨었다.
“주 선인, 설마 홍아를 데리고 선계로 가려는 것입니까?”
무진도인이 남자아이에게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인간은 선인과 다르니, 아무리 나라고 해도 이 아이를 선계로 데려갈 수는 없다. 등선한 이후로 가문이 점차 몰락해 이 아이 하나만 남았을 줄은 몰랐구나.”
보라색 옷을 입은 선인이 탄식하며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반드시 그 아이를 잘 키우겠습니다. 몸이 연약해 수련을 시키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평생 영화를 누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다. 그렇게 말하니 이 아이를 이곳에 두고도 안심할 수 있겠구나.”
보라색 옷을 입은 선인은 고개를 끄덕인 후 남자아이에게 작은 소리로 몇 마디를 건넸다. 그리고 잠시 무언가 생각하더니 약병을 하나 꺼내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남자아이는 눈앞에 있는 자신의 선조가 낯선 듯 입을 열지 않고 고개만 끄덕였다.
보라색 옷을 입은 선인이 살짝 한숨을 내뱉으며 손을 흔들자, 남자아이는 허공에 떠올라 무진도인의 옆으로 날아갔다.
아이를 받아 든 무진도인이 눈앞에서 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아이는 눈을 감고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두 분 선인께서 인간계로 내려오느라 고생하셨으니, 이곳에 조금 더 머물면서 이번 승선대회를 참관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무진도인이 요청했다.
“괜찮다. 선계의 임무가 있어 인간계를 순시해야 하니 그렇게 오래 머물 시간이 없다. 인연이 된다면 다시 보세나.”
백발의 노인이 불자를 들자 두 사람 아래의 구름이 눈부시게 반짝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구름이 진동을 하더니 곧 먼 곳의 하늘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다.
구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모두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늘에서 들려오던 풍악소리도 두 사람이 떠나자 천천히 사라졌다.
하늘은 잠잠해졌지만 광장에 있는 이들의 가슴은 여전히 격정에 차 불타오르고 있었다.
두 선인이 사라지자 무진도인이 몸을 돌려 큰 소리로 말했다.
“두 선인이 승선대전을 참관하지 않는 것은 아쉽게 됐다. 하지만 너희도 노력만 한다면 머지않아 선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예!”
광장에 있는 사람들이 대답소리가 하늘 끝까지 울려 퍼졌다.
석목은 두 선인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보며 묵묵히 서 있었다. 그 역시도 그들을 굉장히 동경하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종수는 석목에게 방해되지 않게 조용히 그를 바라보았다.
채아는 석목을 보고 무언가 말을 하려고 했으나, 종수를 한 번 보더니 결국 입을 닫았다.
광장 바깥의 고관과 세력가들 역시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문관들은 삼삼오오 모여 선인의 강림으로 감격한 마음을 시로 표출하거나 토론을 하거나 했다.
무관들은 옷소매를 걷어붙이고 어떻게 하면 자신의 자녀를 종문에 보낼 수 있을지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람들의 눈에 띠지 않는 구석에는 삿갓으로 얼굴 대부분을 가린 날씬한 남자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유안이었다.
그는 주위의 사람들과 다르게 전혀 격양된 기색이 없이 침착한 표정이었다. 지금 그곳에는 도무지 잘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흥분에 찬 사람들은 누구도 그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한참 후 시선을 거둔 유안은 제단 위에 있는 무진도인을 한 번 바라보고, 몸을 돌려 빠르게 광장 밖으로 걸어갔다.
이어 육산왕조의 왕이 한 차례 연설을 한 뒤 영선대회의 종료를 선포했다. 석목과 종수 역시 인파에 섞여 광장을 떠났다.
하산한 두 사람은 성의 서쪽 구역의 거리를 걷는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참 후 격양된 마음을 가라앉힌 석목은 다시 서문설의 얼굴을 떠올렸다.
“종수…. 수아, 오늘은 함께 해줘서 고마웠어.”
석목이 곁에 있는 종수를 보며 말했다.
“오라버니가 원한다면 저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어요.”
종수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석목은 속으로 조금 감동했다.
“수아, 나는….”
“오라버니, 저도 알아요. 오라버니는 저와 같은 보통사람이 아니에요. 저는 오라버니가 언젠가 분명 선인이 되어 선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요.”
종수가 석목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수아도 봉음혈맥을 가져서 자질이 뛰어나니 이번 대회에서 분명 두각을 나타낼 거야. 마지막에 선계에 오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될 가능성도 있겠지.”
석목의 말에 종수가 웃었다. 하지만 그녀의 웃음에는 씁쓸함이 담겨 있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좀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석두, 나중에 정말 선계에 갈 생각이야?”
채아가 석목을 보며 물었다.
“맞아.”
석목이 이제껏 없었던 확고한 말투로 대답했다.
“그때가 되면 나도 꼭 데리고 가야 해. 나도 선계가 굉장히 궁금하니까.”
채아가 말했다.
석목은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나가자 어느 골목에서 유안이 나왔다. 그는 석목의 뒷모습을 보다가 곧 모습을 감추었다.
* * *
사흘 후, 심야의 한 객잔.
석목은 뒷짐을 지고 불안한 듯 방안을 오가고 있었다.
그는 며칠간 서문설을 만나기 위해 몇 번씩이나 성의 서쪽 구역에 위치한 통천선교의 분교에 찾아갔다. 그러나 그때마다 소득 없이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입구를 지키는 통천선교의 제자는 석목의 말을 전해주려 하지 않았다. 게다가 영선대회 이후로 경비가 더욱 삼엄해져 몰래 잠입을 하려던 계획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똑똑똑!
그때 갑자기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금 사저!”
문을 연 석목은 순간 놀라서 멍해졌다.
문 앞에는 풍만한 몸매를 돋보이게 하는 금색 옷을 입고, 피부가 뽀얀 매혹적인 여인이 서 있었다.
그녀는 바로 금소채였다.
“누님, 어쩜 갈수록 예뻐지는군요!”
어느새 날아온 채아가 금소채의 어깨에 앉으며 말했다.
“이런 아첨꾼 같으니.”
금소채는 문 앞에 서서 채아에게 농담조로 말하며 견과를 몇 개 꺼내주었다.
“역시 금 아가씨는 석목처럼 속이 좁지 않아서 좋아요.”
채아는 두 눈을 빛내며 순식간에 견과를 전부 먹어치웠다.
“석 사제, 찰고에게서 도망치다니, 역시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금소채가 그제야 석목을 보며 말했다.
“운이 좋지 않았다면 사저를 더는 못 볼 뻔했어요. 사저가 저를 찾아 온 것은 혹시….”
“맞아.”
금소채가 말했다.
“그녀는 어디에 있죠?”
석목이 앞으로 한 걸음 다가가며 물었다.
“그녀를 보고 싶다면 당장 따라와.”
금소채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돌려 객잔 밖으로 걸어 나갔다.
“당장 따라… 아얏!”
채아는 그녀의 말을 따라하려다 금소채에게 딱밤을 맞고 조용해졌다.
석목은 금소채의 뒤를 따라 객잔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사람은 통천선교의 분교 앞에 도착했다. 파란 도복을 입을 여덟 사람이 문을 지키고 있었으며, 주위로 가끔 사람이 지나다녔다.
금소채는 문 앞으로 다가가 그곳을 지키는 제자에게 무언가 말했다. 그러자 제자 중 한 명이 곧바로 산 위로 달려갔다.
이 각 후, 그 제자가 다시 달려 내려오더니 금소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금소채와 석목은 즉시 산 위로 걸어 올라갔다.
문을 지난 금소채가 익숙한 듯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몇 개의 건물 사이를 이리저리 지난 그들은 곧 어느 작은 정원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전혀 망설임 없이 걸어가서 정원의 문 앞에 멈춰 섰다.
금소채가 주저하다가 말했다.
“난 들어가지 않겠어. 우리의 약속을 잊지 마.”
석목은 고개를 끄덕이며 금소채의 어깨에 있는 채아를 한 번 보았다. 그리고 홀로 정원 안으로 들어갔다.
석목은 정원의 문 바로 맞은편에 있는 방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즉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벽에는 계란만한 크기의 야광석(夜光石) 여러 개가 걸려 있었다. 그것들은 부드럽고 밝은 빛을 뿜어내 방 안을 밝히고 있었다.
방의 우측에는 통로가 하나 있었으며, 중간에는 갈색 원형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다. 탁자 위에는 하얀 다기가 있었고, 그 옆에는 아름답게 조각된 갈색 의자가 네 개 놓여 있었다.
바로 그때, 통로 멀리서 천음차녀 서문설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은 무슨 재미있는 것을 가지고 왔어?”
석목은 그 목소리를 듣고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통로 방향을 바라보았다.
곧 흰 옷을 입은 서문설이 통로에서 걸어 나왔다.
그녀의 피부는 하얗고 두 뺨은 붉었으며, 허리는 줄로 묶은 것처럼 가늘었다. 검고 긴 머리카락은 어깨를 지나 폭포처럼 허리까지 늘어져 있었다. 두 눈은 방안의 빛을 받아 마치 별과 같이 반짝였다.
방 안으로 들어온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었다.
“석목, 네가 어떻게….”
그녀는 석목을 바라보며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지었다.
“어서 앉아. 금 사저는?”
서문설은 탁자 위의 찻주전자를 들어 찻잔에 차를 따르며 물었다.
“금 사저의 부탁을 받고 혼자 만나러 왔어요.”
석목이 서문설을 바라보며 말했다.
“거기 서서 뭐해? 내가 직접 끓인 차니 앉아서 맛을 한번 봐.”
서문설이 석목에게 찻잔을 건네며 말했다.
“차가 아주 향긋하고 달콤하네요.”
찻잔을 받으며 자리에 앉은 석목은 향을 한 번 맡으며 칭찬했다.
“이 벽심차(碧沁茶)는 만롱산의 특산품이야. 원래는 금 사저를 위해 준비한 거야. 당시 어리고 작은 수련자였던 네가 몇 년 안 본 사이에 정말 기부를 형성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구나. 얼마 전 금 사저에게 그 얘기를 듣고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
서문설은 자신의 찻잔에도 차를 한 잔 따른 뒤 의자에 앉았다.
“저는….”
석목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분명 금 사저가 가르쳐 줬겠지. 내가 너보다 나이가 많으니 사저라고 부르면 돼. 아참, 어떻게 지계 토템용사의 손에서 벗어난 거야?”
서문설이 석목의 말을 끊고 화제를 돌리며 물었다.
“이번에 찰고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건 운이 좋아서 그랬을 뿐이에요. 다음에 그런 상대를 다시 만난다면 이렇게 운 좋게 도망칠 수는 없겠죠. 그러고 보니 과거에 설 사저가 두 번이나 구해주지 않았다면 저는 이미 백골이 되어 있었을 테니, 선천무인이 될 기회는 없었겠네요.”
석목이 말했다.
“그것도 하늘의 뜻인 거지. 네가 흑마문의 제자만 아니었다면 승선대전에 참가해 3위 안에 드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텐데….”
서문설이 말했다.
“설 사저, 좋아해요.”
석목은 서문설의 말을 끊고 그녀의 눈을 진지한 표정으로 바라보며 말했다.
“…날 잊어. 과거의 일도 함께. 이번 승선대전에서 나는 반드시 선택될 거야.”
서문설은 잠시 침묵하다가 담담하게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