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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계지문-174화 (174/916)

174화. 귀왕(鬼王) 현신

유안이 한 쪽 팔을 들자 칼날들은 사방에서 달려드는 사람들을 향해 날아갔고, 동시에 새로운 푸른색 칼날들이 나타났다.

쾅!

가장 먼저 도착한 거대한 보라색 도광이 수십 개의 바람의 칼날과 충돌하며 흩어져 사라졌다.

바로 뒤이어 도착한 각종 도광과 검영, 술법들은 허공을 뒤덮은 푸른색 칼날에 눈 깜짝할 사이에 파묻혀 사라졌다.

순간 구양륜은 포효를 하며 법상을 몸 앞에 가로로 뉘었다.

펑! 펑! 펑!

이어 폭발음이 연달아 울렸다.

법상과 푸른색 바람의 칼날이 연달아 충돌하며 일어난 폭발의 충격에 구양륜이 뒤로 밀려 날아갔다.

구양륜의 법상은 견고했다. 충격에 흔들리기는 했지만 어떻게든 공격을 버텨냈다.

하지만 유안을 향해 몸을 날린 이들은 달랐다. 유안의 공격은 그들이 이제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강력한 술법이었다.

“으악!”

순식간에 스무 명이 넘는 사람이 바람의 칼날에 썰려 조각이 났다.

푸른색 칼날의 속도는 매우 빨라 도저히 피할 틈이 없었고, 호신강기와 방어법기는 그 앞에서 종잇장과 다를 바 없었다.

바로 뒤이어 또 다시 비명소리가 연달아 울려 퍼졌다.

운 좋게 첫 번째 공격을 피해낸 사람들도 다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칼날에 휩쓸려 목숨을 잃었다.

그들의 피와 살이 아래에 있는 이들의 머리 위로 비 오듯 쏟아져 내렸다.

그러나 유안의 엄청난 술법을 보고 겁에 질린 이들은 그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비사, 나는 신경 쓰지 말고 가서 도와!”

가까스로 평정심을 되찾은 월예공주가 자신의 앞을 지키고 있는 검은 피부의 남자에게 말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일 척 길이의 정교한 곤봉이 나타났다. 그녀가 주문을 외우자 자신과 피부가 검은 남자, 그리고 주위의 호위기사와 시녀들의 몸에 은색 보호막이 생겨났다.

검은 피부의 남자는 잠시 침묵하다가 말했다.

“저의 사명은 공주님의 안전을 지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생사는 관여할 수 없습니다.”

월예공주가 다시 무언가 말하려 하는 순간, 핏빛 달 아래 있는 공간의 통로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회색 연기에 휩싸인 거대한 신영이 공간의 통로에서 걸어 나왔다. 그것은 키가 십 장이 넘는 거대한 괴물이었다.

그 괴물은 사람의 몸에 소의 머리가 달려 있는 모양을 하고 있었고, 몸에는 검은 털이 짧게 자라 있었다. 그 털은 아주 매끄러워서 사령생물 특유의 더럽고 추악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소머리 괴물의 머리에는 초승달 모양의 뿔이 두 개 자라 있었으며, 두 눈은 새빨갰다. 괴물은 자신의 키와 거의 차이가 나지 않는 거대한 뼈도끼를 들고 있었는데, 그 표면에는 심오해 보이는 무늬가 가득 그려져 있었다.

괴물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은 유안의 것보다도 훨씬 무시무시했다.

그 모습을 본 구양륜이 기겁을 했다.

“나…나천귀왕(罗天鬼王)!”

월예공주의 곁에 있던 남자의 표정 역시 급격하게 어두워졌다. 그는 호위와 시녀는 내버려 둔 채 월예공주를 안아들고 아래의 출구를 향해 도주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나천귀왕이여, 독실한 명월교의 교도가 당신의 왕림을 맞이합니다!”

얼굴이 살짝 상기된 유안이 소머리 괴수에게 허리 숙여 예를 표했다.

“인간 꼬마야, 동방승천 늙은이와는 무슨 관계지?”

나천귀왕은 유안을 한 번 보더니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물었다.

“동방승천은 제 스승님입니다.”

유안이 대답했다.

“그는 과거에 본좌를 소환할 때마다 수많은 생명을 제물로 바치기로 계약을 맺었다.”

“귀왕 어르신, 이곳은 육산왕조의 수도입니다. 인구가 천만 명은 족히 되지요. 그들 모두 어르신에게 드리는 제물이니 마음껏 즐기시기 바랍니다.”

유안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나천귀왕이 두 눈을 붉게 빛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천만 명이라니, 좋구나!”

다음 순간, 나천귀왕은 오른쪽 다리를 들어 올려 지면을 거세게 내려 밟았다.

쿵!

귀청이 떨어질 정도로 거대한 소리가 울렸다.

딱딱했던 지면이 파이며 주위가 진흙으로 변한 것처럼 파도쳤다.

진동은 눈 깜짝할 사이에 보광각 전체를 뒤덮었다. 보광각 내부는 순식간에 쑥대밭이 되었으며, 안에 있던 이들 대부분은 바닥에 쓰러졌다.

선천 이하의 경지에 있는 이들은 얼굴의 모든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즉사했고, 나천귀왕과 가까이 있던 이들은 전신이 다진 고기처럼 되어버렸다.

선천경지 이상인 이들은 가까스로 죽음은 면했지만, 그들 역시 대부분 입에서 피를 뿜으며 기절해버렸다.

나천귀왕은 도끼를 쥐지 않은 다른 손을 들었다. 그러자 전신을 감돌고 있는 회색 연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서 방금 죽은 시체들을 휩쓸었다.

연기에 휩쓸린 시체들은 허공에서 폭발하더니 피안개로 변해 나천귀왕의 앞에 모여들었고, 빠르게 회전하며 구(球)의 모양을 형성했다.

나천귀왕이 입을 크게 벌리자 핏빛 안개의 구는 그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좋다, 좋구나! 이렇게 신선한 피는 정말 오랜만에 맛보는구나!”

나천귀왕이 우레와 같은 목소리로 크게 웃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웃음소리가 갑자기 멈췄다.

두 사람이 쓰러지지 않은 채 각각 다른 두 개의 출구로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천오상회의 장로 구양륜이었고, 다른 하나는 기절한 월예공주를 안고 있는 검은 피부의 남자였다.

지계의 존재인 그 둘은 나천귀왕의 일격을 가까스로 견뎌냈지만, 충격을 받아 안색이 좋지는 않았다.

나천귀왕은 포효하며 거대한 도끼를 휘둘렀다. 엄청난 위압감이 실린 회색 도끼날의 잔영 두 개가 뻗어나갔다. 그것은 마치 순간이동이라도 한 것처럼 눈 깜짝할 사이에 두 사람의 바로 뒤에 당도했다.

구양륜은 절망이 가득한 표정으로 뒤돌아서 법상으로 몸 앞을 막으며, 동시에 들고 있던 도를 휘둘렀다.

다음 순간, 그의 몸 앞을 막은 법상이 큰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들고 있던 도 역시 간단하게 두 동강이 났다.

그의 머리부터 가랑이 밑까지 한 가닥의 혈흔이 나타났다. 이어 그의 몸이 절반으로 갈라지며 선혈이 사방으로 뿌려졌다.

회색 도끼날은 구양륜을 벤 후로도 여전한 기세로 바닥에 긴 도랑을 만들어냈다.

바닥에 기절해 있던 백여 명의 사람들은 불행하게도 그 파급에 휩쓸려 뼛조각 하나 남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중에는 신저광과 그의 일행도 포함되어 있었다.

또 하나의 회색 도끼날 역시 입구 근처까지 도망간 까만 피부의 남자를 순식간에 따라잡았다.

남자는 굳은 표정으로 흰색 부적을 하나 꺼내들었다.

눈부신 흰 빛이 그와 월예공주를 감싸는 순간, 회색 도끼날이 날아와 흰빛을 베었다.

곧 피가 튀며 빛 속에서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하얀 빛이 눈부시게 빛났다가 사그라지자 그 자리에 월예공주와 남자의 모습은 없었다. 누군가의 한쪽 팔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 순간, 나천귀왕의 뒤에 있는 공간의 통로가 진동하더니 사령생물들이 앞 다투어 쏟아져 나왔다.

강시와 괴수의 시체, 무기를 든 해골…. 순식간에 백 구가 넘는 기괴한 형태의 사령생물들이 쏟아져 나왔으며, 그 뒤로도 계속해서 사령생물의 대군이 따르고 있었다.

장내에서 숨이 붙어 있는 이들은 일부 선천의 경지에 오른 이들뿐이었고, 그마저도 대부분 혼절한 상태였다.

사령생물들은 생기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하는 듯했다. 그들은 나타나자마자 사방으로 흩어져서 전혀 저항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보광각은 피비린내가 가득한 도살장으로 전락했다.

핏빛 달 아래 허공에 떠서 그 광경을 바라보는 유안의 얼굴에는 흥분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그가 아래의 나천귀왕을 보며 은색 소매를 흔들자, 핏빛 화염이 그의 몸을 감싸고 한쪽 출구를 향해 날아갔다.

흥분한 나천귀왕은 포효하며 동그란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더니, 건물의 한 쪽 벽으로 다가가 도끼를 휘둘렀다.

쾅!

진법으로 단단하게 강화된 벽이 붕괴하며 커다란 구멍이 생겨났다.

나천귀왕은 마치 혼돈의 알을 깨고 나오는 반고(盘古)처럼 흙먼지를 뚫고 밖으로 나왔다.

보광각 근처의 거리에는 아직 도망가지 않고 남아 있는 무리들이 있었다. 그들은 나천귀왕의 거대한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흉포한 죽음의 기운을 느끼고 소리를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났다.

“벌레 같은 것들, 죽어라!”

나천귀왕은 미친 듯이 웃으며 소리쳤다. 그가 들고 있는 도끼 표면에 새겨진 부문이 갑자기 빛나며 회색 부영(斧影:도끼형상)이 나타나 사방으로 날아갔다.

부영이 지나간 곳과 그 주위의 공간이 비틀리기 시작했고, 주위의 건축물은 부영과 닿는 순간 붕괴되어 먼지가 피어올랐다.

이어 나천귀왕이 다리를 들어 지면을 거세게 내려찍었다.

콰르릉!

보광각 안에서와 마찬가지로 주위로 파문이 번져나갔고, 주위 몇 백 장 이내의 모든 것이 파괴되며 일대가 순식간에 폐허로 변했고, 미처 도망가지 못한 수많은 사람이 그 아래 깔렸다.

시체들은 회색 연기에 의해 다시 커다란 핏빛 안개의 구로 변해 나천귀왕의 입으로 들어갔다.

“좋구나, 좋아!”

나천귀왕이 고개를 젖히며 소리를 질렀다.

* * *

보광각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거리의 건물 옥상, 석목이 눈을 금빛으로 반짝이며 나천귀왕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곳은 나천귀왕이 있는 곳과 멀리 떨어져서 피해를 입지 않았다.

채아는 석목의 어깨 위에서 온 몸을 떨며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린 채 한쪽 눈만 내밀고 있었다.

“석두, 어서 도망가자….”

석목은 나천귀왕에게서 시선을 돌려서 성의 서쪽에 위치한 통천선교의 분교 방향을 바라보았다.

유안과 그의 일행 넷은 보광각의 옥상에서 지옥처럼 변해버린 거리 광경을 흥분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스승님, 여기 수많은 생명을 보내니 편히 쉬십시오!”

유안이 바람에 붉은 장발을 흩날리며 허공을 향해 절을 했다.

다른 네 명 역시 그를 따라 함께 절했다.

바로 그 순간, 천우성의 서쪽에서 여러 개의 밝은 빛이 나타났다. 그 빛들은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날아오기 시작했다.

“대사형, 통천선교 사람들입니다!”

면사포로 얼굴을 가린 여인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유안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무진이 가만히 있지를 못하는군…. 계획대로 이곳은 너희에게 맡기겠다.”

이어 그는 핏빛 화염에 감싸인 채로 떠올라 나천귀왕에게 날아갔다.

여인은 그런 유안을 복잡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어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옆에 있는 세 사람에게 말했다.

“시작하죠.”

네 사람은 옥상 아래로 뛰어내려 보광각 안으로 들어갔다.

핏빛 달 아래 공간의 통로에서는 여전히 사령생물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실내에는 이제 살아 있는 자가 한 명도 없었다. 그러자 살육에 목마른 사령생물들은 네 개의 출구를 통해 밖으로 몰려나왔고, 일부는 나천귀왕이 만든 커다란 구멍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그것들은 안으로 들어온 네 명의 명월교의 교도에게는 전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얼굴을 가린 여인 일행은 즉시 해골들을 소환해서 장내의 시체를 한쪽 구석으로 옮겼다. 수천 구가 넘는 시체를 한 곳에 모으니 순식간에 시체의 산이 만들어졌다.

네 사람은 시체의 산을 둘러싸고 네 귀퉁이에 서서 숙연한 표정으로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순간 핏빛이 반짝이더니 네 사람의 몸 앞에 붉은색 영패가 나타났고, 동시에 이들의 몸에서 회색빛이 뿜어져 나왔다.

그 빛은 점점 밝아지며 하나로 연결됐고, 거대한 회색 진법을 이루어 시체를 감쌌다.

얼굴을 가린 여인이 주문을 외우는 동시에 한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부문 한 개가 날아가서 붉은 영패 안으로 흡수됐다. 다른 세 명 역시 같은 동작을 취했다.

화르륵!

진법 속에 있는 시체의 산에서 핏빛 화염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화염 속의 시체들은 마치 불에 녹듯이 허공 속으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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