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희생과 도주
공간의 통로는 완벽하게 굳은 것은 아니었다. 천위의 강자인 나천귀왕이 조금만 시간을 들인다면 곧 해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간 동안 스산한 표정의 무진도인이 어느새 그의 곁에 다가왔다. 그의 검이 푸른빛을 뿜어내더니 십 장이 넘는 거대한 검으로 변해 나천귀왕을 내려베었다.
격노한 나천귀왕의 몸에서 검은 빛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집채만 한 크기의 거대한 소 모습을 한 법상이 나타나 그의 앞을 막았다.
하지만 법상은 무진도인의 공격 앞에서는 종잇장차럼 쉽게 찢어졌다.
싹둑!
나천귀왕의 몸이 거대한 검에 힘없이 두 동강이 나며 쓰러졌다.
바로 그 순간, 검은 연기가 나천귀왕의 시체에서 솟아나왔다. 연기 사이로 보이는 작은 나천귀왕의 그림자가 원한에 찬 눈빛으로 무진도인을 노려보았다.
검은 연기는 잠시 반짝이더니 곧 허공에서 사라졌다.
“안타깝게도 완전히 소멸시키지는 못했구나….”
무진도인이 말했다. 그 사이에 거대한 검은 반짝이더니 빠르게 작아져 원래 크기로 돌아왔다.
무진도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법보를 연달아 발동시키는 것은 그에게도 상당한 무리였던 것 같았다.
하지만 그는 숨을 한 번 깊게 들이마시더니 곧장 폐허가 된 보광각의 방향으로 달려갔다.
한편 유안은 보광각의 상공으로 빠르게 날아가 소리쳤다.
“흩어져라!”
그가 손을 휘두르자 한 줄기 검은 빛이 핏빛 달 아래 공간의 통로에 흡수됐다. 그러자 공간의 통로가 갑자기 흔들리더니 천천히 닫히기 시작했다.
유안은 어느새 손에 검은색 부적을 들고 있었다.
다음 순간, 그의 옆에 있는 공간에 검은색 부문이 무수히 떠올라 회전하며 육각형 진법이 생겨났다. 심오해 보이는 무늬가 미미하게 반짝이는 진법은 강력한 공간의 파동을 뿜어냈다.
얼굴을 가린 여인과 다른 세 사람도 그곳의 전황을 봤기 때문에 망설임 없이 진법을 향해 내달렸다.
“어딜 도망가느냐!”
무진도인의 분노한 외침과 함께 하얀 도장이 허공에 하얀 궤적을 그리며 빠르게 다가왔다.
그 순간, 하얀 도장 아래에 거대한 부문이 나타나는 것과 동시에 흰색 빛이 확산되어 무너진 보광각 전체를 뒤덮었다.
이어 흰 빛에 뒤덮인 공간의 공기가 끈적끈적하게 변하더니 검은색 진법이 천천히 작동을 멈추기 시작했다.
이를 본 유안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진도인의 강력함은 그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다. 천위의 실력을 가진 나천귀왕마저 그에게 당했으니, 만약 당장 도주하지 못한다면 다섯 사람이 살아남을 가능성은 전혀 없었다.
그때 유안의 귀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의 신선한 피로 명주(冥主)께 제사를 올리겠습니다….”
유안은 목소리가 난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얼굴을 가린 여인이 어느새 하늘로 솟아올라 하얀 도장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곧이어 그녀의 몸에서 회색 화염이 솟아오르더니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녀의 머리 뒤에서 일곱 개의 별이 밝게 빛나더니 그중 한 개가 폭발했다.
이어서 두 번째 별이 터졌다. 그리고 세 번째, 네 번째….
그녀는 별 일곱 개의 힘을 동시에 폭발시켰다.
그와 함께 생겨난 회색 연기가 그녀의 체내로 흡수됐다. 그러자 여인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법력의 파동이 이전의 몇 배 이상으로 급격히 강해졌다.
“요 사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멈춰!”
유안이 소리를 질렀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유안을 바라보며 입가에 살짝 미소를 지었다. 그 순간 그녀의 지팡이에서 상당히 두꺼운 회색빛의 기둥이 쏘아져 나갔다.
회색빛의 기둥은 하얀 도장과 거세게 충돌했고, 하얀 도장은 맹렬하게 흔들리며 뿜어내는 하얀 빛이 떨리기 시작했지만, 사라지지는 않았다.
“끝없는 어둠 속에서 영생을 얻을 것입니다.”
은발의 청년과 키 작은 남자가 여인의 뒤를 이어 별의 환영을 전부 폭발시켰다.
다시 두 줄기의 회색빛 기둥이 솟아올라 하얀 도장을 가격했다.
바로 그때, 전신에 털이 길게 자란 검푸른 신영이 하얀 도장 가까이에 나타났다. 붉은 얼굴의 사내였다.
그는 양손을 깍지 낀 채 하얀 도장을 힘껏 쳤다.
쾅!
도장이 격렬하게 떨리더니 결국 뿜어내던 빛이 흩어져 사라졌다.
하지만 붉은 얼굴의 사내 역시 법보의 반탄지력에 의해 튕겨져 날아가 기운이 빠르게 약해졌다.
얼굴을 가린 여인과 다른 두 사람 역시 힘없이 아래로 추락했다.
허공을 가득 메웠던 하얀 빛이 사라지자 검은색 진법은 기능을 회복했고, 진법에서 검은 빛이 솟더니 유안을 감싸고 한 번 반짝인 뒤 사라졌다.
곧 무진도인이 현장에 도착했지만 이미 유안은 사라진 뒤였다.
무진도인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시선을 돌렸다. 그는 얼굴을 가린 여인과 세 사람을 바라보았다.
네 사람은 이미 기운이 극도로 쇠약해져 바닥에 쓰러진 채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 * *
먼 곳 건물 옥상에서 모든 걸 지켜보던 석목의 눈은 원래의 색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의 눈에는 격앙된 감정이 가득 찬 상태였다. 두 천위의 격전이 그의 피를 끓어오르게 한 것이다.
석목은 폐허가 된 보광각 쪽을 한 번 바라본 후, 건물 아래로 뛰어 내려가 먼 곳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 * *
천우성 명교의 오래된 저택의 지하 공간.
그곳에서는 붉은 옷을 입은 여인이 검은색 전송진법 옆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땀을 뻘뻘 흘리고 있었다.
검은 진법의 중심에는 유안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그는 마치 돌기둥처럼 가만히 서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서 있던 유안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눈을 날카롭게 빛내며 밖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멈춰요!”
여인의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쳤다.
“지금 죽으러 가겠다는 것입니까?”
그러나 유안은 발걸음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걸어갔다.
“모두가 목숨을 바쳐 구해낸 목숨입니다. 그들의 희생을 헛짓으로 만들어버릴 셈인가요?”
여인이 유안의 앞을 가로막으며 말했다.
유안은 몸을 떨더니 발걸음을 멈췄다.
“우리 중 사형의 자질이 가장 뛰어나니, 사형만 살아남으면 다시 한 번 통천선교와 맞붙을 수 있어요. 스승님이 임종 전에 하신 말씀을 잊지 마세요.”
여인이 말했다.
스승님이라는 말을 듣자 유안은 몸을 떨더니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럼에도 나가겠다면 죽든 살든 상관없으니 저도 함께 가겠어요.”
여인은 그 말을 하며 눈물을 흘렸다.
“아….”
유안은 갑자기 고개를 젖히고 울부짖기 시작했다.
여인은 앞으로 다가가 유안을 가볍게 안았다.
한참 후, 유안은 겨우 평정심을 되찾았다.
“대사형, 이곳은 포기하고 어서 출발하는 것이 좋겠어요.”
여인이 말했다.
유안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 * *
석목은 차분한 표정으로 성의 북쪽을 향해 빠르게 이동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앞쪽 멀리서 소란스러운 비명소리가 들려오더니 사람들이 새까맣게 몰려오기 시작했다.
길가의 보행자, 말과 마차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혼비백산해서 이리저리 달아나는 중이었다. 사람들의 혼란은 먼 곳에서부터 점차 가까이로 전염되고 있었다.
“어서 도망가! 저쪽에 강시가 있다!”
“괴…괴물이 사람을 죽인다!”
“해골! 온 사방에 해골이 있어!”
혼란에 빠진 사람들 너머로 해골과 강시들의 모습이 석목의 눈에 들어왔다.
석목이 주문을 외우자 그의 주위에 하얀 구름이 나타났다. 그는 사람들의 놀란 시선을 받으며 하늘로 떠오르더니 성의 북쪽을 향해 날아갔다.
석목이 공중에서 바라보니 도와 창을 들고 있는 네 구의 해골, 그리고 두 구의 푸른 강시가 사람들을 쫓으며 죽이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것들이 지나온 거리에는 이미 열 구가 넘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그때 해골이 움직임이 느린 한 노인을 따라잡더니 날카로운 창으로 그의 등을 찌르자, 새빨간 피가 창을 따라 흘러내렸다.
해골은 창을 흔들어 노인의 시체를 길거리에 던져버린 뒤, 이번에는 분홍색 옷을 입은 임신부를 쫓아갔다.
순간 석목의 눈이 살기로 번득였다. 그가 운철흑도를 꺼내 쥐자 흑도가 즉시 빨갛게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석목은 아래를 조준하고 흑도를 거세게 휘둘렀다. 그러자 여섯 개의 붉은 도광이 해골과 강시들을 향해 각각 하나씩 날아갔다.
해골들은 즉시 움직임을 멈추고 붉을 도광을 향해 무기를 휘둘렀다.
쾅! 쾅!
붉은 도광은 도와 창을 순식간에 두 동강을 냈다. 그러고도 전혀 수그러들지 않은 기세로 네 해골의 몸을 위에서 아래로 갈라버렸다.
강시들 역시 붉은 도광이 지나가자 몸이 반으로 토막 나며 쓰러졌다.
석목은 구름을 타고 해골 위를 그대로 날아서 지나갔다.
자신들을 쫓던 사령생물이 죽자 사람들은 그제야 지쳐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그들은 구름을 타고 멀어져가는 석목의 뒷모습을 향해 절을 했다.
얼마 뒤 석목은 삼 층 건물 옥상에 착지해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다시 하얀 구름이 생겨나 그를 태우고 날아갔다.
석목이 다시 날아오르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쪽의 한 건물에서 초승달 모양의 검영이 공기를 가르며 날아왔다.
석목은 재빨리 주문을 외웠다. 그러자 그의 몸이 하얗게 반짝이더니 몸 앞에 은빛 방패가 생겨났다.
석목은 동시에 오른손으로 수인을 맺었고, 하얀 빛의 사슬이 빠른 속도로 날아가 건물에서 뛰쳐나온 해골기사의 몸을 단단히 묶었다.
이어 석목이 입을 벌리자 두꺼운 빛줄기가 번개처럼 쏘아져 나가 해골기사의 머리를 가격했다.
쾅!
해골기사의 머리가 산산조각나며 거대한 몸이 쓰러졌다.
석목은 공중에서 공격을 받자 어쩔 수 없이 바닥으로 내려왔다. 그가 상점 안을 살펴보니 몇몇 사람이 바닥에 납작 엎드려 있는 것이 보였다.
석목은 기운술을 더는 사용하지 않았다. 방금의 경험으로 허공을 날아다니면 타인의 시선을 쉽게 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석목은 도로를 따라 다시 북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일 각 후, 어느 길모퉁이에서 석목은 파란 옷을 입은 통천선교의 제자 네 명과 회색 강시가 격전을 벌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회색 강시가 두 손을 휘두르자 맞은편의 중년 남자가 검을 가로로 베어 막아냈다. 다른 세 제자도 각자의 무기를 휘둘러 강시들에게 조금씩 상처를 남겼다.
그러나 석목은 그들을 못 본 척하고 지나갔다.
하늘이 완전히 어두워졌을 무렵, 석목은 결국 북쪽 성벽에 도착했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그는 각종 사령생물과 도주하는 시민들을 만났고, 성 안의 무인과 술사들이 사령생물과 전투를 벌이는 장면도 여러 번 봤다.
그럴 때마다 석목은 직접 나서 사령생물들을 처치해 무고한 백성을 구했다. 그러나 통천선교의 장로나 제자가 현장에 있으면 즉시 도주했다. 통천선교에서 혼사를 금기시하고 있다는 사실을 유안에게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석목은 천마종에서 갈라져 나온 흑마문의 제자였다. 그는 천마종과 통천선교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것을 금소채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 성에 들어왔을 때부터 통천선교의 사람들을 경계하고 있었다.
큰 일이 일어난 직후이니만큼, 석목은 불필요한 문제에 얽히는 것을 피하기 위해 우선 천우성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석목은 북쪽 성벽 앞에서 서쪽 구역에 위치한 작은 산을 바라보았다.
그곳의 하늘과 건축물들은 전부 밝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잠시 후, 그곳에서 시선을 뗀 석목이 주문을 외우자, 하얀 구름이 나타나 그의 몸을 감싸고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성벽에서 경고음이 울리더니 성을 지키는 군관들이 그를 향해 무언가 부르짖었다.
석목은 그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은색 빛의 방패로 몸을 보호한 채 성 밖으로 유유히 날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