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변명의 여지가 없다
보광각 주위 백 장 이내는 전부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바닥에는 피가 강처럼 흘렀고, 수많은 사람과 강시의 시체, 해골의 잔해가 온 바닥에 널려서 마치 지옥 같은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
통천선교의 파란 옷을 입은 백발 노인이 허공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바로 통천선교의 교주 무진도인이었다.
그의 손에 들린 불자에서는 무수한 빛의 실이 뿜어져 나와 은색 단발의 청년을 단단히 묶고 있었다. 청년의 주위에는 붉은 피부의 사내와 얼굴을 가린 여인, 그리고 상인의 복장을 하고 있는 남자가 누워 있었다.
그들은 바로 유안의 사제와 사매였다.
세 사람의 몸에는 상처가 없었지만, 생명을 잃은 듯 전혀 생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무진도인의 주위에는 파란 옷을 입은 세 남자와 한 여인이 공경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먼 곳에서는 여전히 누군가가 죽고 죽이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이들은 들은 체 만 체 했다.
그중 한 사람은 뚱뚱하고 스산한 분위기를 풍기는, 도사보다는 장군이 어울릴 것 같은 남자였다. 다른 한 사람은 긴 수염을 기른, 기품 있고 세속을 초월한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남자였다.
마지막 남자는 외모가 뛰어나고 덩치가 장대했으며, 등에 검을 메고 있었다. 또 외모가 수려한 여인은 백옥으로 만들어진 불자를 들고 불상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무진도인이 손에 든 불자를 흔들었다. 그러자 은발 청년의 몸이 그의 앞까지 날아와 멈췄다.
청년은 원한에 찬 눈빛으로 무진도인을 노려보았지만, 무슨 금제에 걸렸는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진도인이 왼손을 뻗어 청년의 머리 위에 올렸고, 그의 손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청년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눈의 초점이 점점 흐릿해졌다.
잠시 후, 무진도인이 왼손을 거두었다.
여전히 불자에 묶여 있는 청년은 두 팔을 힘없이 늘어뜨리고 미동도 하지 않았다.
곧 무진도인의 불자에서 하얀 화염이 뿜어져 나와 청년의 몸을 완전히 태워 없애버렸다. 무진도인은 유안의 나머지 사제와 사매 세 사람의 시체도 같은 방법으로 전부 태워버렸다.
“스승님, 뭔가 유용한 정보를 얻으셨습니까?”
뚱뚱한 남자가 물었다.
그러나 무진도인은 침묵했다.
잠시 후, 네 사람은 무진도인에게 인사를 한 후 어딘가로 향했다.
* * *
천우성의 어느 객잔에 스무 명이 넘는 통천선교의 제자가 밀려들어왔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코가 크고 귀가 여섯 개 달린 개를 끌고 왔다.
객잔의 주인이 황급히 다가오자 일행의 선두인 뚱뚱한 남자가 몇 마디를 물었고, 곧바로 일행은 뒷마당으로 몰려갔다.
한 객실 앞에 도착하자 기이하게 생긴 개가 무슨 냄새를 맡았는지 미친 듯이 짖기 시작했다.
개를 끌고 온 제자가 휘파람을 불자 개가 돌연 객잔 밖으로 달려 나갔고, 이를 본 일행은 기뻐하며 황급히 개를 뒤쫓았다.
* * *
끝이 보이지 않는 대지에 푸른색과 노란색이 섞여 있는 들풀이 양탄자처럼 두껍게 깔려 있었다.
간간이 보이는 작은 연못은 파란 하늘 위를 천천히 떠다니는 하얀 구름을 비추고 있었다.
그때 한 회색 인영이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표범처럼 갑작스레 튀어 나왔다.
회색 옷을 입은 그 사람은 천우성에서 도망쳐 나온 석목이었다. 그는 성을 나선 이후 대진국에 위치한 천마종을 향해 계속 북쪽으로 질주했다.
바로 그때, 채아의 목소리가 그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석두, 누군가 쫓고 있는 것 같아.”
그 순간 눈앞에 금빛이 반짝이더니 석목의 머릿속에 어떤 장면이 떠올랐다.
하얀 말을 탄 통천선교의 제자들이 그가 방금 거쳐 온 연못을 지나서 그를 향해 질주해오고 있었다.
그중 가장 앞에 있는 통천선교 제자는 귀가 여섯 개 달린 추하게 생긴 개를 안고 있었다.
놀란 석목은 오른발로 지면을 찍고 방향을 틀었다.
반 시진 후, 그의 표정이 점차 무겁게 변했다.
석목은 그동안 몇 차례나 방향을 바꿨다. 그러나 통천선교의 도사들은 석목에게 실을 달아놓기라도 한 듯 금세 방향을 수정해 쫓아왔다.
석목은 상대가 자신을 놓치지 않고 쫓아올 수 있는 것은 십중팔구 그 개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석목은 체내의 진기를 끌어올렸다. 그러자 속도가 더욱 빨라져서 한 걸음에 일 장 가까이 이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하나같이 뛰어난 명마를 타고 있는 통천선교 무리를 떨쳐낼 수는 없었다. 게다가 장시간 고속으로 질주하는 바람에 상당한 진기를 소모했다.
잠시 후, 석목은 움직임을 멈추더니 자신이 달려온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스무 명이 넘는 통천선교의 제자들이 말을 타고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그중 우두머리로 보이는 뚱뚱한 도인이 갑자기 말에서 뛰어올랐다.
뚱뚱한 도인의 몸이 금빛으로 반짝이더니, 금색 갑옷과 투구를 착용하고 양손에 금색 망치를 든 사람 모양의 법상이 그의 뒤에 나타났다.
바로 그때, 석목의 가슴에서 사수흉망의 환영이 반짝이더니 몸에 검은 비늘이 솟아나와 갑옷처럼 그의 몸을 감쌌다.
그의 몸에서 풍기는 기운은 빠르게 강해져 순식간에 선천대원만의 경지까지 올랐으며, 붉은색과 검은색의 보호막 두 겹이 생겨났다.
동시에 그는 푸른색과 금색 두 장의 부장을 잽싸게 꺼냈다. 한 장은 삼수흉망의 가죽으로 제작한 금강부였으며, 다른 한 장은 평범한 경신부였다.
곧 얇은 푸른빛과 두꺼운 금빛이 보호막 위로 그의 몸을 감쌌고, 부적을 사용하는 동시에 그의 머리 뒤에 별이 하나 나타났다.
석목이 빠르게 주문을 외우자 은색 빛의 방패가 생겨나 그의 몸 앞을 보호했다.
석목은 미리 계획을 세워둔 듯, 머뭇거리지 않고 이 모든 동작을 단번에 행했다.
그때 금빛 갑옷을 입은 법상이 손을 휘둘렀다. 금색 망치가 그의 손을 떠나 석목에게 날아왔다.
석목의 손에는 어느새 빨갛게 타오르는 운철흑도가 쥐여 있었다. 그가 오른손을 휘두르자 반월 모양의 붉은 검광이 금빛 망치를 향해 날아갔다.
그와 동시에 석목은 옆으로 몸을 날렸다. 사수흉망의 힘에 경신부가 더해져 그의 움직임은 엄청나게 빨라진 상태였다.
쾅!
금빛 망치와 충돌한 붉은 도광이 즉시 파괴되어 사라졌고, 망치는 처음에 날아오던 속도 그대로 날아와서 금세 석목의 코앞까지 도달했다.
석목은 몸을 비틀었지만 금빛 망치가 그의 어깨에 닿았다.
그러자 그의 몸을 보호하고 있던 보호막이 전부 파괴됐다. 망치는 그의 몸을 둘러싼 비늘을 스치고 지나갔다.
석목은 약간의 통증을 느꼈지만, 비늘에 살짝 금이 간 것을 제외하고는 실질적으로 입은 손상은 없었다.
석목은 무리와 육 장 가량 떨어진 곳에 선 채 황급히 말했다.
“잠시 멈추십시오. 귀하는 분명 통천선교의 장로겠지요. 무슨 오해를 하고 계신 것이 아닌가요?”
그러자 뚱뚱한 도사가 의외라는 듯 석목을 쳐다보며 말했다.
“무공과 술법을 동시에 익혔으며 야만족의 토템술에도 정통하다니, 특이하구나. 하지만 이 몸을 만난 이상 얌전히 항복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유안의 행방만 말한다면 시체는 온전히 남겨 염불을 외워주마.”
뚱뚱한 남자가 석목을 향해 다가갔다. 그의 뒤에 있는 법상의 오른손에는 어느새 이전과 똑같은 금색 망치가 들려 있었다.
이어 다른 통천선교의 제자들이 각자 말에서 내려 석목을 포위했다.
“보아하니 정말 오해를 하고 있었나보군요. 저는 절대 명월교의 사람이 아닙니다. 유안은 길에서 우연히 만나 살짝 안면이 있는 정도이고, 행방 역시 알지 못합니다.”
석목은 그렇게 말하며 소매 속에 왼손을 넣어 은색 부적을 쥐었다.
“애송이가 말은 청산유수구나! 네놈을 잡으면 그 말이 진실인지 구분할 방법이 이 몸에게는 다 있다.”
뚱뚱한 남자가 말했다.
그와 동시에 그의 법상이 양손에 들고 있는 망치가 금빛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두 사람 사이에서 갑자기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 속에서 전신에 하얀 갑옷을 입고 투구를 쓴 연나가 걸어 나왔다. 연나에게서는 바다처럼 깊고 강력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갑자기 허공에 나타난 연나를 보고 놀란 석목이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역시 명월교의 잔당이 맞구나!”
남자의 법상이 연나를 향해 두 손에 들고 있던 금빛 망치를 던졌다.
그 순간, 연나의 몸이 검은빛으로 반짝이며 모습을 감췄다.
두 개의 망치는 연나가 서 있던 곳을 지나 먼 곳에 떨어지며 금빛 폭발을 일으켰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을 느낀 뚱뚱한 남자는 법상과 함께 뒤로 몸을 돌렸다. 그와 동시에 법상의 양손에는 다시 두 개의 금색 망치가 나타났다.
바로 그때, 그의 앞쪽에 검은 연기가 생겨나더니 그 안에서 하얀 화염에 뒤덮인 창이 빠르게 날아왔다.
법상은 두 개의 금색 망치로 박수를 치듯 양쪽에서 창을 동시에 찍었다.
쿵!
법상의 금색 망치는 창과 닿는 순간 빛의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하얀 화염에 뒤덮인 창은 조금도 줄지 않은 기세로 법상의 가슴을 찔렀다.
푹!
창은 법상의 몸에서 터져 나오는 금색 빛의 저항으로 인해 몸을 완전히 꿰뚫지 못하고 중간에 가로막혔다. 하지만 법상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었고, 몸의 빛도 상당히 어두워졌다.
그 사이 뚱뚱한 남자의 손에는 조그마한 부문이 가득 새겨진 금전검(金钱剑)이 들려 있었다.
금전검의 검신은 무척이나 뜨거운 금색 화염을 뿜어내고 있었고, 강력한 법력의 파동이 마치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뚱뚱한 남자가 손을 들자 금색 화염이 타오르는 금전검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순식간에 문짝만 하게 커진 금전검은 하늘을 갈라버릴 것 같은 기세로 연나의 머리를 향해 베어 내려갔다.
연나는 빠르게 창을 거두어들인 뒤 검은 연기에 휩싸여 모습을 감췄다. 그리고 곧바로 뚱뚱한 남자의 옆에 다시 나타났다.
그런데 연나가 미처 공격하기도 전에, 그림자처럼 따라온 금색 검이 연나를 내려 베었다.
연나의 몸은 검은 연기에 휩싸여 공기 중으로 사라졌고, 그 바람에 금색 검은 다시 한 번 허공을 베었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석목은 깜짝 놀랐다.
“영기!”
천우성에 머무는 동안 석목은 영기에 관한 정보를 많이 얻었다.
영기는 특별한 재료로 만든 특수한 법기로서, 법기와 다른 점은 체내에 담아두고 영성(灵性)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적과 싸울 때 정신력을 이용하면 법기를 몸 밖으로 꺼내 자신의 팔처럼 자유자재로 사용할 수 있었다. 한마디로 말해 팔이 하나 늘어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하지만 영기에 사용되는 재료는 굉장히 희소해서 구하고 싶어도 구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영기 제작의 권위자가 영기를 제작할 수 있는 새로운 방법을 고안해냈다. 그것은 바로 제작 과정에서 대량의 영석을 사용, 장비에 영성이 깃들게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영기의 위력은 기존의 방법으로 만든 것보다는 훨씬 약했지만, 법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위력을 지녔다.
현재 존재하는 대부분의 영기는 모두 후자의 방법으로 만든 것이었다. 영기라고 불리긴 하지만, 사실은 온전한 영기가 아닌 모방품인 셈이었다.
하지만 비록 모방품일지라도 그것을 지니는 것은 높은 신분을 상징했으며, 실제로 소유자의 실력을 대폭 증가시켜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