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통천어령결(通天御灵决)
석목이 막 책을 펼쳐보려 할 때, 채아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들려왔다.
“이런, 석두! 큰일이야. 빨리! 빨리!”
“무슨 일이야? 제대로 말해.”
“백 리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강해보이는 세 사람이 또 쫓아오고 있어.”
다음 순간, 채아가 보는 장면이 석목의 머릿속에 즉시 나타났다.
커다란 말을 탄 세 사람이 그가 지나왔던 언덕을 달려오고 있었다.
그들 중 왼쪽에 있는 사람은 긴 수염을 기른 기품 있는 남자였고, 중간에 있는 사람은 등에 검을 비스듬히 멘 잘생긴 남자였다. 우측에 있는 사람은 용모가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비록 세 사람의 기운을 느낄 수는 없었지만, 석목은 그들의 복장이나 눈빛으로 보아 전부 뚱뚱한 도인과 같은 지계의 강자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채아,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다시 합류하자!”
놀란 석목이 채아에게 황급히 말했다.
“저들의 움직임이 빠르니 어서 가!”
채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석목은 책을 도로 집어넣고 은색 부적을 꺼내 사용했다.
그러자 곧바로 석목의 몸이 은색 빛에 둘러싸이더니 빛이 반짝이는 동시에 자리에서 사라졌다.
* * *
일 각 후, 세 도인이 석목과 뚱뚱한 도인이 전투를 벌였던 곳에 도착했다.
그들은 공기 중에 자욱한 피비린내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시체, 부서진 무기들을 보고 미간을 확 찌푸렸다.
“육이임견(六耳壬犬)!”
아름다운 여인이 굳은 표정으로 말에서 뛰어내렸다. 그녀는 화살에 머리를 관통당한 개 옆으로 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그녀는 뚱뚱한 남자의 머리 없는 시체를 발견했다.
다른 두 도인도 말에서 내려 다가왔다.
수염을 기른 도사가 낡은 구리거울을 꺼내 들었다. 거울이 반짝이더니 즉시 노란 빛을 뿜어내며 주위를 비추었다.
곧이어 석목이 사라진 위치에서 빼곡한 은색 점이 나타나났다. 점은 잠시 뒤 공기 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순이부를 사용했군. 떠난 지 벌써 일 각이 지나서 육이임견 없이는 쫓기가 쉽지 않겠어.”
수염을 기른 도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곳에 사망의 기운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왕 사제는 사령생물의 손에 당한 것 같습니다. 이 정도의 실력을 가진 사령생물을 손쉽게 소환해내고, 봉마전(封魔殿)의 제자들을 전부 일격에 죽인 것을 보니 유안의 짓이 분명한 것 같군요.”
여자가 말했다.
“하늘이 내린 듯한 뛰어난 재능이군. 술사로서 이미 망월의 경지에 올랐을 뿐만 아니라 무공의 경지는 지계에 오른 것 같구나.”
수염을 기른 도사가 말했다,
“왕 사제가 공을 탐내서 무모하게 돌진하지 않았다면 이런 곳에서 죽지는 않았을 텐데, 자업자득입니다. 우리 네 사람이 힘을 합쳤다면 아무리 유안이라 해도 도망가지 못했을 거예요.”
잘생긴 도사가 덧붙였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이 무슨 소용이냐. 우선 돌아가서 보고를 하자꾸나.”
수염을 기른 도사가 말했다.
세 사람은 주위에 있는 통천선교 제자들의 시체를 매장한 뒤, 뚱뚱한 도사의 시체는 특별히 화장을 했다. 그리고 다시 말에 올라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 * *
석목은 어느 민둥민둥한 산봉우리의 정상에 서서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멀리서 상공을 한동안 선회하던 검은 점이 석목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다가와 하강했다.
바로 채아였다.
채아는 날개를 펄럭이며 석목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석두, 추격병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어.”
채아가 말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채아의 시야를 통해 확인해서 그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통천선교의 지계도사를 처치한 뒤로 벌써 한 달이 지났다.
석목은 처음 한동안은 계속 마음을 졸이고 있었다.
비록 운이 상당히 좋아서 북쪽으로 상당히 떨어진 곳으로 전송되었지만, 통천선교의 도사들이 어떤 방법으로 계속 추적해 올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약 정말로 지계의 존재 셋이 쫓아온다면, 연나의 도움을 받더라도 도주할 수 있을 거라는 보장이 없었다.
게다가 연나는 지금 살짝 이상하게 변해 있었다. 자신의 소환을 받아들일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석목은 한동안 큰길로는 다니지 못하고 좁은 길만 골라서 천마종이 있는 북쪽으로 천천히 이동했다.
그 뒤로 석목은 채아를 통해 통천선교의 제자를 수차례 발견했다. 그러나 그들이 자신이 이동하는 방향을 파악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아서 한숨 돌릴 수 있었다.
현재 그가 있는 곳은 대진국의 국경 안이었다.
대진국은 중간 규모의 국가를 사이에 두고 육산왕조와 붙어 있는 나라였다. 육산왕조가 통천선교를 믿듯 대진국은 천마종을 국교로 삼고 있었다.
통천선교와 천마종은 명월교와의 관계 같지는 않았지만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일반적인 상황에서는 서로 상대의 국경을 넘지 않았다.
그러니 이미 대진국의 국경에 들어온 이상, 통천선교는 더 이상 석목을 쫓을 수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을 한 석목은 안도감을 느꼈다. 그리고 산봉우리 아래로 내려가 북쪽으로 향했다.
“석두, 우리 천마종으로 가는 거야?”
채아가 물었다.
“응, 그곳은 흑마문의 뿌리야. 그곳에 가면 더 이상 추격을 당할 걱정을 할 필요가 없을 거야.”
석목이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채아가 매우 기뻐했다. 본래 겁이 많은 채아는 이렇게 가슴을 졸이는 나날들이 매우 견디기 힘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석두, 북쪽으로 갈수록 추워지는 것 같아.”
채아가 날개를 움직여서 몸을 더욱 빈틈없이 덮었다.
“맞아, 더 북쪽으로 가면 일 년 내내 눈이 덮여 있어. 그래서 대진국을 ‘빙설국’이라고 부르기도 한다고 해.”
석목이 지도를 한 장 꺼내 들며 말했다.
“아…. 나는 추운 게 제일 무서워….”
채아가 원망하듯이 말했다.
석목은 채아의 말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도에서 위치를 확인한 후,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마양대전까지는 이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기에, 참여하기 위해서는 걸음을 재촉해야만 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석목이 대진국의 국경을 넘어 들어온 뒤로 보름이 지났다.
북쪽으로 향할수록 지형은 점차 평탄해졌다.
아직 가을이 오지 않았지만 녹색 나뭇잎은 거의 없었으며, 앙상한 나뭇가지만 보였다. 기온도 상당히 낮았고 가끔 눈보라가 휘날리기도 했다.
석목은 한 언덕에 서서 몇 리 밖에 있는 거대한 성을 바라보았다.
지도에 따르면 그 성의 이름이 가하관(嘉河关)이었다. 대진국에 깊이 들어온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는 큰 성이었다.
“석두, 성으로 들어갈 거야?”
채아가 물었다.
석목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랫동안 야외에서만 지냈기 때문에 보급해야 하는 물건이 상당히 많았다.
가하관의 규모는 매우 컸다. 천우성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꽤나 거대한 성이었다.
암홍색 돌을 쌓아올린 성벽은 높이가 팔 장 가까이 됐으며, 비록 조잡해 보이긴 해도 매우 견고했다. 성벽을 이루는 돌덩어리 하나하나가 마치 웅크린 거인 같아 보였다.
전날 내린 눈이 쌓인 가하관의 모습은 매우 이국적으로 느껴졌다.
성을 잠시 구경하던 석목은 곧 옷을 정리하고 입구를 향해 갔다.
가하관은 주위 백 리 내에서 유일한 성이었다. 성의 남쪽과 북쪽에 각각 하나의 성문이 있었으며, 주위에는 작은 마을이 상당히 많이 늘어서 있었다. 그만큼 성에 드나드는 사람도 많아서 성문에는 기다란 줄이 늘어서 있었다.
석목은 인파 속에 섞여 들어가서 조용히 자신의 순서를 기다렸다.
성의 입구는 대진국의 병사 몇몇이 지키고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 옷을 입은 두 사람이 한가로이 서 있었다.
석목은 그 두 사람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들의 옷에는 별다른 표식이 없었지만, 석목은 그 두 사람이 천마종의 제자라는 사실을 추측해낼 수 있었다.
가하관은 천우성과는 달리 출입하는 사람에 대한 검문이 비교적 느슨했다. 석목은 통행료를 지불한 뒤 순조롭게 성에 진입할 수 있었다.
가하관 내에는 고풍스러운 고층 건물이 많았으며, 전부 검은색 돌을 사용해 지어져 있었다. 화려한 천우성과는 다른 거친 느낌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다.
석목은 주위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이 성이 크게 남쪽과 북쪽 구역으로 나뉘며 두 구역은 흑석(黑石)거리로 이어져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흑석거리는 마차 네다섯 대가 나란히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었는데, 길가에는 상점이 늘어서 있었고 인파가 매우 많은 번화가였다.
성 안에는 이곳를 제외하고도 다른 거리가 많이 있었지만, 흑석거리만큼 번화한 곳은 없었다.
석목은 흑석거리를 걸으며 길가의 상점들을 구경했다.
거리에는 가죽상점, 대장간, 재료상점, 잡화점, 주루 등이 있었으며, 대진국의 특산품을 취급하는 가게도 있었다.
마찬가지로 호기심 넘치는 눈빛으로 주위를 구경하던 채아는 때때로 놀라 소리를 질러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석목이 한 번 노려보자 채아는 그제야 얌전해졌다.
가하관은 천우성과는 달리 석목처럼 소환수를 데리고 다니는 사람이 드물었다. 그렇기 때문의 채아의 존재는 굉장히 눈에 띄었다.
가하관 내에는 천마종의 사람도 상당수 있을 게 분명했다. 석목은 마양대전에 참가할 계획이었기 때문에 불필요하게 눈길을 끌고 싶지 않았다.
“석두, 물건 사려고?”
채아가 석목의 어깨에 얌전히 앉아서 물었다.
석목은 채아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문이 커다란 상점 앞에 멈춰 섰다. 상점의 문에는 ‘백진각(百珍阁)’이라는 큰 글씨가 적힌 편액이 걸려 있었다.
백진각은 각종 재료를 판매는 곳이었는데, 규모가 매우 커서 상점 사이에서 유달리 눈에 띄었다.
상점에 드나드는 사람 역시 다른 곳에 비해 수가 훨씬 많았다.
석목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는 갑자기 미간을 찌푸리며 반대편 거리를 바라보았다.
“무슨 일이야?”
채아가 석목의 시선이 향하는 곳으로 눈길을 돌리며 물었다.
그곳에는 지나가는 인파만 있을 뿐 다른 특이한 점은 없었다.
“별 일 아냐.”
석목의 얼굴에 의아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분명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너무 빨리 사라져서 착각인지 아닌지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석목은 다시 한 번 그 방향을 바라본 뒤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 한 건물의 뒤에서 이십 대로 보이는 남자가 천천히 걸어 나왔다.
그는 석목이 들어간 백진각의 방향을 슬쩍 본 뒤, 품속에서 물건을 하나 꺼내 들여다봤다. 그러더니 기쁜 표정을 지으며 자리를 떠났다.
그 시간, 석목은 백진각 안의 특실에 앉아 차를 마시며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석목은 시간을 낭비하기 싫었기 때문에 건물에 들어오자마자 선천무인의 기운을 은은하게 뿜어냈다. 그러자 주인은 그를 바로 특실로 모셨다.
석목은 어디를 가든 실력이 좋으면 대접을 받는다는 사실을 체감하며 감탄했다.
잠시 후,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파란 옷을 입은 중년의 남자가 문을 두드리며 들어왔다.
중년의 남자가 만면에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귀한 손님이 발걸음을 하신 걸 알지 못하고 마중 나가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석목은 정신력을 발산해 중년 남자를 한번 슥 훑어보았다. 그리고 그 남자가 선천의 경지에 오른 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선천초기와 중기 사이에 있는 남자의 경지는 지금 석목의 경지와 비슷했다.
석목은 시간이 지날수록 정신력의 쓰임새를 하나둘씩 더 발견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편리함에 만족감을 느꼈다.
다만 아직은 정신력이 약해서 탐색할 수 있는 범위가 너무 좁다는 게 아쉬울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