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영기를 담다
백 리 밖의 어느 산간에서 빛이 반짝였다. 이어 석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석목은 자신이 나타난 곳이 잡초가 우거진 산간의 평지라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괴수화 변신을 풀자 몸에 자라난 뱀의 비늘이 빠르게 사라졌다.
석목은 그 자리에서 어두운 표정으로 한동안 묵묵히 서 있었다.
통천선교와 천마종에서 자신에게 지명수배를 내릴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렇게 된 것은 아마 유안과 여러 차례 접촉한 탓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 생각을 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중요한 것은 운 좋게도 그들에게 잡히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다만 그로서는 더 이상은 육산왕조와 대진국에 발붙일 방법이 없었다. 현상금으로 내건 영기와 영석은 너무나 유혹적이라, 지계의 존재마저 마음이 동할 것이 분명했다.
무엇보다 가장 안타까운 건 마양대회에 참가하려던 계획이 물거품이 된 것이었다.
한참 후 석목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바로 그 순간, 검은 점이 멀리서 나타나더니 석목을 향해 빠르게 날아왔다. 그것은 바로 채아였다.
“후…. 힘들어죽겠어.”
석목의 어깨에 착지한 채아가 숨을 헐떡이며 말했다.
“석두, 어떻게 된 거야? 어쩌다가 명월교의 사람이 된 거야?”
잠시 호흡을 가다듬은 채아가 즉시 물었다.
“내가 어떻게 알겠어. 유안과 접촉한 일을 통천선교의 사람이 알게 되었나보지. 월예공주 때문인지도 모르고.”
석목이 말했다.
“그럼 앞으로 어떡하지? 계속 사람들에게 쫓기는 거 아니야?”
채아가 말했다.
석목은 잠시 생각에 잠겨 있다가 대답했다.
“그렇게 되겠지.”
“석두, 그럼 흑마문으로 돌아가자.”
채아가 말했다.
그러나 석목은 먼 곳의 하늘을 보며 대답했다.
“돌아가지 않을 거야.”
천마종의 분파인 흑마문은 아마 소식을 접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 이대로 흑마문으로 돌아간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리 없었다.
게다가 번화한 천우성과 육산왕조의 수많은 강자를 본 뒤, 석목은 환경과 자원이 수련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깨닫게 되었다. 반도에는 수련 자원이 부족했다.
풋내기였던 석목이 처음 여창해를 사부로 모셨을 때, 그의 목표는 선천무인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흑마문에 들어간 후 그는 지계의 강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이 목표는 천우성의 영선대회에서 선인을 만난 후 다시 바뀌었다.
예전에 지계의 존재에 오른 이후 앉아서 죽을 날을 기다리겠냐고 서문설이 물은 적이 있었다.
석목의 답은 물론 ‘아니다’였다.
지금 그는 여러 이유로 육산왕조와 대진국에 머물 수 없게 되었지만, 체념하고 이대로 흑마문에 돌아갈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는 어머니의 묘 앞에서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무인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앞길에 수많은 난관이 있다 하더라도 뒤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석목은 통천선교와 천마종 앞에서 무력했다. 명월교의 사람이 아니라 해도, 그들에게 그는 죽이고자 하면 그냥 죽여도 되는 존재였다. 만약 자신이 충분히 강했다면 그들이 자신에게 변명 한 마디 할 기회도 주지 않고 제멋대로 굴지는 못했을 것이다.
먼저 충분한 실력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그가 꿈에서도 그리는 그녀의 모습을 훗날 다시 볼 수 있을 것이다.
빠른 시간 내에 많은 생각을 한 석목은 시선을 거두며 말했다.
“앞으로 어디로 갈지는 생각해보고 말해줄게. 우선은 좀 쉬자.”
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석목과 마찬가지로 매우 지쳐 있었던 것이다.
주위를 한 번 둘러본 뒤 석목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산자락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한 사람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은 동굴 입구가 있었다. 그 동굴은 깊지 않았고 내부가 매우 깨끗했다.
석목은 바위 몇 개를 옮겨 동굴의 입구를 막고, 부적을 이용해 주위에 간단한 탐지진법을 설치한 뒤 앉았다.
채아가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자 석목은 몇 마디 주의를 준 뒤 채아를 내보냈다. 그 덕분에 주위를 경계할 수 있으니 나쁠 것은 없었다.
석목은 곧바로 휴식을 취하지 않고, 먼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 금색 반지를 빼냈다.
그 반지는 통천선교의 뚱뚱한 도인에게서 뺏은 것이었다.
석목은 그동안 길을 재촉하느라 그 안에 무슨 물건이 있는지 대충 훑어보기만 했고, 제대로 정리를 하지 못했다.
정신력을 사용해 반지의 내부를 확인하던 석목의 표정이 점차 밝아졌다.
일 각 가까이 지난 후 석목은 눈을 뜨고 길게 숨을 내뱉었다.
반지에 들어 있는 것은 대부분 값어치가 얼마 안 되는 광석들, 그리고 괴수의 몸에서 채취한 재료들이었다.
반지 안에는 다양한 색의 영석들도 있었다. 하급 영석이 대부분이었지만 중급도 적지 않게 있었다. 전부 합치니 하급 영석 일 만개를 넘었다.
석목은 매우 기분이 좋았다. 뚱뚱한 도인 덕분에 수많은 영석을 손쉽게 얻게 된 것이다.
흑마문에서 술사학도의 신분으로 있으면 일 년에 고작 세 개의 하급영석을 받을 수 있었다. 영계술사는 열 개였다. 그곳에서 이렇게 많은 영석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나 마찬가지였다.
부적 제작 능력을 이용한다 해도, 적어도 몇 년의 시간을 들여야 이렇게 많은 영석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한다면 수련에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했다.
반지 안에는 영석 외에도 몇 개의 법기, 그리고 자주 쓰이는 단약과 부적이 있었다.
석목은 물건을 전부 자신의 진묘계로 옮기고, 잡다한 재료들만 금색 반지 안에 남겨두었다.
석목은 분류 작업을 마친 후 손을 휘둘렀다. 그러자 금빛이 반짝이더니 손바닥에 금색 표지의 책과 금색 검이 나타났다. ‘통천어령결’과 영기인 금전검이었다.
이전에 통천어령결을 대충 읽어본 뒤, 석목은 그것이 영기를 강화하는 통천선교의 법문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통천어령결에는 영기를 길들이는 방법뿐만 아니라 체내에 품어 영성을 늘리는 방법, 정신력을 분할해 영기를 제어하는 방법 등이 기록되어 있었다.
석목은 통천어령결을 읽으며 금전검을 자세히 탐구했다. 또 정신력을 검 안에 주입해보기도 했다.
석목은 한 시진이 지난 후에야 무언가 깨달은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금전검의 원래 주인이었던 뚱뚱한 도인은 연나에게 죽었다. 책에 적힌 대로라면, 주인을 잃은 금전검은 담고 있던 영성을 대부분 잃었을 것이다.
이 검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피를 떨어뜨리고 정신력을 사용해서 길들여야 했다.
하지만 원래의 위력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금전검을 일정 기간 동안 체내에 담아서 영성을 늘려야 했다.
잠시 생각하던 석목은 통천어령결에 기록된 대로 먼저 금전검에 피를 떨어뜨리고 정신력을 주입해 길들이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만 족히 두 시진이 걸렸다.
석목이 손에 들린 금전검에 정신력을 주입하자, 검의 표면에 새겨진 부문이 밝게 빛나면서 허공으로 떠올랐다.
석목이 검지와 중지를 펼쳐 허공을 가리키자 금전검은 금색 궤적을 남기며 빠르게 날아갔다. 이어 손가락을 접자 다시 날아와서 주위를 선회했다.
석목은 매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수(收).”
석목이 외치자 금전검이 반짝이며 그의 입 안으로 날아 들어갔다.
이 검은 체내에 잘 품고 있기만 하면 점차 영성을 회복해서, 적과 전투를 벌일 때 사용할 수 있다고 적혀 있었다.
석목은 오늘 천마종 중년 남자와의 전투에서 영기의 강력함에 대해 더욱 뼈저리게 느꼈다. 만약 자신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영기가 있었다면 허겁지겁 도망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석목은 숨을 깊게 들이쉬어 평정심을 회복한 뒤 천천히 눈을 떴다.
다음 날, 석목은 해가 뜨기도 전에 동굴을 나서 주위의 높은 산봉우리를 향해 빠른 속도로 걸었다.
잠시 후, 그는 산봉우리의 정상에 있었다.
아직 해가 뜨기 전이라 붉은 노을에 물든 하늘이 매우 아름다웠다.
석목은 주위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흡일식의 자세를 취했다.
그런데 그는 동쪽의 노을을 바라보다가 갑자기 미간을 찌푸렸다.
흡일식은 탄월식과는 달랐다. 체내에 기배를 형성한 이후로도 석목은 줄곧 흡일식을 열심히 수련했지만, 효과는 영 시원치 않았다. 그의 예상만큼 진기를 많이 늘려주지는 않았던 것이다.
석목은 답답했지만, 그래도 매일 틈이 날 때마다 수련을 이어갔다.
동쪽 하늘의 노을이 점점 밝아지더니 붉은 태양이 천천히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꿈속에 들어간 석목의 몸은 어느새 흰 원숭이로 변해 있었다.
하지만 주위를 둘러보니 평소와는 다른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흰 원숭이는 커다랗고 높은 산봉우리 위에 있었는데, 하늘에는 손을 뻗으면 닿을 것 같이 커다랗고 눈부신 태양이 떠 있었다.
흰 원숭이는 두 팔을 바닥에 대고 고개를 높게 들어올린 채 입으로 크게 호흡하기 시작했다.
공기 중에 나타난 금색 빛의 점들은 원숭이의 몸 안으로 흡수되지 않고, 원숭이의 앞에 천천히 모여들어 금색 태양의 모습을 이루었다.
빛을 반짝이며 순수한 힘의 파동을 뿜어내는 금색 태양의 모습은 매우 유혹적이었다.
흰 원숭이가 기뻐하며 입을 벌리자 금색 태양이 입 안으로 날아들었다.
그 순간 원숭이는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그것을 황급히 뱉어냈다. 금색 태양은 무척이나 뜨거워서 입에 들어오자 마치 불을 머금은 것 같았기 때문이다.
흰 원숭이는 시끄럽게 울며 달갑지 않은 표정으로 눈앞의 태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잠시 망설이다가 다시 한 번 입을 벌려 금색 태양을 빨아들였다.
하지만 그것이 입에 들어오는 순간, 원숭이는 다시 한 번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뱉어냈다.
그러나 이번에는 처음보다는 조금 더 오래 버텨냈다. 그 짧은 시간에 입이 높은 온도에 약간 적응한 것 같았다.
입 안을 달래던 원숭이는 잠시 후 다시 금색 태양을 빨아들였고, 이번에는 단숨에 삼켜버렸다.
체내에 들어온 태양은 즉시 뜨겁기 그지없는 열기로 변했고, 사지의 기경팔맥으로 퍼져서 미친 듯이 흐르기 시작했다.
체내의 경맥이 부풀어 오른다고 느껴진 순간, 마치 전신이 불에 타오르는 듯 말로 수 없는 고통이 느껴졌다. 흰 원숭이는 고통에 찬 표정을 지으며 두 팔로 머리를 감싸고 바닥을 구르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자 열기가 천천히 약해졌다. 원숭이는 이미 탈진한 듯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바로 그때, 원숭이의 머릿속에 금색 빛의 점들이 나타나더니 한곳으로 모여들었고, 그것들은 순식간에 금색 결정으로 변했다.
석목은 산봉우리에서 몸을 떨며 눈을 떴다.
태양은 이제 완전히 떠올라서 주위의 모든 것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석목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이번 꿈은 평소보다 시간이 오래 걸렸으며, 이전과는 다르게 원숭이가 빛의 태양을 먹었다.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체내를 점검해보았다. 그 순간 그의 얼굴에 기쁜 표정이 떠올랐다.
어느새 그의 머릿속에는 꿈에서와 같은 금색 원형 결정이 생겨나 있었다.
석목은 결정을 잠시 바라보다가, 그것이 달의 정수가 모여 형성된 은색 결정의 모습과 별반 차이가 없다는 것을 발견했다.
석목은 진기를 한 가닥 끌어올려 금색 결정을 건드려보았다.
뚝!
그러자 원형의 결정은 즉시 부서지며 금색 태양의 환영으로 변했다.
곧 금색 태양이 반짝이더니 일부가 파괴되어 정순한 진기로 변했다. 그것은 경맥을 타고 단전으로 흘러들어갔다.
이어서 석목의 체내에 있는 진기가 대폭 증가되어 선천초기의 끝자락에 도달했다. 선천중기까지 이제 딱 한 걸음 남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