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2화. 꿈에 대한 의구심
석목은 한참 후 눈을 떴다.
“앞으로 흡일식을 수련할 때는 꼭 산봉우리 위에 올라가서 해야겠군.”
석목은 고개를 숙이고 생각에 잠겼다가 결론을 내렸다.
바로 그 순간, 날갯짓 소리와 함께 채아가 날아와서 석목의 어깨에 앉았다.
“석두, 오늘 수련은 평소보다 꽤 오래 결렸네.”
채아가 말했다.
“응.”
석목은 무언가에 정신이 팔린 듯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뭘 고민하는 거야?”
채아가 석목을 바라보며 물었다.
석목은 채아를 한 번 보더니 말없이 일어났다. 그는 꿈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수련을 시작했을 때부터 줄곧 꿈을 꾸어 왔다.
그런데 수련을 할수록 석목은 점점 의구심이 생겨났다. 흰 원숭이의 꿈은 절대 우연이 아니었다. 그 기이한 꿈은 자신의 몸과 관련이 있는 것이 분명했다.
수련 중 꿈에 들어가는 횟수가 늘어날수록, 그는 꿈과 관련된 규칙을 점차 파악하게 되었다.
그가 현실에서 어떤 행위를 하면 그것과 관련된 꿈을 꾸었다. 탄월식이 그랬고, 흡일식 역시 마찬가지였다.
석목은 아직까지도 두 기이한 심법의 구체적인 법결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꿈속에서 흰 원숭이의 행동을 따라 달을 보고 명상하면 달의 정수를 모을 수 있었다.
같은 방법으로 태양을 보고 명상할 경우에는, 꿈속에서 흰 원숭이가 흡일식을 해서 석목의 진기가 크게 증가했다.
과거 용사의 문에서 그가 흰 원숭이로 변해 삼수흉망을 쓰러뜨렸을 때, 그 당시에도 바다 속에서 흰 원숭이와 구수금교(九首金蛟)가 전투를 벌이는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석목은 갑자기 터무니없는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들었다.
꿈속의 광경이 모두 흰 원숭이가 가진 기억의 조각이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석목은 고개를 숙이고 잠시 사색에 잠겼다가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추측과 복잡한 생각으로 인해 마음이 안정되지 않았다.
만약 그 추측이 사실이라면 석목은 어떻게 그 기억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어떻게 흰 원숭이로 변할 수 있는지, 또 머릿속에 나타나는 원숭이의 환영은 도대체 무엇인지 등등….
머리가 상당히 좋은데다 항상 냉정한 석목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만 됐어.”
석목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생각들을 떨쳐버렸다.
그 꿈들이 정말 원숭이의 기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꿈을 따르기만 하면 강해질 수 있다는 게 중요했다.
석목은 갑자기 이전에 흰 원숭이가 하늘을 비행하던 꿈, 그리고 꿈속에서 본 하늘까지 닿는 산봉우리를 떠올렸다.
석목은 문득 승선경매 전에 구매한 서하대륙의 낡은 지도가 생각났다.
석목은 지도를 꺼내 능천봉을 찾아보았다. 이 산봉우리의 특징은 꿈속에서 본 산봉우리와 너무나 비슷했다.
‘혹시….’
채아는 심심해서 하품을 하다가 석목이 갑자기 지도를 꺼내들자 머리를 들이밀었다.
“보광각에서 산 지도 아니야?”
석목이 여전히 지도를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하대륙? 석두, 설마 서하대륙에 가려는 거야?”
채아는 지도의 한쪽 구석에 적혀 있는 글씨를 보고 물었다.
석목은 잠시 침묵하다가 천천히 말했다.
“맞아, 그럴 생각이야. 동주대륙에는 더 이상 발붙일 곳이 없으니 아예 서하대륙으로 가보려고.”
석목은 이전부터 세상을 떠돌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마음속 깊은 곳에 가지고 있었다.
이전이었다면 여러 문제와 걱정으로 인해 발목을 잡혔겠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마음 가는대로 행동할 수 있었다.
석목은 서하대륙에 가면 반드시 지도에 그려져 있는 능천봉에 가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곳에 가면 꿈의 단서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륙을 떠돌다니, 난 좋아! 서하대륙으로 가자!”
채아가 석목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소리를 지르며 날개를 퍼덕였다.
석목은 잠시 생각하다 동주대륙의 지도를 다시 꺼냈다.
서하대륙에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서해를 건너야만 했다. 그리고 동주대륙의 서쪽에는 서하고국(西夏古国)이 있는데, 반드시 이 나라를 거쳐야만 동주대륙의 서쪽 해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서하고국은 마침 명월교가 탄생한 나라였다. 그러니 그가 갈 곳이 없어지게 만든 종문에 대해서 알아볼 수도 있는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길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준비를 해야 해.”
석목이 갑자기 말했다.
채아가 물었다.
“무슨 준비?”
* * *
한 시진 후, 산맥을 벗어난 석목과 채아는 언덕에 서서 서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석목은 얼굴을 천으로 가리고 있었고, 채아의 깃털은 어째서인지 검은 색으로 변해 있었다. 예쁘고 화려한 털을 가진 앵무새가 지금은 마치 살찐 까마귀처럼 보였다.
채아가 까맣게 변한 깃털을 보며 불안한 듯 물었다.
“석두, 이 흑봉화(黑凤花)의 즙은 정말 깨끗하게 씻기는 거지?”
“깨끗하게 씻어낼 수 있으니 안심해.”
석목이 대답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보기 흉한 것 같아….”
채아가 살짝 서러운 듯 말했다.
“내 모습이 이미 알려진 이상 너 역시 마찬가지일 거야. 위장을 하지 않으면 금방 정체가 탄로날 텐데…. 너도 껍질이 벗겨진 채 잡아먹히기는 싫잖아?”
석목이 말했다.
“알겠어.”
채아가 낙담하며 말했다.
“가자.”
석목이 서쪽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 * *
삼 개월이 지났다.
초승달의 몽롱하고도 신비로운 은색 달빛이 대지를 뒤덮은 늦은 밤.
어느 민둥민둥한 회색 산봉우리의 정상에 몇 장 넓이의 평지가 있었다.
그곳에서 석목이 두 손바닥을 하늘로 들어 올리는 기괴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순간 그의 몸속에서부터 법력이 머릿속으로 한 가닥 흘러들어갔다.
머릿속에는 용안만한 크기의 은색 달의 결정이 하나 있었고, 그 옆에는 비슷한 크기의 금빛 결정이 하나 더 있었다.
한 가닥의 법력이 은색 결정을 향해 뻗어나갔다.
쾅!
달빛 정수의 결정이 즉시 파괴되어 하얀색 달의 모습으로 변했다.
동시에 석목의 머리 뒤에서 보름달의 환영이 스쳐갔다.
은빛이 반짝이더니 그의 머릿속에 생겼던 은색 보름달이 부서졌다. 달의 조각은 정순한 법력으로 변해 경맥을 따라 흐르다가, 단전에 있는 법력의 회오리 속으로 흘러들어갔다. 그와 동시에 체내의 법력이 빠르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한동안 시간이 흐르고 머릿속에 보름달이 완전히 사라졌을 즈음, 석목의 온신술은 11단계를 돌파해 12단계에 올라 있었다.
백회혈 아래 양미간의 가운데 위치한 식해(识海)의 구름에도 별 하나가 더 빛나기 시작했다.
그는 이제 2성 술사가 된 것이다.
두 눈을 뜬 석목이 기쁜 표정을 지었다.
꿈속에서 흰 원숭이의 탄월식이 대원만에 오른 뒤, 용안만한 크기의 결정을 만들어내기까지 이제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최근 몇 달 사이에 석목은 용안만한 크기의 결정을 연달아 다섯 개나 만들어냈다. 그로 인해 법력은 비약적으로 늘었지만 줄곧 온신술 11단계에 막혀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12단계에 오른 것이다.
석목은 탄월식의 자세를 멈추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서서 입을 벌리자 금빛이 솟아났다.
석목이 두 손가락을 뻗자 입에서 나온 금빛은 문짝만큼이나 거대한 검으로 변했다.
금빛 화염이 타오르는 검신에서는 뜨거운 열기와 함께 강력한 법력의 파동이 뿜어져 나왔다.
석목은 머리 위에 떠 있는 금전검을 보며 흥분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오른손을 뻗자 금전검은 주위를 선회하기 시작했다.
다음 순간, 금전검이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팔 장 높이의 회색 바위를 베었다.
쾅!
바위가 박살이 나며 사방으로 돌조각이 날렸다. 돌조각들은 곧 금색 화염에 휩싸여 흔적도 남지 않고 사라졌다.
석목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오른손을 까딱이자 금전검이 회수되어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금전을 꿰어 만든 검이 석목의 손에 닿는 순간, 검신이 금빛으로 반짝이더니 즉시 모습을 감추었다.
그 순간, 석목의 단전에 그와 똑같은 모양의 작은 금전검이 나타났다. 그것의 아래에서는 법력과 진기의 회오리가 끊임없이 회전하고 있었다.
금전검은 석목이 몇 달간 몸에 담아둔 결과 어느 정도 영성을 갖추었다. 그러나 발휘할 수 있는 위력은 여전히 제한적이었다. 매번 단 한 번의 공격만을 발동할 수 있었고, 그 위력은 선천초기의 무인이 전력을 쏟은 일격에 버금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석목은 수십 개의 거대한 바위가 널려 있는 석림을 향해 걸어갔다.
석림 앞에 도착한 석목의 머리 뒤에서 갑자기 빛이 반짝였다. 이어 두 개의 별 모양 환영이 나타났다.
석목이 오른손을 뻗자 붉은 빛이 반짝이며 허공에 화염구가 나타났고, 화염구는 거대한 사각형 바위를 향해 날아갔다.
쾅!
바위가 붉은 빛과 함께 터지면서 돌조각이 비처럼 쏟아졌다. 석목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화염구는 경매가 열리기 전에 산 화원경을 보고 익힌 것이었다.
이 술법은 초급 술법이라 성계술사인 석목은 주문 없이 시전할 수 있었다. 또한 정신력과 법력이 강해질수록 만들어낼 수 있는 화염구의 숫자도 늘어나기에 아주 유용했다.
화염구의 위력은 시전자의 화속성 친화력에 따라 결정됐다. 5단계의 화속성 친화력을 가진 석목의 화염구는 하나의 위력이 후천대원만 무인의 일격과 맞먹었다.
그것은 기폭술의 위력과 비교하면 조금은 약했지만, 그 대신 속도가 더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다.
순간 석목은 무언가 떠올린 듯 두 눈을 감고 가만히 서 있었다.
잠시 후, 눈을 뜬 석목이 오른손을 들었다. 그러자 다시 화염구가 나타나 다른 사각형 바위를 향해 날아갔다.
화염구가 바위와 충돌하기 직전, 허공에 매우 미세한 법력의 파동이 일어났다. 이어 얇고 기다란 무형의 사슬이 순식간에 석목과 화염구를 연결했다.
바위에 닿기까지 일 척 정도의 거리를 남겨둔 화염구가 움직임을 멈췄다.
쾅!
다음 순간 화염구가 매우 빠른 속도로 바위를 돌더니 뒷면에 충돌했다. 불빛이 터져나오며 돌조각이 사방으로 날렸다.
그 모습을 본 석목은 기뻐했다.
온신술 12단계부터는 진기한 술법이 여러 개 기록되어 있었는데, 그만큼 수련자에 대한 기준 역시 매우 높아졌다.
예를 들어 술법의 궤도를 제어하는 무형의 사슬은 ‘공법혼련’이라는 술법이었다. 이는 공간속성의 친화력이 4단계 이상에, 정신력이 매우 강한 술사만이 사용할 수 있었다.
수련자는 강한 공간 친화력을 이용해 정신력을 술법에 부착,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사슬을 만들 수 있었다. 정신력은 본래 눈에 보이지 않아 이 사슬은 육안으로는 볼 수 없으며, 정신력이 강할수록 더 먼 거리까지 뻗어나갈 수 있었다.
석목은 국 사숙을 도와 사령계로 진입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여태껏 공간 친화력을 제대로 활용할 기회가 없었다. 공간 친화력을 요하는 흔치 않은 술법을 발견한 석목은 즉시 수련을 했고, 시험을 해본 결과 효과가 나쁘지 않았다.
돌아갈 채비를 하던 석목은 무언가 잠시 고민하다가 오른손을 휘둘렀다. 허공에 불빛이 연달아 반짝이더니 두 개의 화염구가 거의 동시에 날아갔다.
석목의 눈이 반짝였다. 뒤이어 무형의 사슬 두 개가 두 개의 화염구와 각각 연결됐다.
두 화염구는 마치 보이지 않는 손에 조종당하는 불의 나비처럼 허공에서 서로를 쫓기 시작했다.
석목이 주위에 있는 십 장 높이의 바위에 시선을 돌리자, 두 화염구가 허공에 붉은 궤적을 그리며 지나갔다.
콰르릉!
불빛이 솟구치며 바위는 가루가 되었다.
감격한 석목은 두 주먹을 꽉 쥐었다.
두 개의 화염구를 제어하는 방법은 그가 방금 순간적으로 떠올린 것이었다. 통천어령결에 기록된 분신지술(分神之术)을 사용해 정신력을 두 개로 나누어 사용한 것이다.
통천어령결에 기록된 분신지술은 매우 정교하기 때문에, 정신력을 여러 개로 나누어서 섬세하게 제어할 수 있었다. 그래서 분신지술과 공법혼연을 결합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시도해본 것이었다.
석목 역시도 이렇게 단번에 성공할 줄은 생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