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사령(邪灵)
“과찬입니다. 왕 진장님도 술사였군요.”
석목이 노인을 보며 말했다.
“젊었을 때 술법을 조금 배웠습니다. 하찮은 실력이지요.”
여기까지 말한 왕영은 잠시 주저하다가 물었다.
“명월교의 제자가 아니시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석목이 반문했다.
“제가 알기로 명월교의 성계술사는 대부분 상대적으로 부유한 서쪽 해안가 지역으로 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 마을에 올 리가 없죠.”
왕영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저는 명월교의 제자가 아니에요. 그저 우연히 이곳을 지나던 중이었죠.”
석목이 말했다.
“그럼 혹시 이 마을에 한동안 머물러 주실 수는 없을까요?”
왕영이 잠시 침묵하다가 살짝 머뭇거리며 물었다.
“해야 할 일이 있는 몸인지라 이곳에 오래 머물지는 못할 것입니다. 이번에 이렇게 찾아온 것은 촌장님께 서쪽 해안가로 가는 방법과 서해에 관한 소식을 얻기 위해서였습니다.”
석목은 확답을 하지 않고 말했다.
“바다로 나가려는 것입니까?”
“맞습니다.”
왕영의 물음에 석목이 대답했다.
“하하, 그 일은 제가 사람들을 시켜 알아보고 지도도 한 장 그려드리겠습니다. 짧으면 하루, 길면 삼 일이면 충분하니 오래 기다릴 필요 없을 것입니다. 대신 그동안 마을에 머물며 마을사람의 몸에 붙은 사령을 찾아줄 수 있을까요? 도와주신다면 물론 답례도 따로 하겠습니다.”
왕영이 말했다.
“진장님이 말한 사령이라는 게 무엇이지요?”
석목이 물었다.
“이런, 제가 정말 노망이 들었나보군요. 외지인이니 사령에 대해 들어보지 못한 것이 정상입니다. 사령은 본체가 망령인 특별한 사령생물입니다. 실체가 없으며 살아 있는 것의 정혈을 빨아먹지요. 강하지는 않으나 사람의 몸에 빙의하면 숙주의 기억을 계승하기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이상한 점을 전혀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사고를 예방하려고 해도 예방할 수가 없지요. 최근 이 마을에 피를 전부 빨려 바짝 마른 시체가 빈번히 생겨나고 있습니다. 법력이 약한 저로서는 사령을 찾아낼 수 없기에 명월교 제자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오히려 그들이 전부 사령에게 당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법력이 고강하니 반드시 그 사령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왕영이 다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최선을 다해보겠습니다. 참, 백봉진 주위에 사령생물이 출몰하는 것은 어째서죠?”
석목이 고개를 끄덕인 후 화제를 돌려 물었다.
“어디 이곳뿐이겠습니까. 지금 서하고국 어디를 가도 사령생물이 넘쳐납니다. 이게 다 그 통천선교 때문입니다!”
왕영이 갑자기 화가 난 표정으로 말했다.
“자세히 설명해줄 수 있습니까?”
석목이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왕영이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궁금해 하시니 설명해드리겠습니다만, 굉장히 긴 이야기입니다….”
왕영의 설명을 다 들은 석목은 서하고국과 명월교의 상황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백 년 전 통천선교는 천마종, 그리고 몇몇 중소 종문과 연합해 대륙 내의 명월교 교도를 상대로 숙청에 나섰다. 이단을 뿌리 뽑겠다는 명분이었다.
몇 년에 달하는 기나긴 격전 끝에 결국 명월교의 세력 범위는 발원지인 서하고국 국경 내로 좁혀졌다.
연맹은 서하고국에 쳐들어가 명월교의 세력을 일망타진하려 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천마종이 갑자기 연맹에서 탈퇴해버렸다.
그 때문에 연맹은 와해될 뻔했지만, 통천선교는 포기하지 않고 남은 종문들을 모아 계속 추격을 이어갔다. 결국 명월교 총단까지 침입한 통천선교의 교주 무진도인은 당시 명월교의 교주인 동방세천과 칠 일 밤낮으로 혈전을 벌였다.
그 결과 무진도인은 동방세천에게 중상을 입혔지만, 그의 원기도 크게 손상을 입었다.
명월교의 궤멸을 막고자 했던 동방세천은 죽음을 무릅쓰고 사령계에 거대한 통로를 연결했고, 그 안에서 수많은 사령생물이 끝도 없이 밀려 나왔다.
그로 인해 명월교는 연합군에 커다란 타격을 주고 후퇴시킬 수 있었지만, 공간의 통로를 닫기도 전에 수명이 다한 동방세천은 결국 죽고 말았다. 성석의 힘이 다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사령생물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고, 그것들이 서하고국 곳곳에 퍼져 혼란이 야기되었다.
이 사건으로 큰 피해를 입은 명월교는 지금까지도 교주의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있으며, 뿔뿔이 흩어진 제자들은 서하고국 내에서 활로를 모색할 수밖에 없었다.
상당수의 제자들이 성과 마을을 떠돌아다니며 떠도는 사령생물을 제물삼아 제사를 올렸고, 그렇게 해서 자신의 경지를 향상시키고 영석과 은자를 벌었다. 그리고 일부 실력자들은 서해로 가 해수를 사냥했다.
왕영은 마을 주위의 지리에 대해서도 석목에게 설명해주었다.
동북쪽에 있는 백봉진은 서하고국 내에서도 가장 외진 곳에 위치한 마을이었다. 주위에는 다른 성이나 마을이 없었으며, 가장 가까운 성이 삼백 리 밖에 있는 비성(郫城)이었다.
석목은 왕영과 잠시 대화를 더 나눈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는 왕영의 권유를 완곡히 사양하고 그의 집을 나왔고, 마을에서 유일한 작은 객잔에 들어갔다.
밤이 되자 달과 별이 구름에 가리면서 천지가 완전히 암흑에 물들었다.
마을 내 어느 민가의 마당에서는 말상의 청년 전송이 한 농민과 잡담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소리도 없이 마당에 나타났다.
전송과 농민은 동시에 그 사람을 발견했다. 전송이 놀라서 물었다.
“목 대인, 어찌 이곳에….”
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목의 손가락에서 흰색 빛의 사슬이 쏘아져 날아갔다. 사슬은 전송의 옆에 있는 농민의 몸을 묶었다.
쿵!
몸을 묶인 농민은 바닥에 쓰러져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대인, 살려주십시오. 저는 대인을 본 적조차 없는데 제가 무슨 짓을 했다고 이러시는 겁니까?”
놀란 농민이 석목을 보며 큰 소리로 빌기 시작했다.
“대인, 어…어째서 제 작은 아버지를 붙잡는 것입니까?”
전송이 뒤로 한 걸음 물러나며 급하게 말했다.
그러자 석목이 농민에게 다가가며 말했다.
“도와주는 거다.”
놀란 전송은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어찌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다.
석목은 무표정한 얼굴로 농민을 보았다. 농민은 공포에 찬 가련한 눈빛으로 석목을 보며 끊임없이 애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석목은 애원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고 그의 머리 위에 왼손을 얹었다. 곧이어 석목의 다섯 손가락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농민은 하얀 빛에 무언가 자극을 받았는지, 붉게 물든 눈으로 석목의 목을 무섭게 노려보며 입을 확 벌리자, 벌어진 그의 입 안에서 날카로운 이빨이 빠르게 자라났다.
“이게 뭐야?”
전송이 창백해진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석목의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하얀 빛이 더욱 강해지더니 농민의 머리를 완전히 감쌌다.
이어 석목이 손을 뗐다. 그러자 그의 몸에서 하얀 빛을 발하는 법력에 둘러싸인, 사람 형상의 회색 연기가 따라 나왔다.
연기가 분리되자 농민의 몸에서는 싸늘한 죽음의 기운이 느껴졌다.
사실 석목이 갑자기 이곳에 나타난 것은 이유가 있어서였다.
그는 이날 말상의 청년을 처음 본 순간부터 그의 몸에서 음침한 죽음의 기운이 은은하게 풍기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사령생물과 오랜 시간 접촉한 사람에게서만 느껴지는 기운이었다.
그래서 석목은 객잔에서 짐을 푼 뒤, 즉시 청년이 거주하는 곳으로 몰래 찾아온 것이다. 그리고 모든 것은 그의 예상대로였다.
석목은 고개를 돌려 전송을 보았다.
“대인….”
석목은 전송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른손을 휘둘러 그를 기절시켰다. 소란이 일어나는 것이 싫어 먼저 재워버린 것이다.
“너에게 지시한 자가 누구인지 말해라.”
석목은 법력으로 회색 연기를 꼼짝 못하게 가둬둔 채로 말했다. 그러나 회색 연기는 제자리에 가만히 있으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석목은 콧방귀를 뀌고 오른손을 흔들었다. 그러자 화염구가 나타나서 연기의 다리를 향해 날아갔다.
“악!”
날카로운 비명소리가 석목의 머릿속에 들려왔다.
“말할게…. 말하면 되잖아….”
연기가 다급히 말했다.
* * *
이 각 후, 마을 중심에 위치한 이 층 건물.
쾅!
석목은 건물의 문을 발로 걷어차서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주위를 둘러보던 석목의 시선이 곧 어느 방에 고정됐다.
끼익!
방문이 열리자 이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안색이 창백한 남자가 안에서 걸어 나왔다.
“이렇게 늦은 시간에 갑자기 집에 난입하다니, 너무 예의가 없는 것 아닌가요?”
남자가 말했다.
“이것이 무엇인지 아나?”
석목이 오른손을 뻗자 그의 손바닥 위에 사람의 모습을 한 회색 연기가 나타났다. 그것의 전신은 하얀 빛의 사슬에 속박되어 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빨리 사령을 잡다니 역시 대단하군요.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그가 마치 미리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말했다.
바로 그때, 석목의 발아래에 갑자기 회색의 원형 진법이 나타났다.
진법의 테두리에서 투명한 회색빛의 장막이 솟아올라 석목의 주위를 감쌌다. 이어 석목의 사지에 반짝이는 회색빛의 고리가 생겨나더니 그의 법력을 속박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손에 회색 지팡이가 나타났고, 지팡이의 끝에서 회색빛이 반짝이더니, 회색 연기와 함께 석목의 전후좌우에 강시가 한 구씩 나타났다.
석목과 마주보고 있는 강시는 회색이었고, 나머지 세 구는 하얀색이었다.
선천초기의 실력을 가진 회색 강시가 그들 중 가장 강했으며, 나머지 세 구는 후천후기의 실력을 지녔다.
남자가 소리쳤다.
“하하, 설령 네 법력이 아무리 고강하다 해도, 속박된 상태에서는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네 시체와 영혼을 제물삼아 제사를 올려서 나도 성계술사가 될 것이다!”
회색 강시가 석목에게 매섭게 주먹을 뻗자 일 장 크기의 권영이 그를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다른 세 강시도 한꺼번에 석목에게 달려들었다.
바로 그때, 석목의 몸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더니 두꺼운 진기의 보호막을 형성했다.
동시에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금전검이 주위를 한 바퀴 돌며 세 하얀 강시들의 목을 긋고 지나갔다.
하얀 강시들의 움직임이 순간 멈추더니, 곧이어 흉측하게 생긴 머리 세 개가 일제히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그 순간, 금전검이 회색 털 강시 앞에 번쩍하고 나타났다.
회색 강시가 커다란 손을 휘두르자 무수히 많은 조영이 생겨나 금색 빛을 할퀴었다. 그러나 조영들은 금빛에 닿는 순간 전부 무기력하게 사라졌다.
푹!
금색 빛이 일렁이더니 회색 강시를 내려베었고, 강시의 몸은 세로로 쪼개져 두 토막이 났다.
그제야 석목의 몸에 닿은 회색 권영이 폭발했다. 그러나 진기의 보호막이 조금 일렁였을 뿐, 석목은 전혀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일련의 과정은 호흡을 한 번 할 만큼 짧은 시간 내에 끝났다. 금전검이 나타나자마자 남자의 공격은 거의 순식간에 무력화된 것이다.
석목의 몸을 보호하는 진기의 보호막과 금전검을 본 남자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선천무인! 영기!”
소스라치게 놀란 그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무언가를 시도하려 했다.
그때 금전검이 반짝이더니 지팡이를 두 토막을 냈다. 그리고 남자의 지척에서 빠르게 선회하기 시작했다.
다리가 풀린 남자는 제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퍽! 퍽!
석목의 몸을 감싼 붉은 빛이 부풀어 올랐다. 그러자 그의 사지에 묶인 회색빛의 고리가 견디지 못하고 빛의 가루로 변해 흩어졌다.